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EPISODE.86
* * *
어슴푸레 번져나갔던 노을도 점점 희미해지고.
우뚝 솟은 바위산과 협곡 사이가 하나둘 어둠으로 덧칠되어갈 무렵.
팟, 파바밧-.
바위산과 협곡 사이를 뛰어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마치 야조(夜鳥)라도 된 듯 날랜 움직임. 한 번의 발 구름으로 수십 미터가 넘는 거리를 도약하고, 바위산과 바위산의 꼭대기를 넘나든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대단한 재주이며 곡예일 것이다.
허나, 정작 그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이들에겐 그리 대수롭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협곡 사이를 내달리는 이들 중 강자(强者)가 아닌 이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물며 일행 중 가장 약한 축에 속하는 엘프족 전사들 역시 어지간한 기사 이상의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다 바람의 정령에게 가호까지 받고 있으니-.’
러셀 역시 그 무리 사이에 끼어 있었다.
갸아아아악-.
크르르르륵-!
날이 어두워졌기 때문일까.
마물들의 본격적인 활동을 알리듯, 곳곳에서 들려온 흉험한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귓전을 찔러댔다.
펄럭, 펄럭-!
그와 함께 들려온 커다란 보자기 펄럭이는 소리.
이어, 화아악!
협곡의 아래쪽에서부터 상승기류를 타고 비행형 마물 몇 마리가 솟구쳐 올랐다.
캬아아아악-
아가리를 쩍 벌리며 일행을 위협했다. 자르라니 자라난 이빨이 어둠 사이에서 날카롭게 빛을 발한다.
어지간한 황소 따위는 한 발로 움켜쥐고 날아오를 듯 커다란 덩치와 날개를 가진 마물들이었다.
도검(刀劍)처럼 날카로운 발톱에 치이기이라도 한다면, 설혹 성인 장정이라 해도 종잇장처럼 찢겨 나갈 터.
“대괴조(大怪鳥) 락(Roc)! 서부의 안개 골짜기에나 사는 녀석들이 여기에는 왜?!”
왕도 백탑 소속 마도사, 올리브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놈들에겐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들렸던 걸까. 녀석 중 하나가 눈을 부라리더니 큰 부리를 딱딱거리는 순간.
느닷없이 하늘에서 불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적뢰(赤雷)!’
벼락과 불꽃이 어우러지며 어둠을 몰아내고, 꽈르릉!
거기에 직격당한 대괴조 한 마리가 눈에 흰자위를 드리운 채 숯덩이로 변하며 협곡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게다가 러셀의 마법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이니.
‘연쇄(連鎖)-!’
펼쳤던 손아귀를 말아 쥔다.
꽈릉!
다시 한번 폭발이 일어났다. 숯덩이가 되어 떨어져 내리는 대괴조의 몸에서부터 불꽃이 튀어나오더니 다섯 방향으로 흩어졌다.
충분한 화력은 물론 정확도까지 갖춘 공격이 물 흐르듯 연계되었다.
‘대괴조를 저렇게 간단하게?’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마법 방어력을 가진 녀석들이었다.
때문에 일격에 처리하기 위해선 꽤 고위의 주문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끝장을 내었다는 건-.’
대괴조가 올라오기 전부터 그 기척을 감지하고 마법을 준비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과연 소문대로의 실력이라는 거겠지.’
마법계에 몸담은 이들 중, 새롭게 등장한 신성.
‘러셀 레이먼드’에 관한 소문을 들어보지 못한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들로 바빴던 탓에, 올리브가 그의 실물을 보는 것은 이번 토벌전이 처음이었다.
‘같은 탑주급임에도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줄이야.’
이제 스물 중반 정도밖에 되지 않은 청년을 상대로 소문의 천재성을 확인한 올리브가 혀를 내둘렀다.
이제 남은 대괴조는 한 마리뿐.
‘아마도 러셀 백작이 똑같이 처리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본 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하늘을 일견하며 실소(失笑)하고 있었다.
‘……?’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채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일 초 남짓.
“으랏챠!”
별안간 괴성과 함께 일행들 사이에서 뛰어오르는 이가 있었다.
쾅!
포탄처럼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신형과, 대괴조의 가슴팍을 후려치는 우악스런 주먹질!
콰적, 쾅!!
커다란 불꽃의 폭발과 함께 대괴조의 몸이 수직으로 수 미터가량을 튕겨 나갔다.
우득, 우드득!
갈비뼈가 모조리 박살 나는 것은 물론 척추마저도 틀어진 듯, 온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러댔다.
갸아아아악-!
그것이 단말마였다. 비명을 지르는 자세 그대로 놈이 협곡의 아래쪽을 향해 추락하고.
뒤이어 뛰어올랐던 거구의 사내가 내달리고 있던 일행들의 옆에 내려섰다.
‘버밀리온……울센.’
염탑의 광호(狂虎).
이 사람을 마법사라고 불러야 하는 건지, 그렇지 않으면 무투가라고 불러야 하는 건지.
‘후려친 주먹에서부터 강렬한 폭발이 일긴 했으니, 분명 마법이긴 할 텐데…….’
혼란스러워하는 올리브를 뒤로하며 러셀의 기억이 천천히 과거로 거슬러 갔다.
불과 수십 분 전, 상처 입은 페더족 하나가 떨어져 내렸던 순간으로.
* * *
“나, 낙오. 은발의 센티넬……. 위, 위험.”
더듬더듬 흘러나온 말에 요정족들의 분위기가 대번에 달라졌다.
이 자리에 있는 요정족들 중, 은발의 센티넬이 누구를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으므로.
드워프 족장 에이트리의 시선이 아레인을 향했다.
“아레인님.”
이어 페더족의 족장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닷새 전 이오님과 함께 고립된 이들을 구출하고자 나섰던 녀석입니다. 이 녀석이 이렇게 돌아왔다는 건…….”
이오를 비롯한, 당시 함께 나섰던 이들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본래라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이다. 허나 추락한 페더족 사내는 기력이 다 된 듯, 혼절해 버렸으니.
그때였다.
“잠시만, 잠시만 물러서 주시겠습니까.”
뒤쪽에서 나타난 러셀이 페더족 사내를 향해 다가간 것은. 아공간을 열며 능숙하게 포션을 꺼내든 그가, 마개를 열었다.
퐁-.
포션 특유의 진한 향이 병 안쪽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에이단 아울의 촉매제가 들어간, 일반적인 그것에 비해 효능이 2할가량 높아진 포션이었다.
단숨에 모든 상처가 회복되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기력은 회복할 수 있을 터.
그런 러셀의 생각대로.
“끙…….”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불과 몇 분도 흐르지 않아 혼절해 있던 페더족 사내가 눈을 떴다.
기다렸다는 듯 페더족 족장이 물었다.
“괜찮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길 잠시간, 이내 상황을 파악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말해보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를.”
.
.
족장의 물음에, 기력을 되찾은 사내가 힘겹게 입을 열었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것이…….”
결코 짧지 않은 설명, 허나 그 내용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정보가 들어온 즉시, 고립된 인원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부상자와 어린아이가 너무 많았기에 빠른 속도로 복귀할 수 없었다.’
복귀의 속도가 예정보다 느려지는 것은 물론, 계속해서 마물들의 습격을 받는 것 역시 당연한 전개라.
“처음 몇 번의 습격이야 잘 막아냈지만……그게 문제였습니다.”
습격을 막아내었으면 잘 된 거지, 그게 문제라니.
“그것이 도대체 무슨 소린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는 에이트리를 향해, 아멜리아 머윈이 설명했다.
대수림에 있는 엘프족은 잘 모르겠지만, 전쟁을 몇 번이나 경험해본 그들에게 있어선 꽤 익숙한 전개였으므로.
“……습격, 잘 막아냈다고 해도, 피로가 누적되는 것까지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야.”
니콜로가 말을 보탰다.
“부상자들이 계속 늘어가는 것은 물론, 그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던 인원들 역시 점점 다치고 지쳐갔을 겁니다.”
그 말이 옳다는 듯 페더족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을 이었다.
“예. 그러다 보니 이동 속도는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동안 대규모 마물 무리와는 마주치지 않았다는 점이지만…….”
이곳이 대규모 마물의 군세에 공격을 당한 것이 바로 어젯밤의 일이다.
만약 이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면, 그들 또한 비슷한 수의 마물에게 공격을 당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었던바.
“─아!”
아레인이 탄식했고 에이트리가 자신의 쇠망치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도우러 가야 하오!”
니콜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저희 측에서도 가세하겠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요정족에게 빚을 하나 더 지워줄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터.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이미 엔디미온과 요정족은 동맹을 맺은 사이 아닙니까.”
이어 고개를 돌렸다.
“러셀 백작.”
“예. 탑주님.”
“아무래도 위험에 빠졌다는 엘프 중, 자네의 지인이 있는 것 같은데 나설 텐가?”
“물론입니다.”
토끼 인형을 타고 주변을 날아다니던 백탑주 또한 입을 열었다.
“바람을 이용한 백탑의 탐색 마법도 도움이 될 거야. 올리브. 너도 함께 가도록 해.”
이걸로 둘.
한 번에 너무 많은 전력이 진형을 이탈하는 것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한 사람 정도만 더 함께 보내면 될 터.
“사제만 보내면 마음이 쓰일 테니,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버밀리온 경. 경까지 나서준다면 충분하겠군.”
탑주급의 마법사가 셋, 대륙 어디를 가든 결코 무시 받지 않을 전력이었다.
그 사이 요정족들 역시 지원 인원의 선별을 마쳤다.
“아즐란.”
“예. 아레인님.”
“어젯밤 바로 복귀하느라 지쳤을 테지만, 부탁할 수 있는 이가 당신밖에 없군요. 나서주실 수 있나요?”
잦은 전투로 피로와 부상이 누적된 다른 전사들보다는, 그래도 아즐란의 상태가 나은 편이었으므로.
“물론입니다.”
그가 주먹으로 자신의 심장 어림을 가볍게 두드렸다.
“푸른 등나무 부족의 첫 번째 수호자 아즐란. 반드시 이오님과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그를 향해 아레인이 덧붙였다.
“일족의 레인저 스물과 전사들을 데리고 가세요.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
.
그렇게 이오가 있다는 방향을 향해 이동을 시작한 지 수십 분. 뒤따르는 올리브를 향해 러셀이 물었다.
“올리브님. 뭔가 찾아내신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 물음에 바람을 이용해 넓은 범위에 탐색 마법을 흩뿌리고 있던 그녀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직이에요.”
“음…….”
벌써 수십 킬로미터가량을 이동한 그들이다.
페더족 사내가 말한 위치대로라면, 슬슬 그들의 모습이 보일 때도 되었건만.
그런 러셀의 모습에 옆에서 달리던 버밀리온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전투가 일어나게 되면서, 방향을 가늠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휩쓸리게 된 모양이로군.”
전장에선 꽤 흔하게 있는 일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버밀리온이 아즐란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속도를 더 높여야 할 듯한데, 가능하시겠소?”
“으음.”
그 말에 아즐란이 낮게 침음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그러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군요.”
아즐란 본인이나 엔디미온의 마도사들이라면 모르겠지만, 문제는 여타의 평범한 엘프들이었다.
지금의 속도를 쫓아오는 것 정도가 그들에게 있어선 최선, 그마저도 아즐란이 소환한 바람의 상급 정령으로부터 가호를 받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가버렸다간, 정령의 가호가 사라져 이들이 뒤처져 버린다.’
이런 상황에선 결단을 내릴 수밖에.
“먼저 가서 계시면, 저희도 곧바로 뒤따라가겠습니다.”
탐색이 아니라 단순히 뒤를 쫓는 것이라면 엘프족의 정령술로도 충분히 가능했기에.
“그럼, 그렇게 하겠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버밀리온이 러셀과 올리브를 향해 눈짓했다.
그리고.
쩌저적, 쾅!
바위산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며 세 사람의 신형이 포탄처럼 전방을 향해 쏘아진다.
콰과과과과과!
일어난 돌풍과 먼지구름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순식간에 점이 되어 멀어지는 세 사람을 보며 뒤따르던 엘프족들이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세상에…….”
“정령의 가호를 받지도 않은 인간이 저런 몸놀림이라니…….”
비록 초인(超人)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그들 역시 세상의 경계를 한 걸음쯤 벗어나 있는 괴물들.
아무래도 그만한 강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인간이나 수명이 긴 엘프들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그로부터 잠시 후.
“찾았어요!”
올리브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남쪽으로 4km 지점! 전투의 기척이에요!”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