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175
175화
EPISODE.88
러셀이 대수림을 바라보고 있던 그 시각, 그런 러셀을 응시하고 있는 시선이 하나 있었다.
보통의 엘프에게선 결코 발현될 리 없는, 은발에 은안을 가진 독특한 분위기의 엘프.
바로 이오였다.
‘키도 지난번보다 조금 더 자라신 것 같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과거의 기억을 되짚었다.
‘어깨는 언제 저렇게 넓어지신 거지…….’
7년.
수백 년을 살아간다는 엘프의 생애에 비교하자면, 7년은 결코 길지 않은 세월이었다.
허나 그런 엘프와는 달리 인간의 평균적인 수명은 수십 년 내외.
그런 인간에게 있어 7년이란 절대 짧지만은 않은 세월이었던 바.
유유히 흘러간 7년이란 시간은, 이제 막 소년티를 벗어 던졌던 청년을 한 사람의 사내로 성장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회의를 마치고 빠져나오던 아레인이 자신의 딸을 발견한 것은.
“이오……?”
성벽 위에 올라선 사내를 멍하니 바라보는 이오의 모습에 아레인의 얼굴 위로 푸근한 미소가 어리고.
‘그래. 저 아이도 그럴 시기가 되긴 했지.’
이어 슬그머니 장난기를 머금은 그녀가 자신의 딸을 향해 다가갔다.
부드러운 손길로 어깨를 감싸고, 딸아이와 같은 곳을 응시하며 물었다.
“저 젊은 분이 바로 네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야기하던 은인(恩人)이었지?”
“어, 어머니.”
갑작스런 음성과 손길에 화들짝 놀란 이오가 입을 열었다.
당혹스런 눈으로 러셀과 아레인을 번갈아 보며 황급히 중얼거렸다.
“제, 제가 언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야기했다고…….”
혹시나 들리지는 않았을까 걱정한 시선에 발갛게 달아오른 볼까지. 그런 이오의 반응이 퍽 재밌다는 듯 아레인이 키득 하고 웃었다.
“지난 몇 년간, 밥을 먹을 때에도 하늘을 보다가도, 숲을 돌보다가도 이야기를 했으면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한 게 맞지 않니.”
얼굴이 홍시처럼 붉게 달아오르고, 당혹스런 눈동자를 숨기지 못하며 이오가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그런 말씀은 은인께 폐가…….”
지난 며칠간, 엔디미온의 마도사들과 생활하며 러셀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게 된 그녀였다.
덕분에 러셀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또한 알게 되었다.
‘이미 엔디미온의 왕족과 연을 맺으신 분.’
위험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러셀이었다.
당시의 강렬했던 기억 때문이었는지, 언제부터인가 그의 모습이 종종 머릿속에서 그려지기도 했었고.
허나, 지금 그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자신이 이런 마음을 먹는 것조차 불편한 일이 될 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아는 것을 어머니 아레인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장난이라니.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이 깃들려는 찰나, 아레인이 손을 움직였다.
“이오. 내 딸아.”
어렸을 때처럼, 이오의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겨 찬찬히 정리해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단다.”
조금 전과는 달리,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
“허나 걱정하지 말렴.”
“……?”
“저 젊은 마법사와 너 사이에는 강한 운명의 끈이 이어져 있으니 말이야.”
그제야 아레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챈 이오가 더듬더듬 말했다.
“어, 어머니. 설마 천견(天見)을……?”
천견(天見).
단순히 힘이 세고 경험이 많다고 해서 일족을 이끄는 므뇌르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하이엘프가 사라졌다곤 하나, 엘프들 가운데는 하이엘프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이들 역시 존재했던바.
그들이 바로 엘프족의 므뇌르다.
그리고 그런 므뇌르는 과거 하이엘프들이 지니고 있던 능력 중 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천견(天見) 역시 그중 하나였다.
‘미래시(未來視)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사람의 운명을 내다보는…….’
선명하게 내다보는 미래시와는 달리, 천견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안개가 낀 듯 흐릿하고 두리뭉실한 것뿐이라.
게다가 천견은 자신이 원할 때 발동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일부를 내다본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했던바.
이오의 중얼거림에 아레인이 대답 대신 이오의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단다.”
“네─?!”
“저 젊은 마법사의 어깨에 올려져 있는 운명은 결코 가볍지 않아. 그리고…….”
반 호흡 말을 쉰 후.
“네가 마음을 포기하지 않겠다면─.”
속삭였다.
“언제고 저 어깨 위에 올려진 운명 또한 함께 짊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 * *
사흘이란 시간은 동맹군에게 있어 어떤 ‘확신’을 얻기 위한 시간이었다.
남겨진 5군단만으로도 포위망을 유지할 수 있으며, 7군단이 섬멸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지난 사흘간의 전투 끝에 니콜로는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어쩌면 협곡 안에 흩뿌려져 있는 마물의 숫자는 십만이 훌쩍 넘을지도 몰랐다.
그에 비해 섬멸 작전을 펼쳐야 할 7군단의 숫자는 오만 남짓.
결코 작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마물들에 비하면 확연히 적은 수라.
허나, 7군단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가 하나 같이 제대로 훈련을 받은 정병이었던 바.
‘전력 교환비의 개념까지 대입하면, 전투의 양상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불 보듯 뻔하지.’
러셀을 비롯한 여타의 인물들 역시 이미 그와 같은 사실을 확신한 후였다.
이후 이어진 마물과의 전투는 문자 그대로 일방적이었다.
“방패수 앞으로!”
“창병, 찔러 창─!”
진형을 이뤄 맞서는 정병들의 공세에 마물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진다.
게다가 저써클이라곤 하나 7군단 측에도 마법사들이 소속되어 있었던바.
“마법병단 앞으로!”
“방패수들, 마법병단을 보호하라!”
“발사!”
뿌우우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다채로운 마법들이 하늘을 물들였다.
마법포격이라.
한 발 한 발의 위력이 강맹하진 않았으나, 많은 수의 마법이 겹쳐지며 넓은 범위를 순식간에 초토화시킨다.
콰과과과과과과!
마법사로서 가지는 범용성을 포기한 채, 오로지 군(軍)의 목적에만 맞춰 마법을 익힌 마법사들이라.
수에서 밀리지 않게 되자, 엘프족을 비롯한 요정족들 역시 저마다의 진가를 드러냈다.
“서풍이여, 제 화살에 깃드소서-!”
“샐러맨더, 타오르는 불꽃의 정령이여! 내 앞을 가로막는 적들에게 그대의 숨결을!”
엘프들은 정령과 활을 이용해 마법과 다를 바 없는 광경을 만들어냈다.
“으하하하하!”
“숫자만 믿고 날뛰어대던 놈들의 골통을 부수고 있으니, 아주 속이 시원하다! 시원해!”
철갑으로 몸을 중무장하고, 거대한 도끼와 유성추를 휘두르는 드워프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사 그 자체이기도 했다.
게다가 페더족과 페어리들 역시 연신 하늘을 날아다니며 비행형 몬스터들을 견제하고 있었으니.
갸르르르륵-.
캬아아아아아악-.
빠른 속도로 마물들이 밀려나는 가운데, 정확하게 보름 후.
5군단을 비롯한 동맹의 인원들은 붉은 협곡과 대수림의 경계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음…….”
고개를 들어 대수림의 외곽을 바라보던 러셀이 길게 침음했다.
처음 목표했던 대로, 상당수의 마물들을 토벌하며 대수림의 바깥쪽에까지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은 표정이라.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은 본래 대수림을 터전으로 삼던 여러 요정족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럴 수밖에.
고향을 거의 수복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대수림 안쪽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너무 싸늘했으므로.
“정령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항상 푸름을 유지하던 상록수가 저렇게 어두운 빛깔로…….”
요정족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처음 마물이 쏟아져 나온 곳은 분명 대수림의 안쪽, 깊은 곳이었다.
그렇기에 여전히 많은 수의 마물들이 대수림 안쪽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고 여겼거늘.
‘마물의 기척이 느껴지기는커녕, 아무런 생물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고요하기만 하니…….’
숲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어쩐지 불길하게 일렁이는 가운데 니콜로가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그 이유로 페더족들이 정찰을 나가 있는 상황이 아닌가. 조금만 더 기다려보도록 하지.”
드워프들이 개발했다는 녹화영사기까지 가지고 나갔으니, 그들이 돌아온다면 숲의 상황을 조금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을 터.
“……나간 지 벌써 하루째. 곧 돌아올 거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토끼 인형에 몸을 맡긴 채, 허공을 붕붕 날던 아멜리아 머윈 역시 한마디를 보탰다.
아니나 다를까.
퍼덕, 퍼덕, 퍼덕-.
오래지 않아 날갯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일족의 전사들이 저기 돌아오는군요!”
울창하게 우거진 녹음 위쪽에서부터 몇몇 페더족 전사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며 러셀이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군.”
니콜로가 고개를 끄덕였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은인?”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 대수림은 마물들이 득실거릴 것으로 예상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 정찰을 다녀왔다고 보기에는 너무 말끔해 보여서요.”
“─아!”
“허어!”
“그런?!”
그제야 러셀과 니콜로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를 이해한 요정족의 세 대표가 탄성을 터뜨렸다.
이어 아레인이 물었다.
“그 말은 대수림 안쪽에는 더 이상 마물들이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합니다만…….”
러셀의 중얼거림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이오와 함께 숲을 휘감고 있는 검은 안개와 같은 기류를 노려봤다.
“그럼 숲을 휘감은 저 불길한 어둠은 대체…….”
불안해하는 그들을 향해 러셀이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영사기에 촬영된 내용을 확인한 뒤 해야 할 듯합니다.”
.
.
츠츠츠츠츠츳-.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가 막사 가득 울려 퍼지고, 곧이어 한쪽 벽면을 따라 빛이 일렁였다.
투영된 빛을 따라 상이 맺혀드는 것과 함께 대수림 안쪽의 상황이 비친다.
“이것도 마찬가지로군요.”
“마물은커녕 새나 작은 짐승조차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숲이라니.”
“뿐만 아니에요. 열매가 맺혀 있는 나무가 하나도 없어요.”
영사기에 담긴 내용을 확인하며 아레인과 이오가 말을 주고받았다.
정찰을 나섰던 페더족이 하나둘이 아니었던 만큼, 영상 자료는 더 남아 있었지만 하나같이 대동소이한 광경들이 펼쳐진다.
어쩐지 죽어 버린 것만 같은 숲의 분위기에 자리에 있는 요정족들의 분위기가 침통해지는 가운데, 러셀이 말문을 열었다.
“혹시 대수림의 위쪽에서 촬영한 자료도 있습니까?”
“대수림의 위쪽은 왜 그러는가?”
니콜로의 물음에 러셀이 영사기를 조작했다. 몇몇 장소들을 연달아 이어 붙이며 말했다.
“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숲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검은 안개가 짙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안개가. 짙어져?”
아멜리아 머윈의 느릿한 음성과 함께 장내의 인원들이 러셀이 조작한 화면에 집중하고.
곧이어 황탑주가 탄성을 흘렸다.
“허. 그렇군. 거의 티가 나지 않을 정도인데, 놀라운 눈썰미야.”
이어 영상을 촬영해온 페더족 사내 중 하나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이어 영사기의 내용을 주르륵 뒤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상당히 높은 고도에서 찍은 대수림의 광경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허─!”
“무슨 저런!”
그 광경에 막사 내의 인원들이 일제히 기함했다.
대수림의 한복판을 따라,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듯 넓게 펼쳐진 무저갱과.
그 무저갱의 절반 이상을 뒤덮고 있는 것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거대한 어둠이라.
숲을 둘러싼 안개는 바로 그 무저갱의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