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189
189화
EPISODE.95
라그나 블레이드(Ragna Blade).
신들의 황혼(Ragnarok)을 이름으로 한 이 6써클 마법은 블레인 트릴로지의 오리지널리티 마법인 동시에 검의 형상을 한 파멸이었다.
화아악!
다섯 자루의 불꽃 검이 모습을 드러냄에 따라 강렬한 열기가 파도처럼 범람하며 일대를 덧칠하고.
일순 주변의 수분이 증발하는 듯한 착각이 이는 것과 동시에, 다섯 자루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쐐애액!
붉은 궤적을 아로새겼다.
검(劍)의 형상을 하고 있는 만큼,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칼날이 기네비어 궁의 외벽을 베어낸다.
번쩍─!
눈 깜짝할 새에 다섯 자루의 검이 교차하고, 섬뜩한 절삭음이 울렸다.
서각, 서거걱-!
열 조각, 그 이상으로 나눠진 궤적을 따라 뜨거운 증기가 피어올랐다.
라그나 블레이드는 날카로운 칼날을 가진 검인 동시에, 극한까지 압축된 불꽃의 집약체.
대리석과 화강석, 외벽은 물론 기둥과 플로어의 바닥에 이르기까지.
기네비어 궁을 구성하고 있던 갖은 종류의 석재, 광물들이 라그나 블레이드의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련의 일들이 베어내는 것과 동시에, 그야말로 ‘앗’하는 순간 일어난 것이었으니!
잘려 나가고 녹아내린 절단면을 따라 상단의 것들이 흘러내렸다.
기네비어 궁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누구 하나 손쓸 수도 없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
쿠과과과과과과!
수십 톤, 그 이상의 무게를 자랑하던 궁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며 지축이 크게 흔들렸다.
먼지구름이 눈 앞을 가리듯 자욱하게 치솟아 오른다.
설령 어느 정도 몸을 단련한 오러 수련자라 해도, 저만한 무게에 짓눌린다면 멀쩡하지는 못할 터였다.
강인한 육체와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인 만큼 죽지는 않더라도 몸의 뼈가 몇 대는 부러졌을 충격이라.
그것은 오러를 수련했다는 헤카테 왕녀 역시 마찬가지일 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인은 라그나 블레이드를 거둬들이지 않았다.
“끌끌끌.”
기묘한 웃음소리와 함께 다섯 자루의 화염검을 허공에 고정시키며 무너져 내린 기네비어 궁의 잔재를 겨눴다.
화르륵-.
다섯 자루의 검이 맹렬한 불꽃을 토하려는 찰나의 순간!
꽈릉!
진홍빛 불기둥이,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콰과과과과!
.
.
꽈릉!
불길과 함께 일어난 폭발에 무너져 내렸던 궁의 허공으로 밀려 올라갔다.
작게는 수백 킬로, 많게는 수 톤에까지 달하는 무게를 밀어내는 화력이란!
충천하는 불길에 기네비어 궁의 하늘 전체가 붉은색으로 물든다.
그보다 반 박자 늦게.
쿠구구궁-.
불꽃과 범벅이 된 석재들이 다시 시장으로 낙하했다.
메테오 폴.
수백 개에 달하는 유성이 떨어져 내리는 듯 장엄한 광경.
그 잔해가 아무렇게나 떨어져 내리며 일대를 위협했다.
─쿵, 쿵, 쿵!
블레인이 찬찬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로구먼. 레이먼드 백작.”
쿠쾅, 화르르륵-.
집채만 한 석재 하나가 불길에 범벅이 된 채, 자신의 바로 옆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
아마도 이까짓 석재쯤이야 자신에겐 아무런 위협조차 되지 않는 자신감의 발호일 테지. 블레인은 모래 먼지 사이로 안광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어. 끌끌.”
분명히 칭찬임에도 불구하고 인상을 찌푸린 러셀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바라봤다.
수 미터가량.
반구형으로 펼쳐진 쉴드 안쪽에 당황한 눈으로 서 있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헤카테와 로열 나이츠를 비롯한, 기네비어 궁의 1층에 있던 인물들이었다.
‘보호할 수 있었던 건……, 이게 다인가.’
워낙 창졸지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위층에 있는 이들의 목숨까지는 미처 구하지 못했던 것.
무너져 내린 궁의 잔해에 죽은 이들의 시신이 흉물스럽게 짓눌려 있는 것이 보였다.
일격에 절명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끄으으으…….”
“다, 다리가…….”
“살려……살려주세요.”
그랬다면 몸의 일부만이 짓눌리고 터져 나간 채, 죽지도 못하고 끔찍한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 가운데 블레인이 자신의 턱수염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흐음. 일견 하나의 쉴드처럼 보이지만, 작은 파편을 여러 개 이어붙여 만든 것이로군. 육각 구조를 이용해서 강도를 높인 것인가?”
러셀을 둘러싸고 있는 푸른색의 반구형 쉴드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 짧은 순간에 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한 마력 컨트롤이로군.”
자신이 벌인 행위에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에 대한 애도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마법에 대한 이해와 진리만을 탐구하는 광기(狂氣)어린 마법사의 용모라.
러셀의 쉴드를 응시하던 그가 끌끌거리며 웃었다.
“아카이럼, 그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필경 자네에게 당한 것이겠지. 그렇지 않나. 레이먼드 백작?”
그때마다, 볼을 따라 피어난 검버섯이 흉물스럽게 씰룩였다.
“오만과 오판. 그것이 언젠가 스스로를 잡아먹을 것이라 누누이 가르쳤거늘……, 결국은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했구나. 이 녀석아.”
제자의 혼을 위로하는 듯하지만, 안타까움이라곤 터럭만큼도 묻어나지 않는 음성이었다.
그럴 테지.
그에게 있어선 제자 또한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체스 말에 불과했을 뿐이니까.
그때였다.
뿌드득-.
궁이 무너져 내리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주저앉아 있던 헤카테가 으스러져라 이를 갈아댄 것은.
직후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블레인 트릴로지…….”
왕재(王才)의 발현, 서릿발 같은 기세가 그녀의 음성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자리에 있던 로열 나이츠들은 저도 모르게 뒷목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꽤 잔뼈가 굵은 노귀족들조차 저도 모르게 고개를 조아리게 만들 법한 음성이었다.
“어이쿠. 왕녀 전하. 인사가 늦었나이다.”
허나, 그렇다 할지라도.
블레인은 주눅 들지 않았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왕재에 고개를 조아리기엔, 그가 살아온 세월이 너무도 길었으므로.
또한 그가 쌓아 올린 경지가 너무도 드높았으므로.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인가?”
“으흠?”
“그대가 노리는 것은 나의 목숨이었을 터. 그런데 왜…….”
차갑기만 한 음성에 깃들어 있는 것은 이 사태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무고한 이들을 위한 애도였던 바.
“……릴리안은 이제 막 열여섯 살 난, 어제 막 이 궁에 배치받은 아이였다. 귀족가의 아이라곤 하나 몰락한……그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아이였지.”
“베이카는 빵을 참 잘 굽던 아이였다. 왕궁에서 열심히 일해 돈을 모으고,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빵집을 왕도에 개업하는 것을 꿈으로 하는……그런─.”
“정원사 로토는 한 여인의 지아비였으며 또한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곧 있을 아이의 생일을 위해 꾸준히 돈을 모으고 있는 이이기도 했다.”
“요한, 토토, 유리아, 플로라, 올리비에…….”
거기까지 말한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들 모두가 기네비어 궁에서 일하고 있었을 뿐, 그 어느 쪽의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무고한 이들이었다.”
비릿한 핏물이 흘러드는 것을 느끼며 부릅뜬 눈으로 블레인을 노려봤다.
“그런 이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해놓고,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단 말이냐. 블레인 트릴로지!”
“허허. 이것 참…….”
서릿발 같은 호통에 블레인이 멋쩍은 듯 입맛을 다셨다. 왕녀라곤 하나, 자신의 절반도 채 살지 않은 아해.
그런 아해에게 호통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구십이 넘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특별한 경험이다.
그것도 잠시.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를 드리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왕재라. 분명 성군이 되셨을 테지요. 왕녀 전하.”
“─큭!”
역도의 무리에 가담한 주제에 저리 말하는 꼴이라니, 조롱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블레인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
“하실 말씀은 모두 마치셨습니까. 왕녀 전하?”
“이익!”
너무도 태연한 그의 모습에 목덜미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헤카테가 이를 악물었다.
다시 한번 한 마디 쏘아붙이려는 찰나, 척-.
러셀이 그녀의 앞을 막았다.
“말이 통할 자가 아닙니다.”
욕망에 점철된 채, 스스로가 만들어낸 광기에 매몰된 마법사. 그 실체를 본 것만 같은 기분이다.
러셀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저와 같은 길을 가지 않도록 스스로를 계속해 돌아보는 것뿐일 테지.
형형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며 러셀이 냉정하게 그와 자신 사이의 격차를 가늠했다.
상대는 7써클 마스터에 올라선 지 수십 년이 넘은 노괴. 그간 쌓아 올린 힘은 제자인 아카이럼 따위는 물론, 길리언 펄슨 조차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승리를 확신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이야기.
‘남은 수가 꽤 있긴 하지만…….’
그 모든 패를 까뒤집더라도, 승산은 채 1할이 되지 않는다.
한순간에 한계를 뛰어넘을 만한 계기를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요행을 바라는 일일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셀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남아있는 이들 중, 조금이라도 블레인을 상대할 만한 힘을 가진 이는 자신밖에 없었으므로.
게다가…….
“네가 나를 막아볼 생각이더냐?”
척척-.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외원을 따라 붉은 로브를 걸친 이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어깨에는 소속 마탑을 상징하는 불꽃의 검을 아로새긴 이들.
블레인의 마탑인 앤티골 적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이었다.
3써클과 4써클이 대다수라곤 하나, 결코 그 수가 적지 않았던바.
‘로열 나이츠의 지원을 기대하는 건……무리겠군.’
본능적으로 전투를 직감하고 검을 고쳐 잡는 로열 나이츠들과 병사들을 일견하며 러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전신에서 송곳처럼 날카로운 기세가 일어났다.
화아악-.
일어난 기세가 물먹은 솜마냥 주변을 무겁게 짓누르며 마나를 통제하기 시작하고.
주름과 검버섯 가득한 피부로 그 사실을 느끼며 블레인이 자신의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허허. 이렇게 놓고 보니 스승과 판박이로군.”
고목을 깎아 만든, 성인 장정의 팔뚝만큼이나 두꺼운 지팡이다.
“다리아.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계집도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곤 했지.”
스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러셀이 콧잔등을 가볍게 씰룩였다.
쉽게 당할 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제자인 이상 스승의 안위에 신경이 쓰이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였다.
그런 기색을 읽은 것인지, 불현듯 블레인이 말을 던진 것은.
“까불어 대기 전에 한 가지를 알려주마. 네 잘난 스승은 지금쯤 공허(空虛)와 어둠의 경계에 발이 묶여 있을 터. 너를 도울 여유 따위는 없을 것이다.”
공허와 어둠의 경계.
그 사실에 러셀이 멈칫하는 것보다 빠르게, 화아악!
라그나 블레이드가 그 열기를 뿜어냈다.
제 주인의 주변을 따라 회전하며 붉은 옷을 입은 무희마냥 춤을 춰대기 시작하고. 블레인이 지팡이의 끝으로 바닥을 쿡 짚었다.
“그 사실을 명심하고…….”
툭-.
“어디 한 번 재롱을 부려 보거라.”
다섯 자루에 달하는 불꽃 검이, 단숨에 러셀을 향해 달려들었다.
──────쐐애액!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