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201
201화
EPISODE.101
왕도의 외벽에서부터 왕궁까지 들어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성벽을 넘어서기 무섭게, 다리아와 헤밍웨이를 따르던 병력들이 기다렸다는 듯 행동을 개시했던 것.
“모두 물러나도록!”
“국왕 폐하의 손님이시다! 길을 비켜라!”
척척-!
그들이 나서며 인(人)의 장벽이 세워지는 것과 동시에 좌우로 갈라지고, 북적거리던 왕도의 한복판을 따라 기다랗게 길이 생겨난다.
‘이런 이유 때문이셨군.’
그제야 러셀은 왜 국왕이 두 사람을 안내인 삼아 병력들을 보냈는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냥 성을 통과했다간, 지나치게 시선이 끌리게 될 테니까.’
아레인과 이오.
두 요정족의 미모는 이야기 속 경국지색으로 묘사되는 엘프의 그것과 한 치의 틀림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성격이 조금 괄괄할 뿐.
‘무야호 님도 두 사람에 지지 않을 만큼의 미인이시니…….’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큰 소란이 일어났을 테지. 일행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인의 장벽을 만들어낸 기사와 병사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하나만 있어도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미인이었다.
그런 미인이 무려 셋이나 모여 있으니…….
아무리 훈련받은 그들이라 해도 본능적으로 시선이 움직이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병졸들이 만들어낸 길을 따라 걸으며 러셀이 다리아를 향해 물었다.
“스승님. 그런데 왕도의 상황은 조금 어떻습니까?”
자신이 임무를 나서던 당시만 하더라도, 왕도는 복구 작업이 한창이던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때에 비해 뚝딱거리는 소리가 상당히 줄어든 걸 보면, 작업이 상당히 마무리된 것 같긴 한데─.’
러셀의 물음에 다리아가 대꾸했다.
“전체적인 부분을 보자면 9할 이상 복구가 완료되었다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란다.”
“9할……, 남은 일 할은 왕궁입니까?”
러셀이 되묻자 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왕궁보다는 백성들의 생활을 위한 시설이 먼저 복구되기를 바랐던 국왕이었으므로.
마지막으로 남은 복구 현장의 대부분이 왕성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뭐,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일 할가량 남았다지만 대부분이 잡다한 시설들일 뿐. 주요 역할을 하는 본궁과 별궁들은 대부분 재건이 마무리되었으니까 말이야.”
그녀의 말대로, 왕도를 가로질러 도착한 왕궁의 모습은 러셀이 떠나기 전과 꽤나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무너져있던 궁들 위로, 새로운 궁들이 지어졌군.’
고작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만에 이 모든 공사를 마무리하다니, 과연 황탑의 마법사들이라고 해야 할까.
번듯하게 지어진 궁들을 차례로 일견하며 다리아가 낄낄 웃었다.
“니콜로, 그 꼬마 녀석이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고생했더라지.”
분명 앓는 소리를 내뱉는 니콜로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저리 웃으실 리가 없지.’
물론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일 뿐, 다리아 역시 마냥 놀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곳곳에서 왕도의 재건을 도왔을 터. 그렇게 자리를 비운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길 얼마간.
곧이어 일행들의 걸음이 멈춰 섰다.
척-.
새롭게 지어진 본궁(本宮), 그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대회의실의 앞에서였다.
‘새로 지었다더니, 구조는 그대로 두고 크기만 더욱 확장시킨 건가?’
어쩐지 대회의실로 들어가는 문의 크기가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고하시게.”
문 앞에 선 시종에게 다리아가 턱짓하자, 한차례 심호흡을 한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친다.
“폐하! 귀빈들이 당도했나이다!”
안쪽에서 답변이 들려왔다.
“들라 하라!”
쿠그그그긍-.
그와 함께 대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내부의 모습이 드러난다. 달라진 것은 문의 크기만이 아니었다.
‘회의장의 크기뿐만이 아니라 구조도 바뀌었나?’
좌우로 길게 이어진 것은 계단 형태의 좌석들. 그 위에 왕국의 중진들이 직급에 따라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정중앙에 난 길의 가장 상석에 국왕. 알폰소 라트모스가 앉아 있었다.
저벅, 저벅-.
문이 열리자, 안내가 끝났다는 듯 다리아와 헤밍웨이가 러셀을 지나치며 자신들의 자리로 향하고.
가운데 난 통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아멜리아 머윈과 러셀이 순서대로 고개를 숙였다.
한쪽 무릎을 가볍게 꿇으며 고했다.
“왕도 백탑의 탑주, 아멜리아 머윈. 폐하께서 내리신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왕국의 공작, 러셀 레이먼드. 폐하께서 내리신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나이다.”
두 대마법사의 보고에 국왕이 흡족한 표정으로 입술을 뗐다.
“참으로 수고 많았소. 내 경들의 수고로움은 결코 잊지 않을 테니, 이만 고개를 드시오.”
이어 그의 시선이 두 사람의 뒤쪽에 위치한 아인(亞人)들에게로 향한다.
먼저 고개를 숙인 것은 요정족 모녀(母女), 아레인과 이오였다.
“하얀 물푸레나무 부족의 므뇌르, 아레인이 엔디미온의 주인이자 요정들의 은인께 인사드립니다. 이쪽은 제 딸아이인 이오라고 합니다.”
“하얀 물푸레나무 부족의 센티넬, 이오가 요정들의 은인께 감사드립니다.”
엘프 특유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싱그러움이 느껴지는 촉촉한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회의장 특유의 분위기가 어쩐지 밝아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허어, 과연. 엘프.”
“소문대로의 모습이 아닌가?”
좀처럼 보기 힘든 엘프들의 모습에 닳고 닳은 궁정 대신들 사이로 일순 웅성거림이 일었다.
뒤이어 무야호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그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을 테지.
“수인족의 왕, 무야호가 엔디미온의 주인께 인사드린다─입니다.”
나름대로 앞의 두 엘프가 한 인사를 흉내 내긴 한 것 같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는 예법과 존대라.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회의장 내로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웅성거리던 대신들 역시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아차.’
그 광경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러셀이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한 걸음, 재빨리 무야호의 앞으로 나섰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직 존댓말이 익숙지 않은 이라…….”
“허허.”
다행히도.
“충분히 이해하네. 나 역시 요정족과 수인족의 문화에는 무지한 편이니 말이야. 괘념치 마시고 부디 내 쪽에서 실수를 범하더라도 양해를 부탁드리리다.”
국왕의 기분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이곳까지 오는 데 불편함은 없었는지 모르겠구려.”
도리어 그쯤이야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먼저 화제를 전환해 보이기까지.
“배려해주신 덕분에, 편안하게 왔답니다.”
아레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대처에 다시금 분위기가 훈훈해지기 시작하고, 그제야 러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 실수했다는 것은 알기라도 하듯, 눈동자를 굴리며 얼떨떨한 시선으로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무야호의 모습을 확인하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아무래도-.
‘왕도에 있는 동안, 기초적인 예절교육이라도 조금 해둬야겠어.’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앞으로 수인족들은 엔디미온의 영토 내에서 엔디미온의 국민으로 살아가게 될 테니까.
그리고.
무야호는 그런 수인들의 우두머리인 동시에, 명예직이나마 엔디미온의 귀족이 될 이였다.
‘제대로 된 예법을 익혀둘 필요가 있어.’
러셀이 그렇게 다짐하는 사이─.
“넓은 숲을 선뜻 내어주신 점. 대 수림의 모든 요정족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우리 요정들은 대륙의 숲이 다하는 그 날까지, 엔디미온의 주인께서 보여주신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허허. 은혜까지야. 부디 숲의 이웃들께서 대수림이 제 모습을 되찾을 때까지, 편안하게 머물렀다 가시기를 바라겠소.”
─아레인과 국왕 사이에 말이 몇 번인가 더 오가고.
“그러고 보니 먼 길 오느라 여독도 풀지 못한 손님들을 내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건 아닌가 모르겠군.”
차츰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 것을 느끼며 국왕이 부드럽게 웃었다.
“일단 오늘은 돌아가 여독을 푸는 것이 어떻겠소.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공들을 위해, 숲이 아름답게 우거진 곳에 있는 별궁을 비워두었다오.”
엘프족만큼은 아니라지만, 수인 역시 숲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것이 익숙한 종족이었으니까.
“그리고……부디 괜찮다면 사흘 후에 있을 궁정 무도회에도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시기를 부탁드리리다.”
왕도에 도착하기 직전 마차에서 러셀에게 들었던 바로 그 이야기였다.
“초대해 주신다면 얼마든지요.”
아레인이 다소곳하게 답변했고, 국왕의 시선이 무야호에게로 옮겨갔다.
“무야호 공. 공의 작위 수여식 역시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할 생각이오만, 공의 생각은 어떻소?”
“음…….”
그래도 자신이 존댓말에 익숙지 않다는 자각은 있었던 것인지, 슬그머니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그녀를 향해 러셀 입술을 달싹였다.
[뜻에 따르겠습니다. 폐하. 라고 말해요 어서.]“─뜻에 따르겠, 습니다. 폐……하.”
조금 어눌하긴 했지만 전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수준의 대답에 국왕이 기꺼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정족과 수왕의 왕도 방문.
그 첫날이 썩……무사히 끝나가고 있었다.
.
.
딴단단, 딴단단-.
그로부터 사흘, 왕궁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이 배경마냥 은은하게 깔리는 가운데.
스릉-.
국왕, 알폰소 라트모스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일부러 날을 세우지 않고, 화려하게 보석으로 치장한 예식용 검이었다.
그런 국왕의 앞에는 무야호가 고개를 숙인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평소의 자유분방하던 옷차림과는 달리, 몸에 꽉 달라붙는 정복을 차려입은 모습.
“수인들의 왕, 무야호는 들으라.”
검을 곧게 세운 국왕이 무릎 꿇은 무야호를 향해 말했다.
“그대는 수인들의 왕이자, 동시에 엔디미온의 귀족으로서…….”
국가에는 충성을 다하고, 약자에게는 아량을 베풀며 등등…….
귀족위를 받는다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치러야 할 의례와도 같은 과정이었다.
준엄한 분위기 속에 이런저런 말들이 이어지고, 국왕의 이야기가 마치기를 기다렸다는 듯 무야호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한 차례 두드렸다.
“자랑스러운 왕국, 엔디미온의 귀족으로서 그 모든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것을 맹세한─니다.”
조금 어색한 모습이 남아 있긴 했지만,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무야호의 모습에 곳곳에서 작게 탄성이 일었다.
“오오.”
“그 사이에 예법을 배운 모양이로군.”
그때까지도 조마조마한 얼굴로 가슴을 졸이던 러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척!
국왕이 손아귀의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그보다 반 박자 늦게, 검 끝으로 무야호의 양어깨와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선포했다.
“좋다. 그 말을 믿고 지금 이 순간부터 그대에게 리코스(λύκος)라는 성을 내리며 왕국의 명예 백작위에 봉(封)하노니!”
리코스란, 고대어로 고고한 늑대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였다.
“경은 오늘의 맹세를 결코 잊지 말지어다!”
“성은이……망극하옵니다.”
.
.
“후아.”
번거로운 예식을 모조리 끝마치고, 뒤로 물러난 무야호가 살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자신의 몸을 꽉 조이고 있던 넥타이와 단추를 끄르며 러셀에게 다가갔다.
“네가 시킨 대로 했다만, 정말 번거로운 과정이구나. 수컷.”
언제 퍼온 것인지, 그녀의 손에 들린 그릇에는 두툼하게 썰린 고기가 몇 장이나 올라가 있기까지.
“어쩔 수 없습니다. 인간들에겐 그 과정 또한 중요한 문화니까요.”
“음.”
잘 모르겠다는 듯, 무야호가 두툼한 고기 하나를 집어 자신의 입안으로 밀어 넣고. 그 사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이오가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러셀에게 다가섰다.
“러셀 님.”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그를 부르며 말했다.
“인간들의 무도회란, 남녀가 어우러져 함께 춤을 추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괜찮다면 저와 춤을 춰주실 수 있을까요?─그렇게 묻는 것보다 빠르게.
“이오 공, 그리고 리코스 경.”
이오와 무야호, 두 사람의 뒤쪽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다면 잠시 시간 괜찮겠소? 내 긴히 두 사람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오.”
보라색 머리칼과 눈동자, 헤카테 라트모스였다.
‘이 사람이…….’
‘국왕과 비슷한 냄새. 그렇다면 이 암컷이……!!’
단박에 그녀의 정체를 알아본 이오와 무야호가 시선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거절당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로군.”
두 사람의 수락에 눈매는 그대로 두고 입꼬리만 움직이며, 헤카테가 빙긋 웃었다.
어쩐지 서늘한 기색이 감도는 웃음이라.
“그렇다면 장소를 조금 더 조용한 곳으로 바꿨으면 하오만.”
그 웃음에서 흘러드는 한 줄기 오한을 느끼며 러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어 그녀가 걸음을 옮기다 말고 몸을 빙글 돌렸다.
러셀을 향해 말했다.
“아, 그대는 잠시 기다리고 있으시게. 여자들끼리만 나누어야 할 대화가 필요할 듯하니 말이야.”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어조, 하지만 왜 그 목소리가 꼭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어, 음…….’
제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 러셀이 입을 뻐끔거렸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리아가 손에 들린 팝콘을 주워 먹었다.
‘낄낄.’
와작, 와작.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