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229
229화
EPISODE.115
“페퍼, 너─!”
갑작스런 페퍼의 난입에 러셀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불러내지도 않았는데 설마 저쪽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정령화룡(精靈火龍)의 형상이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런 러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령계의 문을 비집고 나온 페퍼가 빠르게 날갯짓했다.
파다다닥-.
앙증맞은 날갯짓으로 목함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어 신기하다는 듯 그 안을 들여다보며 코를 벌렁거리는 페퍼.
킁킁, 갸륵갸륵-.
‘대체 저 안에 들 물건이 뭐기에…….’
러셀 또한 목함 속 물건의 정체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 각도에서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페퍼가 날아다니며 꼬리와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탓에 그의 시선이 막혀버린 것이다.
‘물, 불 바람, 땅……4대 원소의 기운이 동시에 느껴지기도 하는데.’
학계에선 세상을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네 개의 원소라고도 불리는 속성들.
그때였다.
갑작스런 페퍼의 등장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이들 사이로 누군가 돌연 입을 연 것은.
“어머!”
카밀라 왕녀였다.
“이 아이가 바로 러셀 경의 곁을 함께 한다는 바로 그 정령이로군요.”
그녀가 페퍼의 모습을 알아보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어쩜, 귀여워라…….”
화룡의 모습이 아니었다 뿐이지, 러셀이 종종 전장에서 그 모습을 불러내곤 했으니까.
병사들 중에서도 그 광경을 목격한 이가 하나둘이 아니었던바.
페퍼의 존재는 키옐 측의 인물들 사이에서도 꽤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 덕인지, 키옐의 군영 내에서는……어쩌면 대륙에 유일할지도 모르는 인간 정령사에 대한 소문이 떠도는 중이었고.
“허허, 과연.”
뒤이어 키옐의 국왕이 껄껄 웃었다.
“보고서에 쓰여 있던 모습 그대로구려. 이 작은 체구에서 그리도 강력한 불길을 뿜어낸다지?”
페퍼가 키옐군을 몇 번이나 도와주었다는 보고서를 읽었기 때문일까.
어쩐지 기꺼워 보이기까지 하는 음성.
“정령과 관련 있는 물건이라 그런지, 바로 알아보는구려.”
“정령……말입니까?”
러셀이 조심스럽게 묻자 카밀라 왕녀가 입을 열었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과거 키옐의 왕족은 정령에게 사랑을 받아온 일족이랍니다.”
시간이 흐르며 정령계와 물질계의 문이 흐려지고.
피에 섞인 재능이 옅어진 탓에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어쨌든.
“예. 선대 국왕 분들 중에선 상급 이상의 정령과도 계약한 분이 계시다고…….”
언제고 책에서 본 적 있는 내용을 떠올리며 읊조리자, 국왕과 카밀라 왕녀가 일순 처연한 표정을 흘렸다.
혈통에 깃들어 있던 재능만 제대로 전해졌어도, 키옐의 왕권은 지금보다 훨씬 강력했을 터였다.
아마도, 전날과 같이 수작질을 부리려던 귀족 또한 나오지 않았을 테지.
허나, 지금 와서 아쉬워 해봐야 사람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잊혀지고 빛바랜 과거의 영광이랍니다.”
그리 말한 카밀라가 쓰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달그락-.
목함 속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목함의 크기가 작았던 만큼 그 속에 들어 있는 물건 역시 꽤 앙증맞은 편이다.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만큼 작은 크기에, 아래로 오색실을 이리저리 꼬아 만든 장식이 길게 늘어져 있는 모습.
“이 노리개는 바로 그 시절부터 키옐의 왕족들에게 대대로 전해져오던 보물이랍니다.”
그녀가 손바닥을 펼치자 비로소 노리개의 모습이 러셀의 눈에 비쳤다.
백금을 이용해 만들어 낸 꽃과, 그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네 개의 보석.
적, 청, 백, 황.
각기 다른 색의 보석을 마주하는 순간, 러셀은 자신이 느꼈던 마력이 어디서 흘러든 것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령-.’
그것도 상당히 수준 높은 정령의 힘이 깃든 보석이었다.
홀린 듯 다가서는 그를 향해 카밀라가 손안의 노리개를 건넸다.
러셀이 정신을 차린 것은 저도 모르게 그것을 받아 든 후였다.
네 개 속성의 마력이 손바닥을 타고 번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러셀이 괜찮겠냐는 듯 물었다.
“왕실의 보물이라면 분명 중요한 물건일 텐데, 이렇게 대단한 물건을 제가 받아도 되겠습니까?”
국왕을 돌아보며 묻자, 당연하다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오. 경은 우리 키옐을 몇 번이나 위기에서 구해준 은일일뿐더러…….”
말꼬리를 흐린 그가 잠시 후 말을 다시 이어나갔다.
“정령사로서의 힘이 사라진 우리들은 그 노리개가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 어떻게 사용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오.”
관주위보(貫珠爲寶).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진귀한 보물 역시 제 자리를 찾아야 그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라.
“그럴 바에는 차라리 대륙 유일한 정령사께서 가지고 계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음…….”
두 로열패밀리 부녀의 합공에 침음을 흘리길 얼마간, 이어 러셀이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귀한 보물을 선뜻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허허. 비로소 보물이 주인 된 자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다행일 따름이라오.”
노리개에 관한 이야기는 거기까지. 그 후로 얼마 가량 이야기를 더 나눈 뒤, 러셀은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왔다.
복귀 명령이 떨어진 지금, 며칠 후면 다시 엔디미온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짐을 챙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짐을 챙기길 얼마간, 러셀이 조금 전 키옐의 왕실에서 받은 노리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진한 정령의 향기가 나다 보니, 처음 보는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갸륵, 갸륵-.
페퍼 역시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고 노리개의 곁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력을 불어넣어 봤지만, 노리개로부터 별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반대로 노리개 속 마력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일 또한 불가능했고.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물건의 본래 주인이던 키옐의 왕족들에게마저도 그 사용법이 실전된 물건이니.
한숨을 내쉰 러셀이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페퍼를 불렀다.
“페퍼.”
갸륵-.
그러자 페퍼가 단호하게 울며 고개를 흔들었다.
상당히 친숙하면서도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정령계를 박차고 튀어나오긴 했지만, 녀석 역시 정확하게 어떤 물건인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어휴…….”
러셀이 한숨을 내쉬자 그게 왜 자신의 탓이냐는 듯 페퍼가 마구 울어대며 항변을 해댔다.
갸륵, 갸륵, 갸르르륵!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이 둥지 삼던 러셀의 머리 위를 앞발로 마구 두드리기까지.
솜방망이 같은 발길질이 아파봐야 얼마나 아프겠느냐마는…….
삐유, 삐유.
그 광경이 재미있다는 듯, 팔찌 속에서 키득키득 울어대는 샤벳과 여전히 자신의 머리를 헤집고 있는 페퍼를 뒤로하며 러셀이 다시금 노리개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이 물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선, 정령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이들을 찾아가 봐야 할 듯했다.
.
.
화아악-!
거친 바람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빠른 속도로 눈가를 스쳐 지나가기 시작한다.
구름이 눈보다 낮은 곳에서 강물처럼 흘러가고, 태양이 한없이 가까이 느껴지는 가운데 러셀이 페퍼의 목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갸르르륵-.
그 손길이 좋은지, 고속비행을 하던 페퍼가 울음소리를 흘렸다.
어차피 하늘 높은 곳을 고공비행하고 있었으니,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도 없을 테지.
지금 러셀은 키옐의 영토를 벗어나 엔디미온에 진입한 후, 페퍼를 타고 이동하는 와중이었다.
인근의 마탑을 이용하면 한 번에 왕도까지 이동할 수 있었지만, 굳이 페퍼를 타고 이동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왕도에 가기 전에 들러야만 하는 곳이 있으니까.’
곧이어 구름의 강 아래로 녹색의 빛깔이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냈다.
겹겹이 쌓인 구름 너머로도 보일 정도로 선명하고 짙은 녹음. 아베트 산림이라.
러셀이 향하는 곳은, 그런 아베트 산림 중에서도 북쪽.
“천천히 내려갈까?”
러셀의 말에 한 차례 울음을 흘린 페퍼가 천천히 높이를 낮췄다.
물론 고속비행의 속도는 유지하면서였다.
갸륵-!
.
.
그렇게 고도를 낮추고 얼마 후, 별안간 산림 안쪽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퍼져나갔다.
러셀의 비행 고도는 여전히 인간의 눈이 닿지 않을 만큼 높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족의 눈이 닿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태어날 때부터 정령의 축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인간보다 몇 배는 월등한 시력을 가진 종족.
엘프들이 페퍼의 기척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들어 올린 것이었다.
그 소란의 가운데 이오와 아레인이 있는 것을 확인하며 러셀이 페퍼의 등에서 뛰어 내렸다.
갸륵-!
소형화한 페퍼가 쏜살처럼 러셀의 뒤를 따라붙으며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내리꽂히고, 화아악!
강렬한 중력이 몸을 잡아끄는 것을 느끼는 순간, 러셀이 손바닥을 아래로 뻗었다.
‘리버스 그래비티’
중력 역전 마법을 사용, 거짓말처럼 낙하하던 속도에 제동을 걸며 아래로 내려섰다.
척-.
고속 낙하와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낙하라.
갑작스럽게 나타난 강대한 정령의 기척과 숲에 난입한 인간으로 인해 요정족들 사이로 놀람과 동시에 경계심이 번져나가려는 찰나!
“아!”
“러셀 님!”
러셀을 알아본 아레인과 이오가 동시에 소리쳤다.
“은인? 은인이라고?”
“그러고 보니 저 인간은…….”
“우리를 구해주었던 바로 그 인간이잖아!”
그제야 러셀을 알아본 엘프와 페더족, 페어리 일족이 놀람을 가라앉혔다.
엔디미온의 국토를 빌려 생활하고 있다지만, 아직까지 인간들과의 접촉은 그들에게 있어 상당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탓일 테지.
그 사실을 이해하며 러셀이 빙긋 웃었고, 이오가 러셀을 향해 다가왔다.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정돈하면서였다. 조금 붉게 상기 된 얼굴에 머뭇거리는 걸음.
전혀 예정되어 있지 않던 러셀의 방문에 이오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이렇게 가, 갑작스럽게…….”
평소에는 침착한 성정을 지닌 딸이건만, 왜 은인의 앞에만 서면 이렇게 바보가 되는 것인지.
말을 더듬는 딸을 대신해 러셀을 반긴 것은 엘프족의 므뇌르인 아레인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실 줄은 몰랐네요. 은인.”
지난 마물과의 전쟁에서, 사실상 두 명의 므뇌르를 잃은 엘프에게 현재로서 남은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므뇌르라고 할 수 있는 이.
그녀의 말에 러셀이 멋쩍게 웃었다.
“혹시 폐가 되었습니까?”
“폐라뇨.”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아레인이 고개를 젓는다.
“다만, 오시는 걸 미리 알았다면 좋은 과실주라도 한 병 준비해 두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서랍니다.”
“과실주라…….”
엘프족이 그들만의 재료와 비법으로 직접 담는 과실주는 천금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던가?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오늘은 다른 용무로 찾아왔습니다.”
“다른 용무요?”
고개를 갸웃하는 두 모녀를 뒤로하며 러셀이 아공간을 열었다.
그 속에 넣어 두었던 노리개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건-!”
노리개를 발견한 아레인의 눈가를 따라 일순 이채가 스치고.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랍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레인이 그리운 눈빛으로 말했다.
“이것은 네 정령왕의 힘이 깃들어 있는 노리개. 그리고…….”
“……?”
“정령계의 출입을 허락하는……일종의 통행증이랍니다.”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