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232
232화
EPISODE.116
물질계와 정령계.
세계와 세계 간의 틈을 통과하는 일은 빈말로도 결코 좋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온몸의 감각기관이 이지러지는 듯한 어지러움. 직후 찾아온 것은 초인의 경지에 오른 이로서도 참아내기 어려운 수준의 메스꺼움이었으므로.
‘읍…….’
강렬하게 치밀어 오르는 역기에 러셀이 입을 꽉 다물었다.
‘……페퍼는 물질계로 나올 때마다 이런 문을 통과한다는 건가?’
그런 것 치고는 지나치게 쌩쌩해 보이던데.
아무래도 인간과 정령 간에 차이가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문을 여는 방법이나 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는 모양.
그게 아니고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을 울렁거림에 러셀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다음 순간, 화악-.
그의 눈에 비친 시계가 일변했다.
공간이 통째로 뒤틀리는 것 같던 기괴함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어 보석처럼 찬란한 빛살이 눈앞을 뒤덮는다.
총천연색이 어우러지며 자아내는 아름다운 광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셀은 그 색광을 마음 놓고 바라보지 못했다.
한껏 밀려온 어지럼증과 역기가 턱 끝까지 치밀어 올라 있었기에.
“솔직히…….”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러셀이 중얼거렸다.
“……죽겠군요.”
독한 술을 오크통 단위로 비워낸 뒤의 숙취 같은 어지러움이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주물러댄다.
아레인이 그 말을 받았다.
“동감이군요. 은인…….”
“우읍!”
셋 중 가장 상태가 심각한 것은 이오였다
같은 초인(超人)급의 강자라 해도 그 안에서 다시 실력에 따라 서열이 나누어지는 법.
지금 자리에 있는 셋들 중 이오는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이였으니까. 상태가 가장 나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만 러셀의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라, 손으로 입을 가리고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을 뿐.
그때였다.
어느새 어지럼증을 상당수 흘려보낸 아레인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것은.
“어머……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레인의 팔꿈치가 이오의 허리를 툭하고 친다.
아직 상당한 어지럼증이 남아 있는 상황. 그 간단한 밀침만으로도 이오의 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으읏-!”
저도 모르게 침음이 흘러나오는 순간, 척.
누군가 쓰러지던 이오의 몸을 부축했다. 정확하게는 이오가 쓰러지는 방향에 그가 서 있었다고 하는 게 옳았을 테지만.
“괜찮으십니까. 이오 님.”
당연하게도 ‘그 누군가’의 정체는 바로 러셀이었다.
“러, 러셀 님.”
저도 모르게 러셀의 품에 안긴 상황, 이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른다.
머릿속을 휘저어 대던 어지럼증이 일순간에 날아가 버릴 정도로 강렬한 충격.
“죄, 죄송해요!”
놀란 이오가 러셀의 품에서 섬전처럼 튀어나왔다. 붉게 물든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거듭 죄송하다-라는 말을 연발하는 한편 자신을 밀친 어미를 슬쩍 흘겨보았다.
그 시선에 아레인은 잘 모르겠다는 듯 딴청을 피워대며 시선을 돌렸을 뿐.
‘어쩔 수 없잖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런 모녀의 시선을 러셀이 은근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꾸하고.
“이오 님이 무탈하시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이어 주변을 확인했다.
“이곳이……정령계.”
정령들이 사는 세계라고 해서 단순히 자연 친화적인 광경만을 생각했던 그였다.
하지만 실제로 목도하게 된 정령계의 모습은 상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넓게 펼쳐진 초원과 울창하게 자라난 숲이 있는 건 상상 속 풍경과 동일했지만…….
‘보석 같군.’
세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구성 요소들이 색색들이 보석 마냥, 반투명한 광채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 빛깔이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나뭇잎 뒤로 그 너머의 나뭇잎들이 비춰 보일 정도.
불어오는 바람에도 희미하게나마 색이 섞여 있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동화책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
──.
그때였다. 시야를 가득 채운 풍경들 사이에서 움찔거리는 움직임이 감지된 것은.
경계와 호기심.
두 개의 시선이 섞여들며 자신들을 주시하는 것이 느껴진다.
크기도 형태도, 느껴지는 기운 역시 제각각. 정령계의 원주민, 바로 정령들이었다.
아마도 저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정령계를 방문한 물질계의 존재를 처음 보았기 때문일 테고.
러셀이 주목한 것은 그들 사이에서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는 아주 작고 미약한 존재감의 주인이었다.
슬라임과 같은 모습에 손가락 마디 하나만 한 크기로 정령계의 곳곳을 꾸물꾸물 기어다니는 존재들.
러셀이 녀석들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간단했다.
분명 정령의 한 갈래인 듯한데 특이하게도 그들에게선 다른 정령과 같은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
마치-.
‘아무런 의지가 없는 것처럼…….’
의아해하는 러셀의 곁에서 이오가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태초의 정령인 것 같아요. 러셀 님.”
“태초의 정령 말입니까?”
“예.”
이오의 설명에 의하면 태초의 정령은 의미 그대로 모든 정령의 근원이라고 했다.
정령계에서 태어나, 정령계의 기운을 받고 자라나며 훗날 다른 정령으로 성장하는…….
‘진화의 첫 시작점이란 말이지.’
신기하면서도 여러모로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광경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표정에는 하나같이 같은 의문이 어리어 있었다.
“그런데 정령계는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겨 저희들을 불러들인 걸까요.”
“그러게 말입…….”
그때였다.
삐유 삐유-!
러셀과 함께 넘어온 샤벳이 빽빽거리고,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갸르르륵-!
머리 위로 작은 그림자 하나가 드리운다.
고개를 들자 페퍼가 허공을 크게 선회하며 러셀을 내려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들과는 다른, 정령들만의 문을 이용해 정령계로 복귀한 모양.
“페퍼!”
러셀이 소리치자, 갸르르르륵-!
한차례 크게 포효를 터뜨린 녀석이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섰다.
소형화를 한 형태가 아닌, 명백한 정령화룡(精靈火龍)의 모습.
“러셀 님. 이 아이는…….”
페퍼와 구면이던 이오가 녀석을 알아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페퍼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종류의 힘을 느낀 것 같았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러셀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오의 생각을 긍정하고, 그동안 무사히 착륙을 마친 페퍼가 제 등을 아래로 낮췄다.
마치 올라타라는 듯 등과 러셀을 번갈아 보며 울어댔다.
갸륵, 갸르르르륵-.
.
.
화룡의 형태를 한 페퍼의 덩치는 날개를 제외하고도 작은 언덕에 비견될 정도였던 바.
어렵지 않게 세 명을 등에 태운 페퍼가 순식간에 정령계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색색들이 바람이 빠른 속도로 세 사람을 지나쳐가고, 그런 가운데 이오가 페퍼의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 작던 아이가 어느새 여기까지 성장했군요.”
이오의 손길이 꽤나 마음에 드는 것인지 페퍼의 이빨 사이로 그르렁거리는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러셀이 피식 웃었다. 웃으며 정면을 주시했다.
정령계의 하늘을 빠른 속도로 가로지르는 초고속 비행. 그렇게 얼마나 하늘을 가로질렀을까.
“은인.”
주변을 둘러보던 아레인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러셀을 불렀다.
경계의 기색이 가득 담겨 있는 음성.
그 음성에 러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예. 봤습니다.”
굳이 아레인이 말해주지 않더라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그것’의 존재감은 명확했기에.
쿠구구구구구-.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 위로 옅게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시선을 멀리 두면 둘수록 점점 짙어져 가는 어둠과 먹구름, 그 먹구름의 한복판에서 자색 천둥이 빛을 발했다.
번쩍-!
보랏빛 벼락이라니, 한눈에 봐도 불길해 보이는 현상.
문제는 그런 벼락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빠직, 빠지직-.
────────고오오오오.
먹구름의 중심부가 커다랗게 회전하는 가운데 사방에서 자색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쉬지 않고 빛이 번쩍이고, 그에 따라 회전이 일어난 구름이 마치 자색처럼 불길한 빛을 토해낸다.
자색의 번개 폭풍.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그 광경에 페퍼의 등에 올라탄 세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섬광이 번득이는 순간, 먹구름 안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무엇인가가……거대한 촉수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냈던 것.
“저게 대체…….”
그 거대하면서도 불가해(不可解)한 모습에 이오가 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불길한 섬광과 형체.
가까이 다가설수록 온몸을 타고 올라오는 절망과 공포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막대한 사념파에 이오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게다가 자기 폭풍의 아래에 짓눌린 정령계의 일부가 통째로 붕괴되고 있기까지!
콰과과과과과과-!
박살 난 정령계의 일부가 폭풍에 딸려 올라가며 촉수 안쪽의 무엇인가에 집어 삼켜진다.
“먹고……있는 건가요? 정령계를?”
아레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저게 정령계에 생긴 이변의 정체인 것 같습니다.”
그 말을 긍정하듯, 세 사람을 태우고 비행하던 페퍼가 적개심을 담아 낮게 으르렁거린다.
갸르르르르륵…….
“저것도 정령의 일종일까요?”
어쩌면 돌연변이로 인해 태어난 정령일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생각에 내뱉은 이오의 중얼거림.
그 중얼거림에 답이 들려온 것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였다.
“그렇지 않다.”
불어오는 바람에 목소리가 섞여든다 싶더니 이내 바람이 빼빼한 남성의 형상으로 화한다.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존재감. 그것이 시작이었다.
꾸물거리며 일어난 대지가 여인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그 사이의 균열에서 솟아오른 마그마의 불길이 거대한 덩치를 가진 사내의 형태로 뒤바뀌고, 대기 중의 수분이 한데 뭉쳐 들며 긴 머리를 가진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
네 존재의 등장에 이오가 놀라라 하며 소리쳤다.
“제피로스, 아그니, 암피트리테, 데메텔!”
정령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결코 모를 수가 없는 이름들이라.
“정령왕이란 말입니까?!”
대경하는 러셀을 향해 아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정확하게는 정령왕들의 아바타랍니다.”
사대 원소의 정령왕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주요 원소의 주인이나 마찬가지.
실수로라도 그들 중 하나가 현현하는 날이면 사대 원소의 조화가 깨어져 세상의 균형이 어긋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정령왕들은 각기 자신들의 화신(Avatar)를 만들어 세계의 균형을 조율하고 있었던 것이고.
아레인의 설명에 대지의 화신, 데메텔이 자애로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구나. 엘프족의 므뇌르여.”
예로부터 만물의 어머니로 칭송받아온 대지, 그런 대지의 화신다운 미소였다.
“그리고…….”
이어 넷, 모든 화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러셀을 향한다.
“모든 용들의 주인.”
“용제(龍帝).”
한마디씩을 내뱉는 그들을 대표하여 입을 여는 화신이 있었다.
“이 아이가 화룡이 되었을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모든 용들의 주인을 이런 식으로 접하게 될 줄이야.”
타오르는 불길 사이로 반짝이는 샛노란 눈동자. 불의 화신, 아그니가 러셀과 페퍼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