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255
255화
EPISODE.128
장년을 넘어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에서 또다시 마주한 지혜열(智慧熱).
두 눈에 반짝임이 담겼던 것도 잠시, 쑥스런 얼굴과 함께 허탈하게 중얼거리던 휴버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물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참이지만 말일세. 허헛─.”
그 말대로.
휴버트가 얻은 것은 일자(一者)로써 완성된 깨달음이 아니었다.
그중 일면, 단초였을 뿐.
앞으로의 과정을 길에 비교한다면 이제 막 시작점에 선 것뿐이고, 나아가야 할 이정표 하나를 가지게 된 것뿐이라.
제대로 된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거리가 남아 있고,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는지.
하지만.
저 이정표 하나조차 얻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마법사가 태반이었다.
그들과 비교한다면 휴버트는 대지를 딛고 일어서, 찬란하게 빛나는 별들의 세계로 올라설 준비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
‘버밀리온 사형도 뭔가를 붙잡으신 것 같던데.’
지난날, 출정식을 하던 당시 먼발치에서 봤던 첫째 사형의 모습을 떠올리며 러셀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저벅, 저벅-.
의무대를 빠져나와, 그런 러셀의 걸음이 향하는 곳은 자신의 막사가 아닌 군영의 바깥쪽이었다.
혹시 모를 적들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나무로 목책을 두르고, 일정 거리마다 병사들이 늘어서 번을 서고 있는 외곽.
“대, 대공 전하?”
갑작스러운 러셀의 출현에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 하나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이고, 뒤이어 무릎을 꿇으려는 찰나.
척-.
“괜찮네.”
어느새 다가선 러셀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지금은 근무 중이 아니던가. 계속 일 보게.”
그때까지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하고 있던 병사가 목책을 통과하는 러셀을 향해 물었다.
“대공 전하. 나가시는 거라면 호위를 대동하는 것이 어떠실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곳은 제국의 땅이다. 게다가 멀지 않은 곳에 제국의 병력 역시 있었고.
엔디미온의 병사로선 당연히 꺼낼만한 말이라. 그런 병사의 말에 러셀이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오는 것뿐이니, 별문제는 없을 걸세.”
“하오나…….”
뭔가 한마디를 덧붙이려던 병사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걱정스런 마음에 말을 꺼내긴 했으나, 상대는 전쟁영웅을 넘어 전신(戰神)으로까지 취급받고 있는 인물이지 않던가.
그런 러셀을 위협할 수 있는 인원은 제국 내에서도 극소수. 감히 자신이 걱정할 만한 이가 아니던 것이다.
“그 마음만 고맙게 받지.”
병사가 입을 다물자 피식 웃으며 대꾸한 러셀이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아군의 군영에서 가능한 한 멀어지며 하늘을 곁눈질했다.
‘엑셀 헤이스트.’
마법의 발동과 함께 발걸음이 질풍이라도 된 듯 가벼워진다.
한걸음에 수십, 수백 미터를 박차고 날아가는 빠르기.
쐐애애액-!
섬전이라도 된 듯 내달린 러셀의 신형이 멈춰 선 곳은 군영에서 꽤 떨어진 거리에 있는 작은 바위산의 위였다.
칼로 베어내기라도 한 듯 정상 부분이 평평한 바위산.
가속 마법을 사용하고도 족히 삼십 분가량을 내달렸으니, 평범한 이들의 발걸음으로 따라잡기 위해선 몇 시간은 걸릴 터.
그곳에 자리를 잡은 러셀이 하늘 높게 켜켜이 쌓인 구름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오는 게 어때.”
사뭇 비장하기까지 한 음성.
여덟 개의 써클은 이미 예열을 시작했고 러셀의 기세는 임전 태세에 들어선 후라.
휘이이잉-.
그에 대한 대답이라도 된 듯 모래 섞인 삭막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오지 않겠다면…….”
러셀의 손끝이 하늘을 겨눴다.
일단 최대출력으로 마법탄을 때려 박아 시간을 벌고 시야를 가린다.
‘그 후에 결전기를 준비한다.’
지금 느낀 감각이 착각이 아니라면 상대는 결전기를 사용하고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였다.
‘여력을 남길 여유 따윈 없어.’
그 순간.
【……감이 좋은 편이군.】
하늘을 뒤덮고 있던 구름이 통째로 일그러지며 그 사이로 검은 벼락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정확하게 러셀의 앞을 노리듯 떨어져 내린 벼락이 귀청을 찢으며 굉음을 만들어낸다.
소리보다 먼저 충격파가 터져 나가며 몇 겹이나 되는 파문을 그렸다.
────────────!!!
높게 솟았던 먼지가 모두 가라앉았을 때, 그 속에서 모습을 보인 것은 러셀보다 머리통 하나가 가량 더 큰 키를 지닌 장신의 사내였다.
러셀을 꼭 닮은 흑발에, 용인화를 사용한 것만 같은 검은 뿔.
다만 차이가 있다면 겉으로 드러난 사내의 피부가 놀라울 정도로 창백한 회백색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그 피부색만큼이나 눈동자 역시 무심하기만 했고.
상대는 적인지 아군인지도 명확하게 할 수 없는 모호한 기질을 가진 사내. 조금의 틈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러셀이 입을 열었다.
“역시 당신이었군.”
처음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은 휴버트가 있던 의무대를 빠져나오던 순간이었다.
전날, 무야호와 함께 움직였을 당시 느꼈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시선.
“타락용(墮落龍). 질리언 리제스티.”
그에게서 직접 들었던 이름을 되뇌며 러셀이 차갑게 물었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지?”
직후 이어진 질리언의 행동은 러셀로서 조금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용제의 신성을 느끼고 찾아왔거늘, 아직까진 부족한가…….”
대답 대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질리언이 돌연 한쪽 무릎을 꿇으며 러셀의 앞에 고개를 숙인 것.
“길을 벗어났으나 본질은 잊지 않은 자가 모든 용들의 주인께 인사 올립니다.”
지금까지 오만하기만 하던 태도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
어안이 벙벙한 러셀을 무시하며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운 그가 자신의 무릎을 툭툭 털었다.
“내게 이 이상의 공대를 바라지는 마라.”
“……?”
“내가 무릎을 꿇은 것은 어디까지나 용제의 신성(神性)에게일 뿐. 네 녀석은 아직 반 푼짜리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말을 맺은 그가 자신의 목과 심장 어림을 가볍게 매만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확실히 한결 낫기는 하군.”
“정확하게 설명해라. 질리언 리제스티.”
낮게 흘러나오는 경고성.
어느새 용의 힘을 발현한 러셀이 확장된 동공 안쪽으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를 드러내 보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드래곤 피어.
종의 정점에 선 포식자가 쏘아내는 기운이다. 다른 이였다면 두 다리로 서 있는 것은 물론, 의식을 잃는 이들 또한 있었을 테지.
하지만 타락했다곤 하나 질리언 리제스티 또한 용이었다.
아직 완전하지도 않은 용제의 피어에 그가 겁을 먹을 이유는 조금도 없었던바.
여전히 무심한 눈으로 러셀을 바라보던 질리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타락용……흔히 마룡이라 불리는 존재는 어떻게 탄생하는 것인지. 그 방법을 알고 있나?”
음성과 함께 질리언의 기억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주 오래된, 몇천 년도 더 된 시절의 기억이 그의 입을 따라 흘러나왔다.
.
.
모든 용들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질리언, 그는 알에서 깨기 전부터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아직 태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감싸고 있던 어미의 음성을 듣고, 체온을 느낄 수 있었고.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일 년, 이 년, 삼 년……그리고 수백 년.
의식이 생긴 이후 어미가 자신의 곁을 떠난 것은 아주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그마저도 상당히 짧은 시간이었고.
하나 영원할 것만 같았던 어미와의 시간에도 결국에는 끝이 찾아왔으니…….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렴.】
……다른 용의 방문을 받은 어느 날,
질리언의 어미는 부드러운 손길로 여전히 단단하기만 한 알 표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알을 깨고 나오기 전에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알에서 깨어난 이후에 알아보니 아주 큰 전쟁이 있었다던가.
상대는 흉포하기 그지없는 거인족들.
그날부터였다.
알 속의 질리언이 돌아오지 않는 어미를 기다리게 되었던 것은.
하루, 이틀, 사흘, 나흘부터 시작하여 다시 수백 년.
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부화의 시기가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미는 다시 둥지로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질리언 역시 알을 깨고 나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어미의 존재로 인해 마음속에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탓이었다.
그리고 다시 수백 년의 시간이 흘러, 점점 메말라 죽어가던 질리언을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찾았다……!”
해골마냥 깡마른 손아귀가 알껍데기를 매만지기 무섭게 밀려든 무채색의 마력이 그의 마음속 틈새를 파고들었다.
화아악!
.
.
“그 후 나는 수천 년의 세월을 타락용으로 살아왔다.”
질리언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설마 타락용이 그런 식으로 태어나는 것이었을 줄은…….
‘아무리 어리고 약했다고 해도, 용은 용.’
그런 용을 타락시킬 정도라면 질리언을 찾아왔던 이 역시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수천 년 전이라는 것을 감안해 보면, 아마도 초월자.
‘그것도 사교의 방식으로써 초월에 접어든 이겠지.’
상념을 정리하며 러셀이 질리언에게 물었다.
“그래서. 질리언 리제스티. 네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뭐지?”
마룡의 탄생 비화가 놀랍기는 했으나,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기에.
“용제로서의 신성이 발아하는 것을 느껴서였다.”
“…….”
“본래라면 그 힘을 빌려 이 저주받은 운명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만…… 아직까지 반푼인 네게 그만한 힘은 없을 터.”
화악-!
그의 등 뒤쪽에서 검은빛의 날개가 활짝 펼쳐진다.
조금의 빛조차 반사하지 않고 모조리 흡수하는, 칠흑 같은 피막의 날개.
타락용이라는 이름에 참 어울리는 모습의 날개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반푼이라곤 하나 용제는 용제라는 점이겠군.”
이어 질리언의 몸이 조금씩 허공으로 떠올랐다.
“당분간 구름을 이용해 네 곁에 머물도록 하지.”
순식간에 몇 미터가량은 떠오른 채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면 내 몸을 옥죄고 있는 저주 역시 조금씩 옅어져 갈 테니 말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신이 할 말은 모두 끝났다는 듯 질리언의 신형이 하늘 높은 곳을 향해 고속으로 치솟았다.
쐐애애액!
처음 나타났을 때와는 반대로, 검은 벼락이 지상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짙게 깔린 구름 사이로 다시 한번 구멍이 뚫리고……!
【한 가지 경고해두겠다만─.】
……바람결에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음성이 흘러들었다.
【─제국을, 그 심부에 웅크리고 있는 자들을 조심해라.】
제국에 대한 갑작스러운 언질.
“뭣?!”
화들짝 놀란 러셀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질리언이 남기고 간 경고를 대신하듯, 하늘 저편에서 몰려온 먹구름만이 러셀의 머리 위를 뒤덮고 있을 따름이었다.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