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281
281화
EPISODE.141
루비처럼 반짝이는 진홍색 보석안(寶石眼)이 일대를 훑고.
휘오오오오-.
불어온 바람에 로브자락과 함께 흑발이 거칠게 휘날렸다.
그가 쓰러진 후로 몇 달, 그 시간 동안 병석에만 누워서 보냈기 때문일까.
전에 비해 머리칼이 많이 자라난 듯한 모습.
바뀐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눈빛이나 표정이 전보다 더 성숙해 있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달라진 마력량이었다.
8써클 마스터.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그들이 몸에 품고 있는 마력량이 적을 리가 없다.
대해(大海)를 연상케 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마력 역시 그들로 하여금 대(大)마법사라고 불리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으므로.
‘하지만 이건…….’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초인(超人)의 경지에 올라선 강자들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러셀의 주변을 따라 휘몰아치고 있는 마력의 존재감을.
사교도 따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따스한 마력이 러셀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와류를 만들어낸다.
사방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압력은 바로 그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었다.
크기도 제각각, 밝기도 제각각인 마력의 덩어리들이 마치 별이나 행성마냥 찬란하게 빛나고.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멜리아 머윈이 입을 벙긋거렸다.
“우주…….”
그것은 대해(大海)가 아닌 작게 펼쳐진 소우주(小宇宙) 그 자체였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후, 이어 양팔로 제 어깨를 감쌌다.
마주하는 것만으로 한기와 함께 떨림이 찾아드는 마력이다.
폭급하지도, 차갑지도 않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위압감을 선사하는 마력이라니.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
오감을 통해 흘러드는 모든 감각이 저 청년이 러셀임을 알려주었지만, 그녀의 이성은 그 사실을 쉬이 긍정할 수 없었다.
눈앞의 청년은 지금껏 자신이 알고 지냈던 러셀과는 완전히 격이 다른 존재라고.
그간 쌓아온 경험과 마법사로서 쌓아 올린 여섯 번째 감각, 육감(六感)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 공간이 이지러질 때까지만 해도 러셀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 온몸의 감각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 느껴진다.
알에서 태어난 사교도, 블라드 드라쿨레아를 처음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
“초월자.”
그 감각에 헤밍웨이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 녀석, 결국은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해 버린 거군.”
“흘흘흘.”
이내 소요를 가라앉힌 다리아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말했지. 제자 하나는 잘 물었다고.”
“흥.”
한결 걱정을 덜어낸 탓인지.
“막내 제자가 괜찮아지기 무섭게 그런 모습이라니.”
전과 같아진 다리아의 모습에 헤밍웨이가 괜히 퉁명스럽게 콧방귀를 끼며 말을 잇는다.
“뭐……그래도 다행이야. 덕분에 할멈도 기력을 찾았지 않나.”
자신을 걱정하는 헤밍웨이의 마음이 느껴졌던 것인지 다리아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어 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사제!”
“으하하하하하! 역시 막내 사제로군! 이번에도 이겨 낼 줄 알았어!”
러셀의 두 사형인 휴버트와 버밀리온의 외침.
츠츠츠츳-.
러셀이 통과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지러졌던 공간이 다시 제자리를 찾고,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 늦었습니다.”
초월자(超越者)라는, 신화시대 이후 누구도 이룩한 적이 없던 경지에 올라섰음에도 불구하고 그 머쓱한 표정만큼은 이전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끌끌끌.”
그 모습에 다리아가 전과 같은 소리로 작게 웃으려던 찰나였다.
【살아있었더냐. 용제.】
강렬한 으르렁거림.
살갗이 아릿할 만큼 강렬한 흑마력이 깃든 음성이었다.
그 음성에 토성의 성벽위로 올라선 러셀이 마물의 군세 한복판을 노려보았다.
────꿀럭, 꿀럭.
어둠이 점액질마냥 꿈틀거리며 그 속에서 검은색 넝마를 뒤집어쓴 사내를 토해낸다.
자신과 똑같은 흑발.
다른 점이 있다는 눈동자의 색뿐. 신계를 떠나오기 전 이계구원자에게 들었던 당부가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아마 그 못난 놈은 내 육신을 껍데기 삼아 부활하려고 할 거야.
-한때 내 제자였다고는 하나 스스로 선택해서 그릇된 길을 간 놈이다. 내 육신이라고, 내 제자라고 괜한 마음 쓰지 말고 완전히 박살내 버려.
‘저게 바로 선조님의 육신.’
당부의 내용대로 할 거긴 하다만, 선조의 육신이 저런 식으로 사용되는 꼴을 보고 있노라니 괜히 기분이 나빴다.
그렇기에 러셀이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고, 그 사이 허공으로 몇 미터가량을 떠오른 놈이 러셀과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내게 수모를 안겨준 놈을 직접 죽여 버릴 수 있다니. 차라리 잘 되었다. 이번 기회에 살점 하나,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도려…….】
입을 열려 했다.
“쫑알쫑알. 신화시대부터 수천 년이 넘게 살아온 노물치곤 혀가 너무 길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그보다 먼저, 러셀이 놈의 말을 끊었다.
【……?!】
“짧게 요약하면 다시 한 판 붙자는 거잖아. 일단 기다려. 나 아직 할 일이 안 끝났으니까.”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손을 뻗었다. 마력과 함께 러셀의 손등 위로 어떤 문양 하나가 나타났다.
각기 다른 색의 원들 네 개가 겹쳐져 있는 문양.
화아악-!
문양을 따라 빛이 쏟아져 나옴과 동시에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네 요소들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불과 물.
땅과 바람이 모여들며 제각기 형상을 이루고.
콰아아아아아-!
물의 정령왕 암피트리테.
불의 정령왕 아그니.
바람의 정령왕 제피로스.
땅의 정령왕 데메텔.
물질계에 소환된 정령왕의 화신들이 찬찬히 눈을 뜨는 가운데 제피로스가 입을 열었다.
“정령계의 은인이여. 그대와의 약속에 따라 그대를 도우러 왔다.”
주변의 바람이 웅웅거리며 매섭게 울어댄다.
“그래서, 원하는 소원은 뭐야. 어떤 도움을 원하는 거지. 용제?”
새침한 목소리는 암피트리테.
전날 정령계를 도와주고 받은 대가인 정령왕들의 도움. 러셀은 이번 전투에서 그 대가를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제가 원하는 건…….”
잠시 말꼬리를 흐린 러셀이 단호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제 적들의 말살입니다.”
데메텔이 자애로운 목소리로 답변한다.
“당신은 정령계의 은인. 그런 당신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어요.”
세계를 구성하는 사대 원소.
그 화신(化神)들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전쟁에 참여하는 순간이었다.
.
.
아군 진영에 합류한 정령왕들.
그 중 암피트리테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 향한 곳은 바로 헤밍웨이의 곁이었다.
“이봐. 늙은 인간. 너 나랑 임시 계약하지 않을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은 정령왕의 화신들. 개개인의 힘 역시 뛰어나지만, 세계의 법칙으로 묶인 이상 물질계에서 한계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선 계약자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나랑 말이오?”
그런 의미에서 헤밍웨이는 임시 계약 대상자로서는 최적이었던 바.
“그래. 뭘 들은 거람.”
암피트리테가 새침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 사이 다리아 역시 자신을 찾아온 아그니와 임시 계약을 맺고 있었고, 다른 두 정령왕들 역시 저마다의 계약 상대를 찾아낸 와중이었다.
바람의 화신인 제피로스는 아멜리아 머윈에게로, 대지의 화신인 데메텔은 이오에게로.
“허허. 살다 보니 정령……그것도 정령왕의 화신과 계약을 하는 날이 다 올 줄이야.”
비록 임시 계약이라곤 하나 마법사로서 특별한 경험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헤밍웨이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것으로 계약 성립.
“좋아. 그럼 계약하자고. 물론 임시지만.”
암피트리테의 말과 함께 전신을 따라 충만한 수분감이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물이 지니고 있는 치유의 힘이 빠른 속도로 몸을 회복시키며 피로를 씻어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바로 옆에서 아그니와 계약한 다리아가 끌끌거리며 으스댔다.
“이 영감아. 다 내가 제자를 잘 둔 덕이 아니겠는가.”
막내 제자가 멀쩡하게 돌아온 것으로도 모자라 전보다 더욱 강해지기까지 한 덕인지.
한결 나아진 듯한 그녀의 모습에 안도하는 마음을 숨기며 헤밍웨이가 호응했다.
“흥. 할멈의 막내 제자가 너무 뛰어났던 것뿐이지. 내 제자도 달리 어디 부족한 점은 없어.”
이어 덧붙였다.
“그래도 덕분에 한시름 덜었군…….”
무슨 수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각국에서 보내온 2차 토벌군이 빠르게 합류함에 따라 숫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정령왕들 그리고 러셀과 함께 쓰러져 있던 무야호와 이오가 참전하기까지.
여전히 숫자에서는 마물에 밀리지만, 전력 교환비라는 개념에서 봤을 때 질에서는 오히려 몇 배나 앞서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말꼬리를 흐리던 헤밍웨이가 돌연 눈을 크게 치켜떴다.
“저, 저, 저……?!”
말문이 턱하고 막힌 듯 손가락을 쭉 뻗으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평소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만큼이나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쭉 뻗어진 그의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
그 끝에서 성벽을 내려온 러셀이 마물의 군세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
.
“정령왕이라…….”
저벅, 저벅-.
러셀이 앞으로 걸어 나오자 블라드 드라쿨레아 역시 마물 무리를 해치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눈동자 색을 제외하면 거의 꼭 닮은 외모다.
“제법 재미있는 수를 숨겨두고 있었구나.”
그 모습이 꼭 두 명의 쌍둥이가 아릿한 적의를 흘려대며 서로를 향해 다가서는 모습처럼 보일 정도.
“하지만 알고 있겠지? 이 싸움의 향방을 결정짓는 것은 병(兵)의 싸움이 아니라, 장(將)의 싸움이라는 걸.”
그 말대로.
정령왕을 소환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부족한 숫자를 보충하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였을 뿐.
결국에는 자신과 놈이 벌일 싸움의 결과가 전쟁을 매듭지을 것이라는 사실은 러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초월자의 경지에 오른 걸 축하한다만……그래봐야 고작 며칠.”
블라드는 러셀이 자신과 같은 초월자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알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진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힘을 다룸에 있어 아직은 미숙하고 어색할 터.”
같은 초월자라 해도 자신은 훨씬 오래전에 이와 같은 경지에 올라섰었으니까.
마법을 쏟아내는 방식에 있어서도, 마력을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 서다니. 섣부른 용기는 만용이 될 수 있음을 알지만…… 그 기상만큼은 칭찬하─.”
“블라드 드라쿨레아.”
“?!”
자신의 말을 끊어먹는 러셀의 음성에 블라드의 얼굴 위로 불쾌함과 함께 의문이 떠올랐다.
자신의 이름을 저놈에게 소개한 적이 있던가?
그에 대한 의문, 그 말끝의 의문부호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러셀의 다음 말이 뒤를 이었다.
“너는 말이 너무 많아.”
전에 한 번 싸워본 적이 있다지만, 각자가 초월자의 경지에 올라선 이후로는 첫 대면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필멸자의 태를 벗고 초월자에 들어선 이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종(種)이라고 할 수 있었던바.
그렇게 따진다면 전의 싸움은 잊고 이번 싸움을 초전(初戰)이라 생각하고 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도무지 질 것 같지가 않았다.
자신의 가슴 속에 깃들어 있는 아홉 개의 써클과 신성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