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53
53화
EPISODE.27
러셀의 이야기가 시작되기에 앞서, 세 명의 마법사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집중할 준비를 마쳤다.
늘 그랬듯, 다리아는 어디선가 가져온 달콤한 주전부리들을 꺼내 늘어놓았다.
“낄낄. 나이를 먹으니 자꾸 달달한 것이 끌리는 건 어쩔 수가 없구나.”
“음. 이야기를 들으며 마실 독한 브랜디가 있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지.”
호탕한 음성으로 중얼거린 버밀리온이 두터운 팔뚝으로 팔짱을 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리를 쫙 벌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쿵, 끼익-.
육중한 근육의 무게 때문이었을까.
나무로 만든 의자가 순간 비명을 지른 것 같았지만, 착각이겠지.
개중 가장 무난한 청자의 태도를 보인 것은 휴버트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사형. 스승님. 저는 아무래도 찻물 쪽이 좋은 터라.”
달그락-.
다리아의 집무실 한편에 준비된 다기를 이용해 페퍼민트 차를 우려낸 것이다.
“이왕 하는 김에 나도 한잔 부탁하마.”
휴버트에게 다리아가 부탁했고,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난 후에야.
마침내 러셀은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일단 수드라에 도착한 저는…….”
유적에 도착했던 것에서 시작하여 세 명의 사교도와, 놈들 중 하나가 어보미네이션을 소환했던 이야기.
그 후 시작된 제국의 추격까지.
물론 모든 내용을 사실대로 전달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팬덤을 쓰러뜨린 대는 ‘용인화(龍人化)’라는 특별한 힘이 사용되었던 탓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곤 하지만, 용인화를 납득시키기 위해선 그 전에 설명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기에 러셀은 일부 내용을 각색하고 수정하여 전달했다.
개중 가장 두드러진 각색은, 블레이즈 랜스를 이용해 오러를 깎아내듯 소비시켰던 전투였다.
“흐음. 방어 위주의 마법으로 수세에 몰린 척을 하며 오러를 소비시켰다.”
“고전적이지만, 그 미친놈에게라면 잘 먹혔을 법한 수법이 아닙니까?”
“실드의 강도와 범위를 잘 조절한다면, 상대의 오러는 과소비시키면서도 스스로의 마력은 어느 정도 온존할 수 있겠구나.”
그 외에도 바뀌게 된 내용이 여럿.
하지만 전혀 말이 안 되는 건 또 아니었다. 극히 희박하긴 했지만, 가능성은 충분했기에.
“그렇다 하더라도 쉽지 않은 전투였을 터.”
“가능성으로 따지면 1할, 그 이하인가. 킁, 사제가 이번에 큰 위험을 경험했군.”
휴버트와 버밀리온이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다만 한 사람.
다리아만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러셀을 응시할 뿐이었다.
어쩐지 사람의 속을 들여 보는 것만 같은 눈빛에 러셀이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찔리는 기색을 애써 감추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스승님?”
그 물음에 낄낄거리는 예의 웃음소리와 함께 다리아가 손바닥을 흔들었다.
“우리 막내가 다 설명을 해줬거늘, 그럴 리가 있겠느냐?”
이어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마력을 이용해 러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어떤 수단을 썼건 간에, 승률은 1할 내외였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리한 것은 막내, 너란다.”
하물며 상대가 제국의 핵심 전력 중 하나, 초인 급 대검호의 제자였음에야.
살아 돌아온 것도, 승리한 것도.
모두-.
“잘했다. 막내야.”
그리 칭찬하며 다리아가 빙긋 웃었다.
직후였다.
“자, 그럼-.”
짝-.
장난스럽게 웃은 다리아가 손뼉을 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칭찬은 칭찬이고, 일을 잘해 낸 것에 대한 보상은 따로 주어야겠지?”
자신의 로브 자락 속에 손을 넣었다.
손바닥 크기의 종이 한 장을 꺼내 러셀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건…….”
러셀이 고개를 갸웃하자, 다리아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러셀의 눈앞에서 팔랑팔랑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왕도 사대 마탑에서 보증하는 전표란다.”
“이게 바로 그…….”
다리아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을 건네받은 러셀이 복잡한 눈으로 손에 들린 전표를 응시했다.
소문은 많이 들어봤지만,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전표의 왼쪽 상단에 찍혀 있는 직인이었다.
물, 불, 바람, 땅. 네 개의 마탑을 상징하는 사대원소가 원처럼 새겨진 직인.
그 바로 아래 열에 전표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일, 십, 백, 천…….’
금, 은, 동으로 이루어진 동전과 숫자가 적힌 지폐를 공용으로 사용하는 대륙의 화폐단위를 생각했을 때.
‘이 정도라면…….’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많은 수치에 러셀이 쾌재를 부르려는 찰나.
다리아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끼어들었다.
“그건 사교도의 추적에 대한 성과금이고, 지금 이것이 스팬덤의 수급을 베어온 것에 대한 보수란다.”
또 한 장의 전표를 조용히 러셀의 앞에 꺼내 놓았다.
그 말과 행동에, 러셀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전표의 숫자를 확인했다.
“…….”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평생 용병 일을 하며 벌어들였던 금액보다 더욱 많은 숫자가 그 위에 쓰여 있었다.
“이게……,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다리아가 고개를 주억였다.
설명을 해준 것은 휴버트였다.
“제국의 기둥……, 까지는 아니지만 주요 전력 중 하나였던 작자일세. 그런 자에게 붙은 현상금이 적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말대로, 비록 전쟁 중은 아니었다지만 러셀이 세운 공훈(功勳)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폐하께서도 이렇게 따로 선물을 보내신 거겠지.”
‘폐하께서 보낸 선물’이라는 말에 러셀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앞에 다리아가 내려놓은 것은, 한 통의 편지였다.
손끝을 따라, 마치 다림질이라도 된 듯 빳빳한 질감이 느껴졌다.
곧게 접힌 겉봉의 중앙에 찍혀 있는 것은 왕실을 상징하는 인장.
그 아래에는 유려한 필치로 쓰여 있는 것은 ‘러셀 레이먼드에게’라는 글귀였다.
“펼쳐보려무나.”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어투.
‘이 상황에서 왕실이 내게 서신을 보낼 정도라면…….’
혹시 하는 기대감과 함께 러셀이 편지의 겉봉을 개봉했다.
사락-.
그 속에 쓰인 글귀를 읽었다.
“…….”
온갖 미사여구와 고급스러운 말로 점철된 편지, 허나 그 속에 담긴 의미만큼은 너무도 명확했다.
‘……어린 나이에 새운 공과, 앞으로의 가능성을 높이 사는바. 러셀 레이먼드에게 자작 위를 내린다.’
이 편지가 왕실의 오랜 우방, 레이먼드 가(家)가 다시 한번 도약하는 계기가 되기를.
‘왕실은 진심으로 바라노라.’
5써클을 달성한 후에 받을 수 있는 백작위도, 7써클을 이룩한 후에 받을 수 있는 후작위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작’이라는 자리 역시 귀족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
속에서 왈칵, 뭔가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어-?”
눈가를 따라 뜨거운 무엇인가가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버밀리온이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사제. 눈물을 흘리면 근 손실이 오…….”
철썩.
“억, 아픕니다. 스승님.”
제법 우스운 광경이었지만, 러셀은 웃지 않았다.
아니, 웃을 수가 없었다.
바라 마지않는 순간이었긴 했지만, 그렇다고 울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왜 이놈의 눈물은 그치질 않는 건지.
“죄송합니다.”
러셀이 황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로브 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툭툭-.
그런 그의 모습을 오랜 시간 지켜봐 온 한 사람.
휴버트만이 러셀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며,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고생했네. 지금까지 정말로 고생 많았어. 사제.”
* * *
그로부터 며칠.
첫 번째 임무를 마치고, 얼마간의 휴가를 받은 러셀은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흐음.”
휴버트의 저택 정원에 선 채,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넓적한 원반을 든 모습.
귀족 위를 받았다고 하지만,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러셀이 받은 것은 작위였을 뿐, 영지는 아니었으므로.
그때였다.
가르륵-.
하늘을 선회하던 페퍼가 러셀의 옆에 내려앉으며 울음소리를 낸 것은.
낑낑거리는 소리, 뭔가를 간절히 원하는 듯한 울음소리에 러셀이 피식 웃었다.
원반을 든 손의 손가락으로 페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에 들고 있던 원반을 휙 던졌다.
갸르륵-!
그러자 페퍼가 힘차게 울음소리를 터뜨리며 바닥을 박찬다.
한 쌍의 날개를 크게 펄럭거렸고, 순식간에 원반을 향해 쏘아졌다.
쐐애애애액-!
기다란 불꽃의 궤적을 꼬리처럼 남기며 날아가는 모습이 마치 유성과도 같았다.
그렇게 쏘아진 페퍼가 허공중에서 원반을 낚아채고, 캬르르르륵!
득의양양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꽤 멀리까지 던져진 원반을 단숨에 낚아챈 것이, 제 딴에도 꽤 자랑스러운 듯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낚아챈 원반을 제힘으로 집어 던졌고, 다시 한번 날아가 그것을 낚아채길 반복한다.
이번에는 직선적인 움직임이 아닌, 선회하며 원의 궤적을 그리는 움직임. 그 모습을 보며 러셀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분명 교감 수준을 높이기 위해 시작한 놀이였는데…….’
언제부턴 제 비행능력에 취해 저 혼자 놀고 있으니.
뭐, 스스로가 즐거워 보이니 상관없지 않을까도 싶었다.
‘저렇게 놀다가 지루하면 다시 던져달라고 오겠지.’
아무래도 자신이 던지는 것보다는, 러셀이 던지는 원반이 조금 더 멀고 강하게 날아가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한동안 페퍼를 응시하던 러셀이 시선을 움직였다.
다른 한 손으로 들고 있던 책의 내용에 다시 집중했다.
[기초 창술 교본]적당한 값을 주고 시내의 책방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듣자 하니 기사 생도들을 교육하는데에도 쓰이는 교본이라고 하던데…….
‘수준이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아.’
하긴 제대로 된 창술서나 체술서를 쉽게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러셀에게 있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귀동냥으로 배우고, 주먹구구식으로만 알고 있던 것들을 제대로 정립할 수 있는 기회니까.’
페이지를 넘기던 러셀이 잠시 책을 덮었다.
턱-.
인비저블 핸드를 이용해 책을 허공에 띄워 놓은 채, 블레이즈 랜스를 소환했다.
화르르르륵-.
불꽃의 창이 선연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의 온도가 후끈 달아올랐다.
‘창술의 기본은 외전(外轉), 내전(內轉), 그리고 찌르기다.’
어렴풋하게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던 것들이, 교본을 통해 다시 한번 재정립되었다.
외전은 바깥쪽으로 창을 회전시켜 튕겨내는 힘을 배가시키는 것이고.
‘내전은 안쪽으로 회전시켜 끌어내거나 끊어내는 것.’
그리고 찌르기는 문자 그대로 밀 듯 찔러 상대방을 꿰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 수법이야말로 창술의 기본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셈.
여기에, 창을 잡는 파지법이나 휘두르는 각도 회전의 정도 따위를 더해가며 무한에 달하는 연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복잡해.’
고작 기초가 이 정도라면, 고등의 창법은 상위의 마법만큼이나 복잡할지도 몰랐다.
하긴.
‘그러니까 그 미치광이가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거겠지.’
당시 스팬덤이 보였던 움직임을 떠올리며 납득을 마친 러셀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움직이며 생각했다.
‘마법사라는 정체성을 잊을 생각은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술을 익히는 이유는 분명했다.
‘워 메이지로 활동하는 이상, 언제 어떤 식으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지 모르니까.’
마법사만큼이나 오러 수련자들 역시 세상의 경계에서 한 걸음 벗어난 자들이다.
단순히 거리를 잡는 것만으로 우세를 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전날의 싸움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때를 대비해 다른 수단을 준비해둘 필요가 있어.’
러셀에게는 그 수단이 바로 창술이었다.
“후우-.”
그렇게 얼마나 몸을 움직이고 있었을까.
갸륵-.
혼자 노는데 싫증이 나기라도 한 것인지, 페퍼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날개를 접어 바닥에 내려앉으며 러셀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입에 물고 있던 원반을 슬그머니 러셀의 앞에 내려놓으며, 자신의 앞발로 탁탁 두드렸다.
아마도 던져달라는 거겠지.
“그래. 그래.”
이번에는 좀 멀리 던져볼까?
그런 생각으로 블레이즈 랜스를 해제했다.
원반을 짚기 위해 손을 뻗었다.
“음?”
그러다 말고 러셀이 멈칫했다.
페퍼의 날개 아래쪽에, 평소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