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75
75화
EPISODE.38
뚜벅, 뚜벅-.
부츠 굽 소리와 함께 보랏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대기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긍지 높으면서도 야성적인 눈매에, 한 점의 굽힘조차 없이 오연한 외모.
왕녀, 헤카테 라트모스.
대기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 그녀가 장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한 곳에 모여 있었나?”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목소리였다.
누군가를 찾아온 것만 같이 말하는 태도.
하지만 러셀은 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러셀의 신경은 온통 어떤 마나의 흐름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왕녀, 헤카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흐름이었다.
‘마법을 익히신 건가?’
그런 생각으로 살펴봤지만, 딱히 써클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써클과는 조금 다른 힘, 오러(Aura)의 기척이었다.
가볍게 움직이는 손끝에서도 절도가 담긴 것이 느껴졌다.
단순히 교양 삼아 오러와 검술을 익힌 것은 아닐 테지.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왕족치고는 대단히 높은 수준이라.
그런데 정작 신경을 긁어대는 것은 오러가 아닌 마력의 기척이라니.
‘팔찌?’
짧은 순간, 티 나지 않게 헤카테의 전신을 살피던 러셀의 눈초리가 빛을 발했다.
일견 평범한 듯 보이나, 한 자루의 검과 같은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팔찌.
마도사의 벽을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파악이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상당히 수준 높은 아티펙트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신대의 유물일지도.’
그렇게 생각하던 러셀은 이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대단한 물건인 듯 보였으나, 자신의 신경을 잡아끄는 것은 저 팔찌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찰나의 시간 후.
러셀은 자신의 신경을 잡아끄는 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목걸이.’
그것은 목걸이였다.
한가운데, 녹주석(綠柱石)으로 추측되는 보석이 박혀 있는 목걸이.
팔찌에 비하면 딱히 특별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셀은 쉬이 그 목걸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운명과도 같은 이끌림.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고, 써클에 깃든 마나가 격렬하게 호응하는 것이 느껴진다.
전날 박물관에서 용종의 심장을 마주했을 때와 똑같은 감각이었다.
‘설마-!?’
아니나 다를까.
반투명한 녹색의 창이 떠올랐다.
[미션]왕녀의 보물.
녹색의 목걸이는 왕녀가 소중히 아끼는 보물입니다. ‘왕녀의 보물 목걸이’를 확보하세요.
확보 여부(n)
[보상]중급 마석(식용)x2
???
미션의 내용을 확인하던 러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냥 왕녀의 물건이라고 해도 쉽지 않을 진데, 보물처럼 여기는 물건을 확보하라고?’
그나마 왕가의 보물이 아닌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건지.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빠르게 마음을 추슬렀다.
‘일단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언제까지고 목걸이만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기에.
“왕녀 전하를 뵙습니다.”
“왕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보다 반 박자 빠르게 앨런과 슈피겔만이 고개를 숙였다.
“……왕녀 전하를 뵙습니다.”
뒤이어 러셀 역시 헤카테를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어릴 적 아버지께 배웠던 예법을 떠올리면서였다.
다행히 오래된 기억 속 예법이 틀리진 않았는지, 헤카테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적인 자리도 아닌 곳에서 이리도 과한 인사는 필요치 않겠지. 고개를 들게.”
슈피겔만과 앨런을 한 차례 쓸어보더니 말했다.
“경들은 오랜만이로군.”
아무래도 다른 두 사람과는 안면이 있었던 모양.
“예. 오랜만이로군요……. 그런데 왕녀 전하, 대기실까지는 어쩐 연유로 오셨습니까?”
슈피겔만의 질문에 헤카테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강철로 만든 장미를 연상시키듯, 단단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어쩐 연유라…….”
말꼬리를 늘어뜨린 후, 시선을 움직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있는 러셀을 또렷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라네. 단순히, 가까이서 봐 두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말일세.”
“가까이서 봐 두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뚜벅 뚜벅.
몇 걸음, 거리를 좁힌 헤카테가 잠시간 러셀의 두 눈을 빤히 바라봤다.
“흐음.”
한차례 침음을 흘린 그녀가 고개를 훅 들이밀었다.
이어 러셀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당분간 경을 지켜보도록 할 터이니, 기억해두시게.”
“무슨 말씀-?!”
당황한 러셀이 반문하려는 순간,
“뭐, 오늘은 이 정도로 할까.”
헤카테가 뒤로 물러났다.
“그럼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지.”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돌렸고, 뚜벅 뚜벅.
의미 모를 웃음과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그럼 또 보세나.”
.
.
“돌아가자꾸나.”
대기실을 빠져나온 헤카테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을 향해 명했다.
뚜벅, 뚜벅-.
그녀의 걸음을 시작으로 시녀들 몇이 뒤따르기 시작하고, 그리고 얼마 후.
대기실이 충분히 멀어졌을 때, 시녀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하고자 하셨던 일은 잘 마무리 하셨나요?”
평민 계층으로 궁에 들어와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와는 달리, 시녀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하는 일 역시 허드렛일이 아니라 왕족을 수행하는 일이 대부분이었고.
다만, 그렇다 하여도.
좀 전의 그 발언은 아무리 시녀라 하여도 꽤 주제를 넘은 발언이었다.
하지만 헤카테는 그 부분을 책잡지 않았다.
꼬집어 꾸짖어 주는 대신 그녀의 물음에 대꾸했다.
“마무리라고 할 게 있나,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거늘.”
지금 뒤를 따르는 시녀 세 사람은, 어렸던 시절부터 함께 자라난 자매와도 같은 이들이었기에.
“시엘.”
처음 말을 걸었던, 시엘이라 불린 시녀가 공손히 답했다.
“예. 왕녀 전하.”
“나는 내 위치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느니라. 남들은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릴 수 있게 태어난 위치에 대한 자각이라면 얼마든지 하고 있지.”
반대로 그것들을 누리기 위해 해야 할 것 역시도.
“원하던 사내와 연애를 한다느니 사랑을 한다느니 하는 것도, 내게는 분명한 사치다.”
남들에겐 당연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도, 몇 번이고 저울추를 고민해야 하는.
왕족이란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반대로, 내 입장을 잘 이용하기만 하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아.”
저울추만 맞는다면, 원하는 상대를 배필로 삼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러셀 레이먼드 경은 꽤 합당한 저울추들을 다량 지니고 있는 사내라고 할 수 있지.”
우선 실력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며칠 전, 염탑에서 올라온 보고서의 내용대로라면 그는 이미 5써클의 마법사였으므로.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계산해보더라도 그 나이에 5써클에 오른 이의 존재는 없을 터.
‘신화시대의 존재가 아니라면 말이지.’
게다가, 그 외의 배경 역시 나쁜 편이 아니었다.
“염탑주, 다리아 스노우화이트 경의 막내 제자. 지금은 몰락해버린 레이먼드 가의 적손.”
레이먼드 가는 개국공신 가인 동시에 왕실의 든든한 우방이었던 가문.
변절하지만 않았다면 그 충절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뿐더러, 외척을 걱정할 이유 역시 없다.
“눈빛 역시 남다르더군. 지금껏 봐온 누구의 자제니 장남이니 하던 귀족 집안 얼치기들보다 훨씬 나아.”
무엇보다 얼굴까지 자신의 취향이라니, 입가를 따라 한줄기 호선이 그려지려는 찰나.
“!”
우뚝, 헤카테가 걸음을 멈췄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전하?”
그런 그녀의 모습에 뒤따르던 시종, 시엘이 고개를 갸웃했고-.
“이런, 내 입장만 고려해 정작 러셀 경의 마음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군.”
-난감하다는 듯 헤카테가 중얼거렸다.
“시엘. 네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예. 전하. 하명하소서.”
“나 보다 두 살 어린…….”
쭈뼛거리며 뜸을 들이듯 잠시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그러니까 연하의 남자들은 어떤 여인에게 끌리는가?”
헤카테 라트모스.
그녀는 러셀보다 두 살 연상이었다.
“…….”
* * *
헤카테가 돌아간 뒤.
대기실에 남은 세 명의 사내는 풀이라도 바른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한바탕 폭풍이라도 지나간 것만 같았다.
먼저 침묵을 깨뜨린 것은 앨런이었다.
“아무래도, 왕녀 전하께서 러셀 경에 관한 소문을 듣고는 관심이 생기셨던 모양이군요.”
“아, 그럴 만도 하지. 스물도 되지 않은 나이에 5써클, 게다가 벌써 여러 번 공을 세우기까지……. 마치 영웅 소설에나 나올 법한 행보가 아닌가.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게 더욱 놀라울 따름이지만.”
“그렇……습니까?”
기다렸다는 듯 슈피겔만이 말을 받았지만,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왕녀의 존재감이 불러온 후폭풍이 생각보다 거셌던 탓이다.
“…….”
그 기묘한 침묵 속에서, 러셀은 회귀 전 들었던 헤카테에 관한 소문을 떠올렸다.
왕족과 귀족들에 이러저러한 이야기는, 세간에선 쉽게 식지 않는 가십거리였으므로.
그들 중에서도 헤카테는 꽤 많은 소문을 몰고 다니는 왕녀였다.
그것도 좋은 쪽으로.
‘단순히 제1 왕위 계승권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지.’
문자 그대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갖추고 있는 여인.
어쩌면- 훌륭한 군주라고 평가받는 아버지, 알폰소 라트모스보다 뛰어난 자질을 갖췄을지도 모르는 후계.
조금 저돌적인 면이 있다곤 하지만, 강인한 행동력을 바탕으로 일을 추진해나가는 면모는 그야말로 군왕(君王)의 모습이라던가.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저돌적, 뛰어난 행동력…….’
궁금한 점은, 무슨 이유로 그 행동력을 발휘해 이곳까지 왕림했냐는 것이다.
‘나에게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흠.’
한동안 헤카테에 관해 생각하길 얼마간, 일순 그녀가 남기고 간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잊지 말게나. 내 당분간 경을 지켜보도록 할 터이니.”
지켜본다고? 무엇 때문에?
해석하기에 따라선 충분히 오해를 부를 수 있는 말이었다.
괜히 양 볼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러셀이 손을 움직였다.
텁,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생각은 하지 말자.’
무슨 생각으로 왕녀, 헤카테가 자신을 찾아왔는지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지금은 다른 것에 더 신경을 쓸 때였다.
‘목걸이…….’
하물며 단순한 장식품이나 국보도 아닌 왕녀의 보물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박물관에 보관된 용종의 심장보다 입수 난이도가 높을지도.
‘그래도 별수 있나.’
방법을 강구해 보는 수밖에.
전과 같이 스승, 다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는 사안이 애매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물관에 보관된 물건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왕녀가 보물처럼 여기는 목걸이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간…….’
마땅히 둘러댈 변명거리도 없지 않은가.
그 후 벌어질 일이 단편적으로 떠오른 탓에, 러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똑똑똑-.
그때 대기실 바깥쪽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국왕 폐하께서 회의장에 들라 십니다.”
국왕의 부름.
시종장의 목소리였다.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