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76
76화
EPISODE.38
“따라오시지요.”
안내하는 시종장을 쫓아 이동하며 러셀이 시선을 움직였다.
유리창에 비친 실루엣을 통해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머리를 정돈하고 화장까지 했기 때문일까.
유리창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오늘따라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그 아래로 보이는 것은, 연미복 위에 걸쳐 입은 붉은 색의 로브였다.
일견 평범한 로브처럼 보이지만, 이는 러셀이 5써클에 오른 후 염탑에서 새롭게 지급받은 것이었다.
어느 정도 한기와 열기에도 견딜 수 있도록 온도 조절 마법이 걸려 있을 뿐만 아니라, 로브의 안쪽에는 아공간 마법 역시 걸려 있었다.
게다가 어지간한 공격은 무시할 수 있는 방어 마법 또한 걸려 있으니-.
‘단순 가치로 환산하더라도 왕도에 있는 저택 두어 개쯤은 충분히 살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스스로의 자긍심과도 같은 로브를 팔아 버릴 정신 나간 마도사가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만은.
실없는 생각에 피식 웃은 러셀이 로브 자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구겨지거나 접힌 곳도 없고, 자연스러워.’
그것으로 준비는 끝.
시종장의 걸음이 멈춰 선 것도 그 무렵이었다.
“흠흠. 잠시만 기다리시오.”
국무회의장으로 통하는 문 앞에 멈춰선 채, 시종장이 목소리를 다듬었다.
안쪽에 들리라는 듯 목소리 높여 소리쳤다.
“폐하. 부름에 따라 슈피겔만 장로를 포함한 삼 인이 지금 막 이곳에 도착하였나이다.”
기다렸다는 듯 왕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들라 하라.”
그보다 반 박자 늦게 국무회의장으로 들어서는 문이 열렸다.
가장 정면에 보이는 것은 기다란 테이블, 그 끝 가장 상석에 위치하고 있는 이가 바로-!
“왕도 황탑의 마도사, 슈피겔만이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최연장자인 슈피겔만이 가장 먼저 고개를 숙였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반대편 주먹을 바닥을 향해 가져다 댔다.
뒤이어 러셀과 앨런 역시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염탑의 마도사, 러셀 레이먼드가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창탑의 마도사, 앨런 페이지가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세 마도사의 인사에 국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하게 웃었다.
“소문의 주역들을 오늘 이 자리에서 보게 되는구나.”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오러나 마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힘.
군왕으로서의 격을 갖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러셀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과연.’
왕녀, 헤카테 라트모스의 목소리에 깃든 힘이 어디서 온 것 인가했더니.
왕격 역시 대를 이어 유전되는 것일까?
“세 사람은 고개를 들라.”
때마침 떨어진 왕의 음성에 잡념에서 깨어난 러셀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러셀은 주변의 공기가 뒤집히는 착각을 느꼈다.
아무런 기세도 발산되고 있지 않았지만, 심장을 옥죄는 것만 같은 감각.
그럴 수밖에.
이곳에 자리한 이들은 하나같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기에.
그것이 마법이냐, 권력이냐의 차이점은 있겠지만.
‘왕도의 마탑주들과 각 분야의 대신들, 그리고 대귀족들…….’
마탑주들 인근의 자리 하나가 비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아무래도 왕도에 머무르고 있다는 한 사람의 소드 마스터가 개인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은 것일 테지.
‘검의 달인(達人)이라는 사람들을 한번 봐두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러셀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어깨를 활짝 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 나라의 핵심 인사들에게 다시 한번 ‘레이먼드’라는 이름을 각인시킬 기회였다.
마법사로서가 아닌, 귀족으로서의 레이먼드를.
‘분위기 좀 달라졌다고, 움츠러들 수는 없어.’
주인의 의지에 호응하듯, 써클의 마력이 일어났다.
우우우웅-.
희미하게 일어난 마력이 전신을 순회하며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단숨에 사람이 달라진 것만 같은 모습에 몇몇 귀족들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허어.’
‘이미 몰락했다 여겼거늘, 제법 번듯한 인물이지 않은가.’
‘지난번 친선대결에서와는 또 다른 면모로고.’
‘마법사일 뿐만 아니라, 귀족으로서의 품격 또한 잊지 않았는가?’
러셀과 눈이 마주친 다리아가 빙긋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잘했다. 막내야.]그때 세 사람의 면면을 확인한 국왕이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경들의 공을 치하하기 위함인 바.”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우선 세 사람의 공통된 공부터 치하한 후, 각자의 공을 논하겠다.”
준비한 것을 가져오라.
국왕의 명에 따라.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가지고 온 것은 세 개의 보따리와, 같은 숫자의 상자였다.
주먹 정도 크기의 상자.
쩔그럭-.
소리와 울림으로 보아 보따리 안에 든 것은 재화가 분명했다.
‘그럼 상자는 뭐지?’
궁금증이 일길 잠시간, 국왕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있었던 베이스캠프의 참사는 마음 아픈 것이라곤 하나, 경들은 참사를 일으킨 세 명의 사교도들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바. 첫째로 나는 이 부분을 치하하고자 한다.”
말과 함께 상자 중 하나를 열었다.
딸깍-.
“이에 나는 200닢의 금화와 함께 마나 상승의 비약을 두 알 하사하노라.”
마나 상승의 비약.
한 알만 있다면, 평범한 범인(凡人)조차도 마력을 느끼게 만들 수 있다는 비약이다.
그걸 무려 한 알도 아니고 두 알이나.
물론 5써클의 벽을 넘어선 마도사들의 마력 양을 고려하면 고작해야 두 개 정도의 물 항아리를 호수에 붓는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저 비약의 가치는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극도로 정순한 마나를 제공하는, 그와 함께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마력의 순도 역시 함께 높여주는 비약.’
캐스팅 속도나 순간적인 위력 등.
마법을 사용하는데 있어, 마나의 정순함은 많은 영향을 끼치는 요소였다.
그 가치를 알고 있는 마법사들에게 있어 비약은 그야말로 무가지보나 마찬가지인 셈.
물론 얼마나 정순해질지는 미지수였지만.
실제로 얼마나 놀랐는지, 부족함 없이 자란 앨런의 두 눈마저도 작게 떨리고 있었다.
“이 결정에 이의 있는 자, 지금 나서도록.”
사실 금화 200닢은 그렇다 치더라도, 두 알이나 되는 마력 상승의 비약은 조금 과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선 두 청년을 영웅의 상징으로 만들겠다는 언급이 있었던바.
‘미래 가치를 보고 투자를 하신 게로군.’
‘앞으로 보여줄 미래를 생각하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겠지.’
이의가 있을 리가-.
“폐하.”
-잠시 망설이던 슈피겔만이 침을 삼켰다. 뭔가 결정한 듯,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괜찮다면 이 노구가 폐하께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
잠시 고개를 갸웃한 국왕이 턱을 주억였다.
“허(許)한다.”
“발굴 현장을 습격한 사교도 하나를 쓰러뜨렸다곤 하나, 사실 그것은 이 노구의 공이라고 보기 어렵사옵니다. 제 입으로 털어놓기 부끄럽습니다만, 사실상 저는 젊은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했을 뿐이니…….”
길어지는 청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마저 말을 맺었다.
“……제가 아닌 두 청년들에게, 제 몫의 상을 나누어주실 것을-, 그게 아니라면 그날 죽어간 다른 이들의 혈육에게 나누어주실 것을 감히 청하나이다.”
“허-.”
슈피겔만의 말에 몇몇 귀족들과 대신들이 작게 탄성했다.
왕도 황탑의 장로이니 금화 200닢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설마하니 비약까지 거부할 줄이야.
“후회하지 않겠는가?”
손바닥을 들어 장내의 소요를 가라앉히며 국왕이 물었다.
“저는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처음 침을 삼켰던 것과는 달리 일말의 미혹조차 남지 않은 음성이었다.
아니.
말을 내뱉었기에 도리어 망설임조차 남지 않았던 것이겠지.
“경의 선택을 존중해, 비약 두 알과 금화를 각기 두 사람에게 나누어주도록 하겠으며-.”
그 속내를 짐작한 국왕이 답했다.
“유족들의 문제는 걱정하지 말도록. 이미 그에 대한 보상 방안 역시 마련되어 있다네.”
“감사합니다. 폐하.”
목적했던 바를 이룬 슈피겔만이 깊게 읍하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베이스캠프에서의 공은 여기까지이고, 다음은 개개인의 공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국왕의 눈이 향한 곳은 앨런에게였다.
“페이지 백작의 차남이자 창탑의 마도사, 앨런 페이지 경은 들으라.”
“예. 폐하.”
“그간 그대가 세워온 크고 작은 공들은 모두 보고서를 통해 전달받았던바. 국가를 위해 헌신한 그대에게 새벽의 훈장, 모어겐로트(Morgenrot)와 함께 기존에 있던 남작의 작위를 자작으로 승격한다.”
앨런은 페이지 백작가의 차남인 동시에, 본인 스스로 남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던 귀족이었다.
그런데 그 작위가 자작으로 승격된 것.
“이에 이의 있는 자 지금 나서도록.”
슈피겔만처럼 본인이 거부하는 것이 아님에야.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마지막은……, 러셀 레이먼드 경. 자네인가.”
국왕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을 느끼며 러셀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처음 레이먼드라는 성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지.”
그럴 수밖에.
러셀의 아버지인 레이먼드 백작의 대에 들어 다시 빛나긴 했지만, 그보다 더욱 오랜 세월 동안 쇠락해 가고 있던 가문이었으므로.
“열흘 붉은 꽃은 없다 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쇠락해 가는 줄 알았거늘.”
국왕의 시선이 기특하고 대견하다는 듯 러셀을 쓸어내렸다.
“이리도 아름다운 꽃의 씨앗을 숨겨두고 있었을 줄이야.”
“과찬이십니다. 폐하.”
러셀의 겸양에 잠시 할 말을 찾던 국왕이 입술을 뗐다.
“고생이 많았음을 안다. 여기에 올라오기까지 쉽지 않았음 역시 알고 있다. 그렇기에 공을 치하할 준비 역시 되어있고. 허나 그 전에…….”
“……?”
“한 가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가능하겠는가. 러셀 경?”
“명 하소서. 폐하.”
“염탑주에게 들으니 그대의 경지가 5써클에 올랐다고 하더군. 내 염탑주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직접 확인해 보고 싶네. 아니, 반드시 확인해봐야겠지.”
국왕 역시 레이먼드가에 내려진 특례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굳이 이런 자리에서 자신의 써클을 확인하려 할 리가 없었다.
‘스승님.’
그 사실을 미리 국왕에게 언질해 준 다리아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며 러셀이 고개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다섯 개의 써클을 맹렬히 회전시키며, 하나의 마법을 발동시켰다.
써클 프로젝션(Circle Projection)
고작해야 1써클, 그리 대단한 마법은 아니다.
하지만 이 마법에는 큰 강점 두 가지가 존재했다.
첫 번째는 사대 속성 중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마나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화르륵-.
러셀의 경우는 불.
마력의 불꽃이 허공을 따라 원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이 마법의 두 번째 진가는 그때서야 비로소 드러났다.
‘마법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이들에게, 자신의 수준을 드러내기에 이만큼이나 명확한 연출을 보여줄 수 있는 마법은 없지.’
애초에 마법의 기원부터가 그런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화륵, 화르르륵-
불꽃의 마나가 쉬지 않고 회전하며 계속해서 원을 그려냈다.
처음에는 하나였던 것이 어느새 셋까지 늘어나 있었고 넷을 거쳐, 화악!
마지막 고리가 완성되었다.
등 뒤쪽에서 생겨난 다섯 개의 불의 고리가, 러셀을 넘어 장내를 환하게 밝혔다.
화르륵!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