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93
93화
EPISODE.47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려무나.”
그렇게 다리아까지 러셀에게서 멀어지자, 주변에 있던 귀족들과 그 영애들이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렸다.
저마다 눈치를 살피며, 먹이를 노리는 승냥이 떼마냥 앞으로 나설 기회를 찾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역시 그들에게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러셀에게 말을 거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
“이렇게 은인을 다시 뵙게 되는군요. 러셀 경.”
푸른색의 오프숄더 드레스가 화사하게 잘 어울리는, 키옐의 왕녀 카밀라였다.
“-왕녀 전하?”
러셀이 깜짝 놀라며 적당히 예를 차리자, 카밀라가 말갛게 웃었다.
그런 그녀의 옆에 서 있는 것은 키옐의 특사인 킴블리 백작과, 짜맞추기라도 한 듯 푸른색 원단으로 포인트를 준 일단의 무리들.
러셀이 그들을 확인했고 카밀라가 말을 이었다.
“진작 경을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워낙 일이 많았는지라 이렇게 늦어버렸네요.”
변명처럼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에 러셀이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일이 있었던 그날부터 연회가 열리기까지는 약 두 달 하고 보름가량.
그 시간 동안 키옐의 인물들이 얼마나 바쁜 시간을 보냈는지는 러셀 역시 익히 알고 있었다.
‘동맹 협정 체결과 교역 물품의 확대, 그리고 마석 공급량에 관한 논의가 오갔다던가?’
한 건, 한 건이 모두 하루 이틀 논의해서 끝날 문제는 아니었다.
대국(大國)인데다 은혜를 입었다고는 하나, 그것을 빌미로 일방적인 이득을 취하려 한다면…….
‘그건 제국과 전혀 다를 바가 없겠지.’
덩치와 국력만을 잔뜩 부풀린 무뢰배 집단. 엔디미온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국가관은 그와 거리가 멀다.
거기다 키옐 측이 지금껏 감사의 인사를 한 번도 전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일 뿐.’
러셀이 입원해 있을 당시는 물론 퇴원을 했을 때에도 몇 번이나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그리 말씀해주신다면야.”
러셀의 대꾸에 카밀라가 안도한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
“뒤쪽에 킴블리 백작과 함께 있는 이들은 키옐의 분들입니까?”
이번 동맹 협정과 왕녀의 보호를 위해 키옐 측에서도 추가적으로 인원을 파견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네. 뒤늦게 합류를 해주신 분들이랍니다.”
러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별처럼 반짝이는 눈빛으로 러셀을 향해 목례했다.
“모두 러셀 경과 휴버트 경의 도움 덕분이랍니다.”
“……?”
“두 분께서 힘써주신 덕분에, 본국의 사정이 호전될 수 있었으니까요.”
여기서 말하는 ‘호전’이란 제국이 발을 빼기 시작한 상황을 말하는 것일 테지.
그렇기에 여유가 생긴 키옐 측에서도 엔디미온과의 협정에 추가 인원을 파견할 수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곧 본국으로 돌아가시겠군요.”
그녀가 신분을 속여가면서까지 엔디미온으로 피신한 이유는, 키옐의 후작이라는 놈 때문이었다.
키옐의 후작이라는 작자가, 제국을 등에 업은 채 왕녀와 제 아들 간의 혼사를 추진했었으니까.
하지만, 놈의 뒷배가 되었던 제국이 발을 빼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후작의 힘 역시 예전만은 못할 것인즉, 그녀가 고개를 주억였다.
“네. 며칠 후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이어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오늘은 두 분 은인께 전해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이 자리를 찾았답니다.”
“……?”
자신이 키옐 측에 전해 받을 만한 것이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하는 러셀에게 왕녀가 소리 내어 대꾸하는 대신, 무엇인가를 건넸다.
“이건-?”
정갈하게 돌돌 말려, 빨간색 끈으로 매듭지어진 몇 장의 종이 뭉치였다.
스륵, 리본을 풀자.
종이 안쪽을 빼곡하게 채운 계약서의 형식이 눈에 들어온다.
“이번 협정을 통해 늘이게 된 마석 공급량, 그중 5푼에 대한 거래권이랍니다.”
키옐은 대륙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유명한 마석 생산지였다.
그리 크지 않은 국토에 비해, 생산되는 마석의 양은 전체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정도.
‘그중 협정을 통해 늘어난 공급량의 5푼이라.’
고작해야 5푼이라고 넘기기에는, 결코 적지 않은 양이었다.
“휴버트 경께도 똑같은 거래권이 전달될 예정이고, 엔디미온 측에서도 이미 허락한 사항이랍니다.”
국가에서도 허락한 사항이라면 문제 될 것은 없을 터.
“감사합니다만…제가 이걸 받아도 될지 모르겠군요.”
“허허. 안 될 이유는 또 뭐랍니까. 러셀 경.”
옆에 있던 킴블리 백작이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첨언했다.
“두 분, 경들은 왕녀 전하의 목숨뿐만이 아니라 키옐의 미래 또한 구한 것이 아니오. 두 분이 아니었다면 본국이 어찌 되었을지…….”
그 말에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카밀라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긴, 회귀 전 키옐과의 관계가 틀어졌던 것 역시 이쯤이었다.
‘맥라이 휴스, 놈의 손에 사형이 목숨을 잃고…….’
카밀라 왕녀가 다시 키옐로 끌려가 후작의 아들과 강제로 혼약을 맺게 되는 미래.
물론 이제는 완전히 갈라지게 된 세계선이었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이는 대륙 전체에서도 자신만이 유일할 테지.
그때였다.
둥-,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연회장 안쪽의 악사들 중, 고수(鼓手)가 북을 울려댔다.
전에 비해 훨씬 더 커다란 울림이 연회장 전체를 떨치고, 악사들의 연주가 일변했다.
. -. . -. .
은은하게 휘돌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엄숙하고 위엄있으면서도 웅장한 음률.
왕궁에서 개최하는 연회에 있어 이만한 대우를 받는 이들이야 뻔했다.
왕족이거나-.
“헤카테 라트모스 1왕녀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국왕이거나.
“찬란하게 빛나는 엔디미온의 태양이자 적합한 지배자이신 국왕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이번의 경우는 둘 다였다.
문이 열리고, 붉은색 천이 젖혀지며 그 너머에서 국왕과 왕녀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은 왕녀의 외견이었다.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타의 여인들과는 달리, 기사의 정복과도 같은 연미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
하지만 귀족들은 한두 번 보는 것이 아니라는 듯, 익숙하게 예를 차렸다.
척, 척-.
고개를 숙이는 이들, 무릎을 꿇는 이들 등.
각자의 작위에 따라 그에 맞는 예를 보인 것이다.
“다들 고개를 들게.”
엄숙한 분위기가 회장에 감돌고.
“우선 연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준 경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내는 바일세. 마음 같아선 당장 연회를 시작하고 싶지만…….”
인사를 받으며 국왕, 알폰소 라트모스가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오늘 연회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을 먼저 진행하는 것이 옳겠지.”
주변을 돌아보던 국왕이 눈을 빛냈다.
검은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를 한 청년을 발견하곤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러셀 레이먼드, 휴버트. 두 사람은 들으라.”
“예. 폐하.”
갑작스런 국왕의 부름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러셀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예. 폐하.”
휴버트 역시 분분히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키옐과의 동맹, 그리고 이번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에 있어 누구보다 지대한 공을 세운 것은 바로 경들일 테지.”
이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터. 가장 먼저 국왕의 시선이 향한 이는 휴버트였다.
“우선 휴버트 경.”
“예.”
“특사와 왕녀를 안전하게 호위하여 동맹을 맺는데 있어 큰 공헌을 한 그대에게, 금화 500골드와 준마 일백 필. 거기에 더해 왕국 남부의 가구 1천 호에 대한 징세권을 내리겠다.”
엔디미온 왕국 남부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바다와 인접한 지역, 곡창지대.’
바다와 인접한 지역에선 해상 자원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것은 물론, 해로를 통한 교역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매해 가을마다 곡창지대에선 여러 종류의 곡물들이 수확되었고.
그에 대한 징세권 1천 호가 내려진 것이다.
그것으로 휴버트에 대한 논공행상은 끝, 이어 국왕의 시선이 러셀에게로 향했다.
“러셀 레이먼드.”
“예, 폐하.”
특사와 왕녀를 안전하게 호위한 것, 그 과정에서 홀로 남아 대적(大敵)을 틀어막고 시간을 끈 것.
그것으로도 부족해 소드 마스터의 한쪽 팔을 날려 버리고 치명상을 입힌 것까지.
러셀의 공을 짧게 정리하여 나열하며 국왕이 중얼거렸다.
“날카로운 송곳은 반드시 주머니를 찢고 나오는 법이라더니. 이 격언은 그대를 위해 있는 말일지도 모르겠군.”
미미하게나마 감탄 역시 섞여 있는 음성, 그럴 만도 했다.
‘이미 몇 차례나 보고를 받았고, 회의의 의제로 올라간 내용이라지만…….’
저토록 젊은 청년이 그 모든 전공을 세웠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으므로.
5써클,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마법사가 소드 마스터의 팔 한쪽을 날려 버렸다는 것은 그 정도의 일이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래, 확실히 운이 좋았을 뿐이다.
만약 맥라이 휴스가 용의 부산물로 만든 무구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언령(言霊)의 힘을 얻지 못했더라면.
마지막 순간,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땅속에 누워있는 건 놈이 아니라 내가 되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었지만, 국왕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
“겸손이 과하군.”
그리 말한 국왕이 흡족하게 웃었다.
“러셀 레이먼드.”
“예.”
“이번 승리에 있어 그대가 세운 전공을 높이 사는바, 이에 금화 3천 골드를 하사하겠다.”
결코 적은 양의 상은 아니었으나, 러셀이 세운 공을 고려했을 때 그 양이 조금 적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라.
허나 국왕은 아직 말을 다 끝낸 것이 아니었다.
“또한, 지금부터 왕국 서부의 도시 셋을 묶어 레이먼드 백작령이라 명하고 그대의 아래에 두겠노라.”
레이먼드 백작령!
“이는 오늘부터 백작령에 포함될 도시 셋의 이름과 위치를 정리한 것이니라.”
국왕에게서 문서를 건네받는 러셀의 눈가가 가볍게 떨렸다.
1만 호에 대한 징세권은 보유하고 있었지만, 따로 소유한 영지는 없었거늘.
이런 식으로 영지를 얻게 될 줄이야.
‘그것도 무려 도시 3개 규모의…….’
평범한 영지가 아닌, 도시로 이루어진 영지를 받는 것인 만큼 자신이 직접 내려가 관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새로 뽑건, 그렇지 않으면 기존의 사람을 그대로 쓰건…….’
시장을 두어 경영하면 될 문제였기에.
중요한 점은, 레이먼드 백작령이라는 영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던 바.
‘드디어…….’
영지 문서를 움켜쥔 그의 손끝이 파르르 덜렸고, 그런 러셀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국왕.
알폰소 라트모스가 중얼거렸다.
“논공행상은 이쯤이면 충분할 터, 이제 슬슬 연회를 시작해도 되겠군.”
술잔을 높이 집어 들었다.
“오랜만의 궁정 연회인데다, 대승을 축하하는 자리인 만큼 경들 역시 모쪼록 즐기다 가시기를 바라겠소.”
본격적인 국정 연회의 시작이었다.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