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96
96화
EPISODE.48
“후우.”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러셀이 외투를 벗어놓기 무섭게, 쓰러지듯 침대 위로 허물어졌다.
털썩-.
가벼운 흔들림이 침상 전체로 퍼져나가고, 러셀은 머리맡에 얼굴을 묻었다.
진한 피로감이 몰려드는 것이 느껴진다.
대부분이 육체가 아닌 정신에 쌓인 피로, 허나 그것과는 별개로 쉽게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럴 수밖에.’
그에게 있어 오늘 하루는 그야말로 폭풍과도 같았기에.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그렇게도 많았던 건지.’
웨펀 마스터.
길리언 펄슨과의 만남부터 시작하여 왕녀의 난데없는 고백, 그리고 앨런 페이지의 제안에 이르기까지.
조용히 눈을 감은 러셀이 앨런과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한번 회상했다.
“그 내기를 슬슬 끝냈으면 합니다.”
그와 자신 사이에 얽힌 내기라고 해봐야 단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내기의 기한은 아직도 4년이 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내기를 끝내자는 말은-.
“결착을 지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쐐기라도 박을 요량이었던지, 앨런이 다시 한번 말했다.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는 실눈인지라 감정이 제대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힘이 실린 어조.
그 음성에 러셀이 속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하긴. 슬슬 결착을 지을 때가 되긴 했지.’
내기의 내용은 러셀이 7년 안에 앨런 페이지와 대등한 경지에 올라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기에.
그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꼭 7을 다 채울 필요는 없었다.
대등한 경지에 올라서기만 한다면, 언제든 내기를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러셀이 보기에.
‘지금 나와 앨런 경 사이의 격차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해.’
그야말로 백중지세(伯仲之勢).
아마도 앨런 페이지 역시 자신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슬슬 결착을 짓자고 말해오는 것이고.
물론 러셀이 가지고 있는 마력의 특징을 고려해봤을 때, 단순히 경지를 읽어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허나 그에게도 그간 쌓아 올린 경험과, 그 경험으로부터 기인한 감이라는 것이 있을 터.
“알겠습니다.”
러셀이 고개를 끄덕이자, 앨런이 희미하게 웃었다.
“러셀 경이라면 받아들이실 줄 알았습니다.”
“결착의 방법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러 수련자나 검사와는 달리, 마법사 간에는 실력을 겨루는 방법이 몇 가지나 있었으므로. 러셀의 물음에 앨런이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워 메이지 간에 결착을 내는 방법은, 하나뿐이겠지요.”
“마법 결투.”
그 말이 맞다는 듯 눈을 빛낸 앨런이 고개를 주억인다.
마음만은 이미 임전태세에 들어간 것인지 앨런의 주변으로 투기가 격렬하게 끓어올랐다.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날카롭게 일어난 마력이 러셀에게까지 드리우고.
화아악-.
그에 호응이라도 하듯 러셀 역시 투기를 일으켰다.
파짓, 파지직-.
투기와 투기가 얽혀들며 곳곳에서 불똥이 튀어 오른다.
그런 와중에 먼저 기세를 거둔 쪽은 앨런이었다.
“그럼 두 분 스승님께는 제가 잘 정리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결투 장소 역시…….”
결착을 보자고 말하긴 했으나 그 말이 지금 당장을 의미하지는 않았던바.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 알려주겠다고 했었지.’
러셀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길리언 펄슨 경을 찾아가는 건 결투가 끝난 후라 해도 늦지 않을 터.’
그리 생각한 러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미션]7년 안에 앨런 페이지와 대등한 경지에 올라서기.
[보상]창탑주가 소유한 신대 유물.
최상급 마나석(식용)x1
창을 열어 몇 년째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미션을 확인했고, 얼마 후 있을 앨런 페이지와의 결투를 떠올리며 정좌했다.
두 눈을 감았다.
‘일단은 지금 당면한 문제에 집중하자.’
곧이어 러셀의 의식이 내면 깊은 곳으로 침전했다.
화아악-.
.
.
그로부터 며칠 후.
“웬일로 이 영감이 편지를 다 보냈나 했더니만-.”
부름을 받고 탑주실로 올라간 러셀의 눈에 비친 것은 의문의 편지 봉투 한 장이었다.
“이제 그만 내기를 마무리 짓자고 하는구나.”
파도와 빙산.
겉을 봉하고 있는 실링왁스(封蠟)에 찍힌 인장은 분명한 창탑의 것이었다.
결투의 장소가 적힌 편지 봉투를 받아드는 러셀의 두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그 눈빛을 확인하며 다리아가 낄낄거렸다.
“뭐, 정히 저쪽에서 바란다면…….”
한껏 거들먹거리는 음성으로 러셀을 향해 말했다.
“어디 한 번 어울려 주자꾸나. 막내야.”
창탑주 헤밍웨이 멜빌, 그 영감에게 지고 싶지 않은 것은 다리아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 * *
두 사람의 결투 장소로 선정된 곳은 다름 아닌 콜로세움이었다.
이제는 이름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블레인의 막내 제자와 친선 없는 친선 대결을 벌였던 바로 그 장소.
사실 생각해보면 콜로세움이 결투 장소로 지정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애당초 5써클 워 메이지 두 사람의 전투를 감당할 만한 공간을 찾는 것부터가 쉬운 일은 아니었으므로.
‘아무 곳에서나 전투를 벌였다가 그 피해가 혹여 시가지에까지라도 미치게 된다면…….’
왕도의 일부가 날아가게 될지도 몰랐다. 물론, 두 대마법사가 지켜보고 있는 자리인 만큼 그럴 가능성이 높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혹시 모를 위험부담을 안고 갈 이유는 없겠지.’
우우웅-.
벌 떼가 날아오르는 소성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 마법장벽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츠츠츠츳-.
결투장의 경계를 따라 생겨난 콜로세움이 벽의 형태를 이루며 반구의 형상으로 무대 위를 덮어나가기 시작하고.
“습-.”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러셀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 결투의 입회인은 단 두 사람, 다리아와 헤밍웨이뿐.
그 사실을 내보이기라도 하듯, 콜로세움의 관중석은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관람석이 꽉 차 있던 지난날의 대결 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욱 긴장되는 것은.
아마도 앨런 페이지라는 상대가 그만큼 만만치 않은 상대이기 때문일 터.
천천히 숨을 고르며 러셀이 전신의 근육을 팽팽하게 당겼다.
다섯 개의 써클을 회전시켰다.
화아악-.
희미한 열기가 마나로드를 타고 사지백체로 뻗어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 가운데 러셀이 결투장의 반대편에 선 상대를 확인했다.
‘앨런 경.’
앨런 페이지.
회귀 전에는 천재 중의 천재라고 불리며 뭇 젊은 마법사들의 동경을 받는 이였다.
또래 마법사들은 물론 열 살가량 차이가 나는 마법사들 중에서도 적수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수준이라고 하던가?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장에 자극을 받기라도 한 것인지, 예정된 미래보다 더욱 빠르게 강해진 상태였다.
초인(超人)과의 전투 경험이 있다고 하여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러셀이 투기를 끌어 올렸다.
츠츠츳-.
안과 밖의 경계를 나누는 마력 방벽이 점점 완성되어가고, 마침내 일점으로 모여들며 반구(半球)의 형상이 이뤄지는 순간.
파밧-!
두 명의 마법사가 거의 동시에 신형을 튕겼다.
바닥을 박찼다.
다만, 움직인 방향은 서로 달랐다.
마법사의 정석대로 거리를 벌리기 위해 몸을 날린 앨런과는 달리, 러셀은 스스로의 신형을 가속시키며 앨런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파바밧!
마법사라기보다는 기사나 검사와도 같은 몸놀림!
맹수의 진격과도 같은 몸놀림을 응시하던 앨런의 손끝이 파란빛으로 물들었다.
츠츠츠츳-.
창탑의 장기는 수(水) 속성 마력과, 그것을 기반으로 변형시킨 빙(氷) 속성의 마법.
둘 모두 순간적인 화력에 있어선 염탑의 화(火)와 뇌(雷)에 밀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허나 단점이 있으면 장점 또한 있는 법. 화력에선 밀릴지라도, 캐스팅 속도나 마법의 연계에서만큼은 화 속성 마법 보다 수 속성 마법이 한 수 위였던 바!
“아이씨클 레인(Icicle Rain)-.”
쩌적, 쩌저적-.
시동어와 함께 러셀 전방의 공기가 통째로 얼어붙었다.
수십 발에 달하는 고드름들이 전방을 빼곡하게 채우며 그 그림자를 러셀에게까지 드리웠다.
이 속도 그대로 달려든다면 분명 저 얼음 대못에 꿰뚫려 만신창이가 될 것인즉.
파밧-!
허나 러셀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
순간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화끈한 열기, 도리어 놀란 쪽은 앨런이었다.
‘-언제?’
고드름에 대항하기라도 하듯, 비슷한 개수의 파이어 볼트가 자신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상급 화염 속성 이해도를 기반으로 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의 마법 전개.
‘과연 러셀 경!’
설마 수 속성 마법의 발현 속도를 따라올 줄이야!
퍼버버벙!
서로 충돌하며 폭죽처럼 터져나가는 불과 얼음의 윤무에 앨런이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폭음과 함께 증발한 수분이 수증기가 되며 자욱하게 앞을 뒤덮고,
그러는 와중에도 두 명의 마법사들은 차근차근 다음 수를 쏟아낼 준비를 늦추지 않았다.
화아악!
장내를 자욱하게 뒤덮은 수증기를 가르고 나오며 러셀이 빠르게 다섯 손가락을 튕겨냈다.
적뢰(赤雷), 성질 변화와 형상 변환을 동시에 사용해 만들어낸, 오로지 불꽃으로 이루어진 벼락이었다.
같은 5써클의 마법사라 할지라도, 불과 벼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절대로 구현해 낼 수 없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마법.
손가락을 타고 뿜어진 다섯 줄기의 불벼락이 순식간에 일대를 뒤덮는다.
콰과과과과!
그 열기와 폭발에 주변을 자욱하게 뒤덮었던 수증기가 단박에 날아가고, 까맣게 그을린 지면에서부터 매캐한 냄새가 올라왔다.
하지만, 앨런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난 지 오래라.
‘절대로 거리를 주지 않겠다는 건가…….’
하기야 자신이 유별난 놈일 뿐, 마법사 간의 전투에 있어 거리를 잡는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였으니.
비슷한 상황이라면 자신이라고 해도 같은 판단을 했을 터.
‘그렇다면…….’
빠르게 전략을 바꾼 러셀이 단숨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다섯 개의 원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발끝을 따라 방출되더니 지면을 넘어 그 속에 깃든 지축까지도 마구잡이로 비틀며 흔들어낸다.
‘어스퀘이크(Earthquake)-!’
마법의 발현과 함께 대지가 격랑 치듯 출렁이며 갈라졌다.
혹여 결투장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강맹한 위력이라!
이렇게 대지가 흔들리고 뒤틀리는 와중이라면 제아무리 앨런이라고 해도 거리를 벌리기는 쉽지 않겠지.
그게 아니라면 허공으로 뛰어오르거나 날아올라야 할 테고.
그 틈을 노려 요격하기 위해 러셀이 다음 마법을 캐스팅했다.
‘게이볼…….’
일격으로 최대치의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강력한 한 발!
하지만, 쩌적, 쩌저적-!
이어진 앨런의 대처는 러셀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이스-.”
시동어와 함께 앨런의 몸을 따라 흘러나온 혹한(酷寒)의 마나가-
“에이지.”
-쪼개지고 어긋나던 결투장 전체를 뒤덮었다.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