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Slayer Sword Demon RAW novel - Chapter 105
▣ 105화. 하늘에 서겠다 (4)
나는 눈 덮인 설원 위에 있었다.
“여긴 또 어디야?”
순간, 내가 그동안 꿈을 꾸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림에서 검마 이서원이 겪었던 마지막 혈전이… 이런 설원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카이트 에인헤랴르가 되었던 건 다 꿈이었고, 아직도 나는 그 설원에서 정사 연합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나는 곧바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잘 살펴보니 주위 풍경이 이상했다.
나무 한 그루 없이 끝없는 눈밭만 펼쳐지고 있었다.
“내 마음속 풍경인가.”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고요한 곳이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적군도 아군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나는 오마도천대법으로 드래곤 하트의 마력을 받아들이려 했다.
베리타스투스의 드래곤 하트까지 이용해, 처음 오마도천대법을 만들었던 흉천마가보다 완성도 높은 형태로 대법을 진행했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빠져들게 된 걸까.
“일종의 주화입마인가?”
갑자기 힘을 늘릴 때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이런 식으로 주화입마에 빠진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눈밭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일단 운기조식이라도 해 봐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공을 운용할 수도 없고…….”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의 광경이 바뀐 상태였다.
“……!”
설원이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많은 시체가 쓰러져, 눈밭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건…….”
바로 깨달았다.
여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내가 이끌던 천룡회의 사람들이다.
“…….”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바로 현경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이런 공간에 빠진 이유를 알 듯했다.
“그래, 이게 내 마음에 남아 있었나.”
이미 나는 검마 이서원 시절에 현경에 도달했다.
그렇기에 내공만 충분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현경에 진입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곳에 떨어졌다는 건… 처음 현경에 도달했을 때하고는 마음에 뭔가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다.
“육체를 조화롭게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한 화경과는 달리, 현경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게 중요하지. 그래서 이렇게 된 건가.”
“그런 것이죠, 회주님.”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 혼잣말을 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새카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냉담한 눈빛의 여자.
화사함과는 거리가 먼 흑의(黑衣) 차림의 모습이, 내 영혼 구석에 있던 그녀의 기억을 되살렸다.
“총관?”
“네, 회주님.”
그녀는 천룡회에서 나를 보좌해 주던 총관이었다.
원래 흉천마가에서 ‘천마의 배필’로 삼기 위해 키우고 있던 소녀였으나, 내가 흉천마가를 멸망시킨 뒤 흑사련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흑사련을 탈퇴해 방랑하고 있자, 어느새 그녀도 흑사련을 나와서 나를 따라다니게 되었다.
‘오갈 곳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녀를 내칠 수도 없고, 마침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서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결국 그녀를 받아들여 총관 역할을 시켰다.
천마의 배필이 되기 위해 교육받은 여자라서, 두뇌 하나만큼은 매우 우수했으니까.
“총관,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니, 왜 너만 살아서 내 앞에 나타난 거지?”
“그건 회주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곳은 회주님의 마음속 공간입니다.”
“으음…….”
그러고 보니 그녀가 죽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 결전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만있자, 그러고 보면… 네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가능성도 있는 건가?”
“그건 저도 모르죠.”
“죽기 전에 김사운과 왕천호에게 물어볼 걸 그랬군…….”
무림맹주와 흑사련주에게 마지막 확인을 해 보지 않은 게 아쉬웠다.
“총관.”
“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글쎄요.”
나는 그녀와 함께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이 내 마음속 세계라면, 그녀가 나타난 것에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총관, 나는 한 번 실패했어.”
“네, 참혹한 실패였죠.”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었을 뿐이야. 정파에도 사파에도 구애받지 않고 말이지.”
그렇게 살다 보니… 정파에서도 사파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던 사람들이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자유를 추구하고 싶었지만… 세상은 용납해 주지 않았다.
“지금도 그 마음은 마찬가지야.”
“회주님.”
그녀가 내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로 자유로워지는 걸 원한다면, 모든 걸 털어 버리고 산속에 틀어박히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
“자연으로 돌아가 은거하는 게 가장 자유로운 거라 생각하는데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걷기 시작했다.
시체들로 뒤덮인 눈밭을 걸어가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는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니야, 총관.”
“그럼 어떤 겁니까?”
“글쎄…….”
“결국 회주님도 정확히 모르시는 거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도대체…….”
“그래도.”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 광경을 계속 둘러보고 있으니, 확실해진 게 하나 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건 결코 자유로운 게 아니지.”
그렇다.
이런 것에 속박되어 있는 시점에서, 그건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나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총관.”
“네.”
나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벌어지지 않을 거다.”
“어째서죠?”
“내가 더 강해지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
주위의 시체들을 둘러봤다.
나를 따르다가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또 이런 일이 생기는 걸 막으려면, 내가 더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천룡회가 괴멸된 건, 무림맹과 흑사련이 나를 우습게 봤기 때문이다.”
“우습게 보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연합해서 덤빈 것 아닙니까?”
“아니, 정말로 나를 두려워했다면 아예 덤벼들지 않았겠지.”
“…….”
“내가 조금 더 강했다면…….”
무림맹주 김사운과 흑사련주 왕천호.
그놈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백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상황이어도, 놈들은 나를 두려워해 덤벼들지 못했을 거다.”
“비현실적인 얘기를 하시는군요.”
“비유다, 비유.”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더 강해져야 한다, 총관.”
“회주님…….”
“용공작이든, 에인션트 드래곤이든… 누구든 나를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강해져야만 해. 내 주변 사람들까지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녀가 의문을 제기했다.
“용공작 중에서도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인물이 있는 것 같고, 에인션트 드래곤은 그들보다 더 강할 텐데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갈 길이 먼 거지.”
“너무 멀군요.”
“그래, 하지만…….”
나는 뒤돌아봤다.
그리고 눈밭 위에 찍힌 발자국에 시선을 향했다.
“나는 계속 걸어갈 거다.”
“…….”
발자국은 일직선이 아니었다.
흔들리기도 하고, 틀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걸어서, 걷고 걸어서… 하늘에 도달하고 말겠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용처럼, 자유롭게 살기 위해.
“그것은 오만한 생각입니다, 회주님.”
그녀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존재를… 마교에서는 천마라 불렀죠.”
“…….”
천마.
그것은 마교에서 추구하던 절대적 존재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하늘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주인 마라(魔羅)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러니까… 내가 추구하는 천룡(天龍)의 경지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회주님은 천마가 되고 싶으신 겁니까?”
“천마든, 천룡이든,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아.”
나는 손에 힘을 주었다.
어느새 내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내가 정점에 서겠다.”
“…….”
“하늘 높은 곳에 서서…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될 거다, 총관.”
검을 든 채 앞으로 나아간다.
시체의 산을 넘어… 차갑디차가운 눈밭을 넘어.
저 너머, 나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그것을… 조금 더 일찍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
배후에서 들려온 나지막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순간.
갑자기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설원이 조각조각 깨져 나갔고, 그 조각이 눈보라처럼 휘몰아쳤다.
“총관…….”
그녀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눈보라에 휩싸여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니, 아예 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
나는 눈보라 속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지켜봐라, 총관.”
계속 내 뒷모습을 지켜봐 줬던 천마의 배필에게, 결의를 담아 말했다.
“내가 정점에 선다.”
* * *
“크윽!”
“커헉!”
푸른 옷을 입은 남자와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쓰러졌다.
그들은 이그니카와 루살카의 사형제(師兄弟)였던 슈벤과 휴이엔이었다.
카이트의 직속 부하가 되지 않고 감찰기사본부에서 청소나 빨래 등을 하며 살고 있었는데, 이그니카와 루살카를 쓰러뜨린 용공작이 쳐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뛰쳐나왔다.
하지만 결국… 용공작 파르피온의 마권(魔拳)에 쓰러지고 말았다.
“큭, 어, 어떻게 이런…….”
“슈, 슈벤 형님, 이젠 서클이 완전히…….”
파르피온은 상대방의 서클을 파괴하는 정체불명의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마력을 체내에 침투시키는 것 같았는데, 아무도 막아 내지 못했다.
애초에 파르피온의 체술 자체가 워낙 압도적이어서, 8서클의 실력자들도 다들 상대가 되지 못했다.
“머, 멈춰라!”
“더 이상은 안 된다!”
하지만 기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소드 엑스퍼트조차 되지 못하는 젊은 기사들조차 입구를 막고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내가 분명 경고를 했건만…….”
“큭, 내가 상대하겠다!”
어윈이 미숙한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하면서 달려들자, 파르피온이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이제 그만하도록.”
쿠쿠쿵!
닿지도 않았다.
파르피온이 팔을 휘두른 순간, 격렬한 충격파가 발생하여 모든 기사를 날려 버렸다.
“큭!”
“커헉……!”
이곳저곳으로 날아간 기사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결국 피를 흘리게 만드는군…….”
“머, 멈춰…….”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파르피온의 발목을, 모르트가 팔을 뻗어 붙잡았다.
“카, 카이트 님에게는, 못 간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건가…….”
파르피온이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모르트를 향해 천천히 주먹을 치켜들었다.
“파르피온.”
바로 그때.
용공작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3층에서 묘한 기척이 느껴진다. 카이트가 그곳에 있는 것 같군.”
“하겐 공,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그냥 그곳으로 직행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쿵!
파르피온이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모르트가 다리를 붙잡고 있던 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서.
“아, 안 돼……!”
창문을 부수고 3층에 진입하는 파르피온을 보고 기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파르피온을 막으러 건물 안으로 달려갈 수도 없었다.
“유르카스.”
“네, 하겐 공.”
“기사들을 처리해라.”
“알겠습니다.”
젊은 청년 같은 외모를 지닌 용공작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마치 나무를 베는 톱처럼 삐죽삐죽한 대검이 들려 있었다.
“얌전히 카이트를 내놨으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 텐데… 결국 다 죽게 생겼군.”
“……!”
파르피온과는 달리 대놓고 살기를 드러내며 다가오는 용공작의 모습에, 모든 기사가 전율했다.
* * *
“거기인가.”
“……!”
갑자기 창문을 뚫고 들어온 용공작을 보고, 이바르는 숨을 삼켰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것 같군. 그곳에 카이트 공자가 있는 거겠지.”
“머, 멈춰!”
이바르는 다급히 제지하려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용공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용기는 가상하나…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몸으로 나를 막으려 하다니, 헛된 짓이오.”
“아, 아무리 그래도……!”
쓰러지지 않도록 문에 등을 기댄 뒤, 지팡이를 검처럼 치켜들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 줘야 했다.
“흐읍……!”
이바르는 눈을 부릅떴다.
단전에 힘을 주면서, 전력을 다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이것 참…….”
퍽.
지팡이는 용공작의 손에 막혔다.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과자처럼 부스러지는 게 보였다.
“정말로… 헛된 발악을 하는군.”
“……!”
일격에 죽을 것이다.
그걸 직감하면서도, 이바르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커다란 손이 이바르를 향해…….
“아니, 조금도 헛되지 않다.”
퍼억!
문을 뚫고, 이바르의 어깨 너머로 뻗어 나온 칼날.
그것이 용공작의 커다란 주먹에 꽂혔다.
“카…….”
이바르는 몸을 떨었다.
어느새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이트 형님……!”
일주일 동안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의 카이트 에인헤랴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격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