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Slayer Sword Demon RAW novel - Chapter 144
▣ 144화. 영구동토 (2)
악룡 파프니르가 갑자기 나타났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파프니르는 실체가 아닌 것 같았다.
예전에 하겐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환영을 이곳으로 보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파프니르의 본체는 아주 먼 곳에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단지 환영만으로도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 환영만으로도 이 일대를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것이 에인션트 드래곤인가.
처음으로 만난 고대룡(古代龍) 앞에서 나는 경외심을 느꼈다.
“파프니르…….”
“그렇다, 카이트 에인헤랴르.”
파프니르가 흡족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만난 것을 영광으로 여겨라, 에인헤랴르의 어린 기사여.”
“여기는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너희들에게 해 줄 말이 있어서다. 하지만 네가 이렇게 나와 줬으니… 지금 바로 얘기해 주면 되겠군.”
그 직후.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땅이 갈라지고 부서졌다.
마치 조각용 칼로 긁어낸 것처럼… 복잡한 모양이 만들어졌다.
“너희에게 지도를 주겠다.”
“……!”
그 말을 듣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땅바닥에는 입체적인 지도가 출현한 상태였다.
“이 지도 끝에 위치한 것이… 내 궁전이다.”
“궁전이라고?”
“그렇다. 나는 그곳에 있다.”
파프니르가 거대한 앞다리를 움직여, 험준한 산 속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실제 축척이 반영된 거라면 어마어마하게 큰 건물이었다.
“이곳으로 와라.”
“무슨 생각인 거지?”
“나는 너희들과의 정면 대결을 원한다.”
파프니르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무시무시한 이빨이 드러났다.
설마 저게 웃는 표정인 걸까.
“다른 어떤 파벌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녹색의 니드호그한테도 끼어들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
니드호그한테 끼어들지 말라고 했다고?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너희들의 진격로에는 내 부하들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제는 내 부하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말이다.”
“파프니르…….”
“인룡대전(人龍大戰)의 때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파프니르가 몸을 떨었다.
아니…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사생결단이다, 에인헤랴르여. 오랜 악연에… 종지부를 찍자.”
* * *
파프니르는 자기 할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내 앞에 나타났던 파프니르의 환영은 검은 아지랑이로 변했고, 어둠 속에 완전히 흩어져 버렸다.
남은 것은 땅바닥에 새겨진 지도뿐이었다.
“카이트 님, 파프니르가 해 준 얘기는 그게 전부입니까?”
“네, 이걸로 끝입니다, 에리크 경.”
“크흠…….”
도시 중앙에 마련된 임시 사령부에서 나는 파프니르와의 대화를 전했다.
운기조식이 아직 끝나지 않은 니얼이나 이바르는 동석하지 못했지만, 시구르드와 에리크, 아나스타샤, 모리안 등은 자리에 있었다.
“일단… 지도는 정확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탁자 위에는 아나스타샤가 마법으로 재현한 지도가 표시되고 있었다.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과거의 기록, 그리고 이 도시에서 발견된 여러 자료들과 대조해 봐도 가짜 지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나스타샤 님, 그러면 정말로 이 지도를 따라 움직이면 파프니르의 본거지에 도달할 수 있는 건가요?”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모리안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아나스타샤가 눈썹을 찌푸렸다.
“다만 지도가 정확하다고 해서, 이게 함정이 아니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아…….”
“복병 같은 걸 배치해 놨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나스타샤가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카이트 님, 파프니르는 정말로 우리들의 진격로에 자기 부하들밖에 없을 거라고 말했나요?”
“그래, 부하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였지.”
“그것을 얼마나 신용할 수 있을지, 우리는 고민을 해 봐야 합니다.”
파프니르는 우리가 어떤 경로를 통해 진군할지 예상할 수 있다.
복병을 배치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파프니르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우리 예상보다 많다면… 위험하군요.”
에리크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하겐이나 엘드리트 같은 용공작들도 죽었고, 드래곤들도 최근 숫자가 많이 줄었으니 파프니르 파벌 자체는 약체화되었겠지만… 문제는 다른 파벌이 협력해 줄 경우입니다.”
“에리크 경, 다른 파벌이 파프니르에게 협력해 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십니까?”
“원래 서로 다른 파벌끼리 협력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영구동토를 침범하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모리안의 질문에 에리크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에인션트 드래곤들이 합심해서 우리를 공격하면, 솔직히 당해 내기 어려울 겁니다.”
“으음, 확실히 위험하겠군요.”
모리안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요.”
“글쎄요. 솔직히 여기서 퇴각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네? 퇴각이요?”
“우리는 영구동토의 정보가 부족합니다. 포로로 잡은 용귀족한테서도 별다른 정보를 얻어 내지 못했고, 앞으로 어떤 놈들과 싸우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죠.”
에리크가 지도를 응시하며 말했다.
“일단 설원지대로 후퇴한 뒤 후일을 기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가요…….”
그런 대화가 나오고 있었을 때.
침묵하고 있던 시구르드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물러나지는 않는다.”
“대공 전하…….”
“에리크, 우리는 용살검가 에인헤랴르다.”
시구르드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물러나면 에인헤랴르의 존재 의의가 없어진다.”
“대공 전하, 그래도…….”
“복병을 숨겨 놓고 있든, 다른 에인션트 드래곤이 공격해 오든… 격퇴하면 그만이다.”
“……!”
숨을 삼키는 에리크를 내버려 둔 채, 시구르드가 나한테 시선을 향했다.
“카이트,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버지.”
내가 주저 없이 대답하는 걸 보고, 에리크와 모리안 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이트 님, 어째서…….”
“이건 어디까지나 제 느낌입니다만.”
나는 지도를 응시하며 말했다.
“파프니르는 진지하게 저희와의 결전을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네?”
“예전부터 파프니르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집착해 왔습니다. 그동안 하겐을 시켜서 저를 공격한 것도 제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자질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죠.”
“…….”
“파프니르는 이제 슬슬 직접 저를 상대하고 싶어졌을 겁니다. 다만 에인션트 드래곤이 직접 나와서 싸움을 걸 수는 없으니, 저희를 자기 본거지에 초대한 거죠.”
이 지도는 말하자면 초대장이다.
이렇게 오면 자기 집에 올 수 있다고 알려 주는 것이다.
“파프니르에게도 에인헤랴르 가문은 오랜 숙적입니다. 에인헤랴르 대공인 아버지까지 나타났는데… 다른 파벌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을 겁니다.”
“대공 전하와 카이트 님이라는 중요한 표적이 있으니, 다른 파벌을 끌어들이지 않고 직접 상대하고 싶어 할 거란 말씀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크흠…….”
에리크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 시구르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카이트의 말이 맞다.”
“대공 전하…….”
“파프니르는 탐욕스러운 드래곤이다. 나와 카이트라는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다른 에인션트 드래곤들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겠지.”
“머, 먹음직스럽다니요.”
“니드호그에게 끼어들지 말라고 요구했다는 것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시구르드가 창문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놈이 ‘다른 어떤 파벌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언한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어쩌면 다른 파벌들은 우리들의 싸움에 관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걸지도 모른다.”
“네? 어떻게…….”
“삼림지대에도 다른 파벌의 드래곤이나 용귀족들이 없었다. 이 도시도 텅텅 비어 있지. 놈들이 대대적으로 자리를 비워야 하는 모종의 상황이 발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대대적인 동면에 들어갔다든가, 새로운 곳으로 이주했다든가, 여기서 먼 곳에서 내전을 벌이고 있다든가.
“물론, 이 모든 것이 놈들의 대대적인 작전일 수도 있다. 모든 에인션트 드래곤이 합심해서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현실성이 없는 얘기입니다.”
“그렇다, 카이트.”
내 말에 시구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인션트 드래곤들은 그렇게 움직이는 놈들이 아니다. 지금이 인룡대전의 때라고 해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파프니르의 말대로 다른 에인션트 드래곤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움직이는 게 낫겠군요.”
“그렇지. 그러니까…….”
시구르드가 지도에 표시된 파프니르의 본거지를 응시했다.
“우리는 파프니르의 도전을 받아들여 줘야 한다.”
“…….”
“에인션트 드래곤은 일반 드래곤 이상으로 오만한 존재다. 직접 우리를 찾아와 자기 본거지로 초대까지 했다는 건, 놈이 여전히 우리를 얕보고 있다는 증거다.”
맞는 말이다.
파프니르는 우리를 호적수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를 얕보고 있다.
이건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이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시구르드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악룡 파프니르와의 결전을 치를 것이다.”
* * *
우리는 진군을 시작했다.
도시의 지하 창고에서 용귀족들의 보존식이 대량으로 발견됐기 때문에 보급 문제도 해결되었다.
내 부하들도 운기조식을 마쳤고, 결전을 위한 준비가 다 끝난 상태였다.
“파프니르의 지도를 참고해서 움직이면, 우리는 나흘 뒤에 이쪽 관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에리크가 종이에 옮긴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파프니르의 본거지에 도착하려면 두 갈래의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진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지의 입구에는 거대한 관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곳을 통과해야 합니다.”
“드래곤들이 그런 방어 시설을 설치했을 리는 없고, 용귀족이 만들었겠군.”
“네, 파프니르의 지배 영역을 지키겠다고 자진해서 만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놈이라면 충성심이 매우 강하겠군.”
시구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트.”
“네, 아버지.”
“아군의 진격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만한 방어 시설이다. 저걸 돌파하면 우리는 파프니르의 지배 영역에 진입할 수 있겠지.”
내 얼굴을 쳐다보며 시구르드가 말했다.
“어느 정도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파프니르에게 충성을 바치는 고위 용귀족이 지키고 있을 것이다.”
“…….”
“네가 선봉장이다. 돌파해 보도록 해라.”
시구르드의 명령에,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좋다.”
냉정한 표정을 유지한 채 시구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에리크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측면과 후방을 경계하겠지만, 네 힘으로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즉각 도울 것이다.”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부하들만으로 함락시켜 보겠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군.”
고개를 끄덕이다가 시구르드가 시선을 돌렸다.
내 부하들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러고 보니 부하들에게 특별한 수련을 시키고 있는 것 같던데.”
“네, 맞습니다.”
“너한테 스승의 자질까지 있을 줄은 예상 못 했다.”
“제가 깨달은 것들을 전수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군.”
시구르드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보여 주도록 해라. 네 자신의 실력과, 네가 육성한 부하들의 실력을.”
“그렇게 하겠습니다.”
북쪽으로 시선을 향하니, 무시무시한 위용의 산맥들이 보였다.
이제 곧 저 사이로 들어가… 파프니르의 본거지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이다.
에인션트 드래곤과 처음으로 대결할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