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Slayer Sword Demon RAW novel - Chapter 147
▣ 147화. 악룡의 궁전 (2)
새벽녘.
불침번을 서고 있던 당번 기사는, 어둠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잘못 봤나 생각하고 눈을 비볐지만, 역시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
나이트 비전으로 확인해 봤다.
악룡 파프니르의 궁전 주위를 해자처럼 둘러싸고 있는 절벽 아래에서…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저것은……!”
그 정체를 깨닫고, 당번 기사는 다급히 신호를 전하기 위한 나팔을 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절벽에서는 끊임없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파프니르의 궁전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병사들이.
* * *
“저것이 무엇으로 보이나, 에리크.”
“아무래도…….”
시구르드의 질문을 듣고, 에리크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파프니르의 궁전 주위는, 지금 북적북적한 상태였다.
“용아병이군요. 에인션트 드래곤의 힘으로 깨운 듯합니다.”
절벽에서 기어 나온 건 무수히 많은 해골이었다.
예전부터 드래곤들이 소환하던 해골 병사, 용아병이다.
“아마 절벽 밑에 무수히 많은 해골이 떨어져 있었을 겁니다. 파프니르가 그걸 깨워서 최후의 방어 병력으로 삼은 거겠죠.”
“그랬던 거군.”
파프니르의 궁전 주위는 충분히 정찰했다.
하지만 설마 절벽 아래에 병력이 숨겨져 있었을 줄은 몰랐다.
절벽 아래를 들여다봤다고 해도, 바닥에 깔려 있는 해골들만 보였을 테니 이 사태를 예상할 수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과거에 파프니르를 토벌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인간들의 유골일지도 모르겠군.”
해골 병사들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
머릿수만 따지면 에인헤랴르 측보다 더 많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드래곤이나 드레이크 같은 대형 개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공 전하, 해골 병사들을 돌파하여 궁전에 돌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지.”
일반 기사들이 해골 병사들을 상대하는 동안, 시구르드를 중심으로 한 정예부대가 궁전으로 돌입하여 파프니르와 싸운다.
이게 가장 현실적인 작전일 것이다.
“파프니르가 궁전 바깥으로 나와 준다면 좋겠지만… 그러지는 않을 것 같군.”
“궁전 깊숙한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죠.”
궁전 내부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른 경비 병력이 배치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파프니르라는 최강이자 최악의 적이 대기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시구르드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새벽에 갑자기 나타난 해골 병사들 때문에 흑룡기사단과 백룡기사단의 주요 간부들은 다 집결해 있는 상태였다.
“카이트는 어디 있지?”
“네?”
에리크도 주위를 살폈지만, 카이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변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눈치채고 움직였을 사람인데, 좀 이상한 일이었다.
“혹시 혼자서 정찰을 나가신 걸까요?”
아무리 살펴봐도 카이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아버지, 아니 대공 전하!”
그때 이바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알려 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냐.”
“그것이…….”
이바르가 주위를 살핀 뒤,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카이트 형님이…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네?!”
“…….”
그 말을 들은 에리크는 눈을 크게 떴고, 시구르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결전을 앞두고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 * *
“카이트 님을 저렇게 내버려 둬도 되는 겁니까? 깨워야 되는 게 아닌지…….”
“안 됩니다, 모리안 공녀님.”
모리안의 말에 니얼이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 카이트 공자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운기조식 중에 함부로 건드리면 주화입마라는 것에 빠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주, 주화입마요?”
“자칫하면 무공을 잃고…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고 하더군요.”
“……!”
숨을 삼키는 모리안 옆에서, 아나스타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카이트 님이 눈을 뜰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
니얼은 입술을 깨문 채 방 안을 들여다봤다.
지금 카이트는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아까 니얼이 방문을 열었을 때부터 저런 상태였다.
“이제 곧 파프니르와의 결전이 시작되는데, 카이트 님이 이런 상태가 되다니…….”
항상 냉정하던 아나스타샤조차 표정이 어두웠다.
아군의 최고 전력 중 하나인 카이트가 이렇게 되어 버렸다는 건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지금까지도… 이랬던 적이 있긴 합니다.”
니얼이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얼스터 지방에 아카샤니그두가 쳐들어왔을 때도, 감찰기사대 본부에 용공작들이 몰려왔을 때도, 카이트 공자님은 한동안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되었죠.”
“니얼 경, 하지만 그때는…….”
“네, 그때는 저희한테 기다려 달라고 말을 하고 칩거했던 거였죠.”
그동안 카이트는 미리 언질을 해 줬다.
며칠 정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없이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카이트 공자님이 언제 깨어나실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긴 합니다.”
“그렇다면…….”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잠시 후퇴하고 싶습니다.”
“카이트 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리자는 말인가요?”
“네, 솔직히 카이트 공자님 없이 파프니르와 싸운다는 건 자살행위라 생각합니다.”
니얼은 주저 없이 단언했다.
“시구르드 전하와 에리크 경이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니얼 경…….”
“우리가 에인션트 드래곤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카이트 공자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게 말한 뒤, 니얼은 다시 방안을 들여다봤다.
카이트는 여전히 가부좌를 튼 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평소보다 표정이 훨씬 심각했고… 이마에서 한 줄기 땀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
니얼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카이트의 상태가 괜찮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이대로 카이트 공자님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후퇴하고 싶군요.”
“그래도 되는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운기조식 중인 사람을 억지로 들고 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어서…….”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한숨을 쉬고 있었을 때.
시구르드에게 갔던 이바르가 돌아왔다.
“이바르 공자님, 대공 전하는 뭐라고 하십니까?”
“그게…….”
이바르가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카이트 형님이 깨어나지 않더라도, 오늘 공격을 강행한다고 하시더군요.”
“네?!”
니얼이 눈을 크게 떴다. 모리안과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였다.
“카이트 님 없이 공격을 강행한다고요?”
“너무 무모한 것 같습니다만.”
“아버지의 결정입니다.”
이바르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여기서 우리가 꽁무니를 뺀다면 파프니르가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군요.”
“……!”
그 말을 듣고 니얼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군요. 지금 파프니르는 우리와의 결전을 기대하여 판을 만들어 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도망친다면…….”
“분노한 파프니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복하려 할지도 모르겠군요.”
파프니르가 모든 군단을 이끌고 추격해 올 수도 있다.
그러면 후퇴하는 게 더 불리하다.
만약 파프니르가 다른 에인션트 드래곤에게 협력을 요청하기라도 하면… 그때는 정말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현재 파프니르는 우리와의 결전을 기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게 아버지의 말씀이셨습니다.”
지금은 파프니르가 에인헤랴르를 자기 앞마당까지 초대한 상태다.
에인헤랴르에게 유리한 조건이고, 앞으로 이런 기회가 또 생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정말 답답한 상황이군요.”
“니얼 경…….”
“제가 여기까지 온 건, 카이트 공자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카이트 공자님과 함께라면 에인션트 드래곤을 쓰러뜨린 뒤 무사히 귀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
모리안과 아나스타샤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들도 니얼과 비슷한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에인헤랴르 소속도 아니면서 이런 곳까지 따라온 건 전적으로 카이트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물러나시겠습니까?”
이바르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후퇴하셔도 에인헤랴르는 여러분을 비난하지 않을 겁니다.”
“…누가 그런다고 했습니까.”
니얼이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물러서면 카이트 공자님은 어떻게 합니까.”
“니얼 경…….”
“카이트 공자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그 곁을 지키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니얼은 방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는 여기서 카이트 공자님을 지키면서 대기하겠습니다. 카이트 공자님의 말에 의하면, 원래 운기조식 중에는 이렇게 호법을 서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다더군요.”
“알겠습니다.”
이바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니얼 경이 지켜주신다면 저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카이트 형님을 잘 부탁합니다.”
“네, 이바르 공자님.”
“그러면 저는 감찰기사대 지휘를 해야 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카이트가 없을 때는 이바르가 지휘를 맡기로 되어 있다.
그러니 이바르는 니얼에게 뒷일을 맡긴 채 출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카이트 공자님, 저는 당신을 믿겠습니다.”
니얼은 평소보다 훨씬 감정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반드시 깨어나셔서… 파프니르를 쓰러뜨려 주실 거라고 말입니다.”
* * *
“또 여기야?”
나는 눈 덮인 설원에 있었다.
몬스터나 용귀족들과 싸우던 이쪽 세계의 설원지대는 아니다.
무림에서 검마 이서원이 마지막 싸움을 치렀던 설원이었다.
주위에는 천룡회 사람들의 사체까지 쓰러져 있었다.
“이 광경에서 극복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갑자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좀 기척이라도 내고 말을 걸어라. 깜짝 놀랐으니까.”
어느새 배후에는 새카만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성이 서 있었다.
“이곳은 회주님의 심상 풍경이니, 제 탓을 하면 안 됩니다.”
“후우… 알겠다, 총관.”
천룡회에서 총관 자리에 앉아 나를 보좌해 줬던 여성.
원래는 흉천마가 출신이었던 그녀가 이번에도 나를 맞이해 주었다.
“총관,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글쎄요.”
총관은 차갑게 대꾸했다.
“또 이런 광경이 벌어질 거라 생각하신 거 아닙니까?”
“…….”
그러고 보니 용공작들을 맞이할 때도 이런 광경을 봤었다.
그때는 나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서 이 광경을 다시 보게 된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에인헤랴르의 기사들이 파프니르에게 전멸할 거라고 예상하신 거겠죠.”
“…….”
“아닙니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맞다.”
설원에 쓰러져 있는 천룡회 사람들이, 어느새 에인헤랴르의 기사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겐이 넘겨준 비전서 때문이지.”
하겐의 구슬에는 비전서의 ‘내용’이 저장되어 있었다.
마력을 주입하니 저절로 내 머릿속에 그 내용이 주입되었다.
그 덕분에 일일이 책장을 넘기며 오랫동안 곱씹지 않아도 그 내용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너무 막대한 지식이 머릿속에 주입된 탓인지… 주화입마에 빠질 것 같아 다급히 운기조식을 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운기조식 중에 이런 공간에 빠져 버린 것이다.
“비전서의 내용을 파악하니, 에인션트 드래곤이 어떤 존재인지도 이해가 됐어.”
“…….”
“에인션트 드래곤은 에테르를 지닌 존재야. 그 자체가 신화병장이라고 할 수 있지.”
먼 옛날, 이쪽 세계에는 에테르가 충만했다.
그 시기에 만들어진 신화병장은 에테르를 내포하고 있다.
에인션트 드래곤도 그 시기에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체내에 에테르를 보유하고 있다.
“에인션트 드래곤은 신화의 영역에 도달한 존재야. 신화경이라 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현경에 불과한 회주님 실력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겠군요.”
총관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주님은 신화병장에 담겨 있는 에테르를 끌어다 쓸 뿐입니다. 체내에 막대한 양의 에테르를 보유하고 있는 에인션트 드래곤을 상대로 승리하는 건 불가능하겠죠.”
“…….”
“비전서의 내용을 이해했다고 해서 지금 당장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될 수도 없을 겁니다. 애초에 회주님은 소드 마스터도 아니니까요.”
나는 무공을 쓰는 사람이다.
이쪽 세계의 소드 마스터 하고는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에,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될 수는 없다.
“회주님이 아무리 무공 실력이 뛰어나도, 막대한 에테르를 보유하고 있는 에인션트 드래곤을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그래, 불가능하지.”
이게 만약 사람 상대라면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대는 평범한 드래곤이 아니라 훨씬 큰 몸집을 지닌 파프니르다.
“결국 회주님은 패배하고, 에인헤랴르의 기사들은 전멸하겠군요.”
“시구르드가 그람의 능력으로 파프니르의 에테르를 흡수하여 반격하면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 거야.”
“그 승산이 어느 정도일까요?”
“…….”
총관은 부정적인 태도였다.
사실 지금 여기 있는 총관은 내 머릿속에서 재현된 것이기 때문에, 총관의 발언은 전부 내 생각을 반영한 것이리라.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래도… 승산은 있다.”
“네?”
“깨달은 것이 있거든.”
그렇다.
비전서의 내용을 접하면서 에인션트 드래곤이 엄청나게 강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에인션트 드래곤을 상대로 승산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파프니르에게는 약점이 있어.”
“약점?”
“아니, 에인션트 드래곤 전체의 약점이랄까.”
그렇게 말하며, 나는 기억을 되새겼다.
“설원지대에 니드호그의 별궁이 있었지.”
“……?”
“그곳은 인간 크기의 생물을 위한 거였어. 니드호그가 파프니르처럼 거대한 몸집을 지니고 있다면 발가락 하나 집어넣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
“그게 어쨌다는 건가요?”
총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나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 파프니르는 그동안 신화병장을 수집하고 있었지.”
“…….”
“그리고 신화병장에서 에테르만 빼내고 있었어.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에인션트 드래곤은 자기 몸에 막대한 에테르를 지니고 있는 존재인데 말이야.”
나는 계속 중얼대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까지 내가 입수한 단편적 정보들이 서로 이어지면서, 숨겨져 있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답이 있는 거야.”
“회주님…….”
“그렇다면, 나한테도 승산은 있지.”
나는 눈 쌓인 바닥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시간이 별로 없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파프니르와의 싸움에 참가해야 한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새로운 힘이 필요해.”
당장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되는 것도, 신화경에 진입하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그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가능하다.
“에인션트 드래곤인 파프니르를 쓰러뜨릴 수 있는 힘을… 얻어야지.”
파프니르를 쓰러뜨리기 위해.
나는 내 모든 것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