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Slayer Sword Demon RAW novel - Chapter 190
▣ 190화. 신화의 거인들 (2)
쿵, 쿵, 쿵!
땅이 흔들리는 소리에 하늘까지 진동했다.
얼어붙은 영구동토에서 출발하여, 눈 쌓인 설원지대를 지나 거인 군단이 마침내 고틀란드 근처까지 도달했다.
“인간들의 방어선이 있군.”
“그렇군. 저런 빈약한 것들로 우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거인들은 인간들이 구축해 놓은 방어선을 비웃었다.
기존의 요새 등을 활용하여 급조한 방어선 같았는데, 거인들이 발로 한번 걷어차는 것만으로 붕괴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미물들이다.”
“머리가 작아서 지능이 떨어지는 모양이군.”
거인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워낙 몸집이 크다 보니 웃음소리만으로도 천지가 흔들렸다.
“수르트여, 어떻게 할 것인가. 이대로 계속 전진해서 밀어 버릴까?”
“흠…….”
거인족의 수장 역할을 맡고 있는 수르트가 새카만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일단 인사 정도는 해야겠지.”
“인사?”
“자신들이 어떤 존재에게 멸망당하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줘야 되지 않겠나.”
“아, 좋은 생각이군!”
수르트의 말에 다른 거인들이 동조했다.
“한꺼번에 밀어 버리는 것도 재미가 없지 않나?”
“오랜만의 전쟁이다! 최대한 즐겨야지!”
“놈들이 어떻게 저항하는지도 보고 싶군!”
“적을 공격하는 건 빠를수록 좋지만, 적을 전멸시키는 건 느릴수록 좋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는 인간들의 비명 소리를 최대한 오래 듣고 싶네!”
“최대한 놈들에게 무력감을 안겨 주는 방식으로 말이야!”
발걸음을 멈추고 거인들이 의견을 교환했다.
그러던 도중, 마른 체구를 지닌 거인이 수트르에게 다가왔다.
“수르트여! 내가 선봉전에 나설 수 있도록 해 다오!”
“지금 선봉전이라고 했나?”
“놈들의 대표와 한판 붙어 보고 싶으니까!”
“놈들의 대표…….”
수트르는 턱을 쓰다듬은 뒤 미소 지었다.
“나쁘지 않군. 놈들에게 절망을 심어 주기에는 딱 좋지.”
“와하하!”
마른 체구의 거인이 웃음을 터뜨렸고, 다른 거인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쯧쯧,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말을 꺼낼 걸 그랬군.”
“첫 싸움을 빼앗기다니, 아쉽다!”
그렇게 떠들면서 거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인간들의 방어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자욱한 안개 너머에서, 커다란 존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격하는, 아우둠라의 거인들이었다.
“왔군.”
망루 위에서 시구르드가 중얼거렸다.
그 옆에는 시구르드의 오른팔과 왼팔인 에리크와 아그나르가 서 있었다.
“우리 쪽 상황은 어떻지?”
“각자 위치로 이동했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입니다.”
고틀란드 북쪽에 있던 여러 방어 시설들을 연결하여 구축한 방어선에는 에인헤랴르의 다섯 기사단이 집결해 있었다.
광휘창가 피어너의 창기사들, 귀살마가 크레스니크의 마법사들도 각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상태였다.
“…….”
쿵, 쿵, 쿵!
거인들이 가까이 올수록 땅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동안 상대해 온 드래곤들보다 거대한 거인들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세 남자의 표정은 냉정했다.
“왜소한 인간들이여.”
적당한 거리에서 발을 멈춘 거인들 사이에서, 흑색 거인이 앞으로 나왔다.
“나는 거인족의 수장, 수르트라고 한다.”
수르트라고 이름을 밝힌 거인이 방어선을 쓱 훑어봤다.
“우리 거인들을 막기 위해 이렇게 모여서 열심히 방어선을 구축하다니, 참으로 기특하구나.”
기특하다.
인간들을 깔보고 있다는 게 명백히 드러난 발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희들의 저항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제 곧 우리들의 발에 짓밟히게 될 테니까.”
수르트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태초의 거인’ 이미르의 후예로서, 이 땅을 지배할 정당한 권리를 지녔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나 있는 동안 너희들이 세상의 지배자 노릇을 한 모양이지만… 이제는 우리에게 세상을 돌려줄 때가 되었다.”
“그렇다! 미물들은 꺼져라!”
“이 대지(大地)는 우리 이미르의 후예들에게 소유권이 있다!”
다른 거인들이 수르트 옆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얼마나 목소리가 큰지 성벽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얘기는 잘 들었다, 수르트.”
거인들의 목소리가 잦아들 무렵, 시구르드가 입을 열었다.
“나는 시구르드 에인헤랴르… 인류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은 검의 가문을 이끌고 있다.”
시구르드의 냉정한 목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다.
“본래 내 적은 드래곤 세력이었다. 너희 거인 세력과 싸우는 건 상정하지 않고 있었다.”
“흐음, 그래서 싸우지 않겠다는 건가?”
“아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이 북쪽 땅에서 인류를 지키는 검이 되는 것이 우리들의 역할이다.”
수르트를 쏘아보면서, 시구르드가 선언했다.
“너희들이 인류의 영역을 침범하는 건 허용할 수 없다. 이 방어선을 넘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고, 그동안 너희들이 있었던 북쪽 끝으로 돌아가라.”
“…….”
거인들이 잠시 침묵했다.
이렇게 당당한 대답이 돌아올지는 몰랐는지, 당황한 표정을 짓는 거인들이 많았다.
“크흐흐… 참으로 당돌하군.”
하지만 수르트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 작은 몸으로 우리를 막겠다는 건가? 네놈들의 검 따위는 우리에게 이쑤시개조차 되지 못한다.”
“과연 그럴까?”
“물론이지. 허세를 부리지 마라, 인간.”
다른 거인들도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르트의 말에 호응을 보냈다.
“그래, 이렇게 하도록 하지.”
“……?”
수르트가 손짓을 하자, 마른 체구의 거인이 앞으로 나왔다.
“인간들이여, 나의 이름은 흐륌! 자랑스러운 거인족의 선봉장!”
마른 체구라고는 해도 비실해 보이는 느낌은 아니었다.
날카롭게 뻗어 나온 손톱이 섬뜩한 인상을 줬다.
“선봉전을 제안한다! 이 흐륌과 겨룰 수 있는 인간이 있느냐!”
선봉전.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한 사람씩 대표를 내보내서 일대일로 대결을 하자는 것이었다.
“누구라도 좋다! 우리 거인족은 너희 인간들 따위가 넘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려 주마!”
흐륌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 덤벼 봐라!”
“자존심이 있으면 누군가 나오겠지!”
“나서지 못한다면 너희는 겁쟁이지!”
“겁만 많은 미물들!”
“왜소하기 그지없는 미물들!”
거인들이 조롱하는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저희가 응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놈들이 그렇게 지레짐작하는 마음도 이해는 됩니다만.”
에리크와 아그나르의 말을 듣고, 시구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봉전에 응하겠다.”
시구르드의 대답에 거인들이 흠칫했다.
“응하겠다고?”
“예상 밖인데?”
“혹시 저놈이 나오려는 건가?”
몇몇 거인이 시구르드에 주목했다.
하지만 시구르드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카이트, 앞으로 나와라.”
휘릭!
성벽 위에서 지상으로 뛰어내리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는 가볍게 착지한 뒤 흐륌에게 시선을 향했다.
“내 장남인 카이트 에인헤랴르가 대표가 되어 선봉전에 나설 것이다.”
그 순간, 주위에서 커다란 함성이 울려 퍼졌다.
* * *
차가운 바람을 받으며, 홀로 앞으로 나섰다.
내 모습을 보며 흐륌이 피식 웃었다.
“나이가 몇이냐?”
“그게 중요한가?”
“너 같은 애송이를 내보내다니, 인간족들은 머리가 돌아 버린 것 같군.”
흐륌이 관자놀이 주변에서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내가 이래 봬도 자비로운 성격이라서 말이다. 어린아이는 죽이고 싶지 않군.”
“그쪽보다 나이는 적겠지만, 그래도 어린아이라 불릴 나이는 아니다.”
“흐음, 그런가?”
웃으면서 흐륌이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하군. 워낙 작아서 말이야.”
주위 거인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 동족들은 호탕한 성격인 것 같군.”
“크흐흐, 그 부분은 사실이지. 쓸데없이 진지한 신족이나 드래곤들하고는 달리 삶을 즐길 줄 아니까.”
“나쁘지 않군.”
괜히 무게 잡는 놈들보다는 호탕한 놈들이 낫다.
“그러면 슬슬 시작하지, 흐륌.”
“자신만만하군. 정말로 괜찮겠나?”
“배려심을 발휘하러 선봉전에 나선 건가?”
“그것도 그렇군.”
흐륌이 피식 웃으면서 두 팔을 옆으로 벌렸다.
“좋다, 그러면 상대해 주지.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카이트 에인헤랴르.”
“그래, 카이트 에인헤랴르…….”
고개를 끄덕이면서 흐륌이 숨을 들이마셨다.
“네 이름은 내가 오랫동안 기억하도록 하마! 내가 선봉전에 나선 기념으로 말이다!”
흐륌이 숨을 내뱉으면서 나한테 달려들었다.
커다란 산이 나한테로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엄청난 기세군.’
‘그래, 하지만…….’
머릿속에서 들려온 파프니르의 목소리에, 짧게 대꾸했다.
‘확실히 펜리르보다는 못하군.’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으면서, 수라무극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수라청벽검을 사용해 내 몸을 한 줄기 번개처럼 만들었다.
“윽……?!”
콰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솟구쳤다.
잠시 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크아악……!”
흐륌의 오른팔이 땅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전광석화처럼 솟구친 내 검이 흐륌의 오른팔을 절단한 것이다.
“뭐지?!”
“흐륌이 당한 건가?!”
거인들 쪽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당했다는 것이냐……!”
흐륌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왼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나는 수라청벽검을 사용하면서 뛰어올라 그의 왼쪽 팔꿈치에 착지했다.
그 직후, 왼쪽 팔조차 땅에 떨어졌다.
“아니, 어떻게 이런…….”
“흐륌이라고 했었나.”
한 번 더 뛰어올랐다.
두 팔을 잃어 아무것도 못 하게 된 흐륌의 정면에서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미안하지만 나는 네 이름을 별로 오래 기억하지 못할 것 같군.”
촤악!
흐륌의 머리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을 크게 뜬 표정 그대로였다.
“…….”
쿠쿵!
뒤이어 흐륌의 몸이 땅으로 쓰러졌다.
워낙 몸집이 크기 때문에 피도 많이 흘러나왔다.
차가운 땅바닥이 뜨거운 핏물로 젖기 시작했다.
“선봉전은 이걸로 끝난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돌려 거인들을 쳐다봤다.
흐륌이 순식간에 쓰러진 것에 충격을 받았는지, 다들 아무 말도 못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거지?”
“……!”
숨을 삼키는 거인들.
그들 사이에서 인상을 찡그린 채 수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야 생각나는군.”
수르트가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카이트 에인헤랴르… 출발하기 전에 들었던 그 이름인가. 지금까지 완전히 잊고 있었군.”
“기억력이 안 좋은가 보군, 수르트.”
“인간들의 이름 같은 건 굳이 신경 쓰지 않아서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수르트가 손을 까닥였다.
“그냥 다 밀어 버리도록 해라.”
“알겠소!”
“진작 이렇게 할 것을!”
수르트의 명령이 떨어지자, 거인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진격을 시작했다.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거대한 산맥이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것 같았다.
“…….”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나는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망루 위에 서 있는 시구르드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다.”
시구르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일제히 달려들던 거인들에게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