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Slayer Sword Demon RAW novel - Chapter 2
▣ 2화. 달라져야 한다 (1)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아무래도 꿈은 아닌 것 같군.’
탑 꼭대기층의 독방.
딱딱한 침대에서 눈을 뜬 순간, 나는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들이 모조리 현실이었다는 걸 이해했다.
‘내 이름이 카이트 에인헤랴르라고?’
나는 검마(劍魔) 이서원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몸은 이서원의 것이 아니다.
이서원은 마흔 살이 넘은 중년이었지만, 지금 이 몸은 기껏해야 이십대 중반 정도 같다.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지만 피부색은 하얗다. 얼굴을 만져 봐도 이목구비가 중원인보다는 서역인에 가까웠다.
‘이서원으로서 죽은 뒤, 카이트 에인헤랴르로 환생한 걸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상한데.‘
지난밤 카이트를 질책하던 사람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카이트 에인헤랴르는 ‘용살검가’라 불리는 에인헤랴르 대공가의 장남이라는 것 같다.
하지만 카이트는 수련을 게을리 하고 주색잡기에 빠져 있었고, 최근에도 맡은 임무를 팽개치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 이렇게 독방에 갇혀 있는 것도 그걸 벌주기 위한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다른 세상에 오게 된 것 같다.’
거대한 용의 머리.
그건 분명 중원에는 없었던 것이다.
나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이다.
‘용이 있는 세상이라…….’
죽기 직전에 그런 걸 꿈꿨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용처럼 자유롭게 사는 걸 원했던 건데… 뭔가 좀 다른 것 같았다.
‘분명 드래곤이라 했지?’
이 세상에는 드래곤이라 불리는 거대한 용들이 존재한다.
북방 경계를 담당하는 ‘용살검가’ 에인헤랴르는 그런 용들을 퇴치하는 명문가문이라고 한다.
‘날 다그치던 그 남자가… 용살검가의 수장인 시구르드 에인헤랴르 대공인가.’
시구르드 에인헤랴르.
그는 이 일대를 지배하는 최고 권력자로서, ‘북부대공’이라 불리며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장남인 카이트 에인헤랴르가 된 거고.’
무림식으로 말하자면 명문정파의 망나니 자식이라고 해야 할까.
아버지는 명문가를 이끄는 영웅적 인물인데, 그 장남은 주색잡기에 빠져 지내는 못난이인 것 같았다.
사실 무림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던 일이지만, 문제는 내가 그 당사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낡은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을 때.
“조용히 잘 지내고 계신 것 같군요.”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자주색 머리카락의 청년이었다.
“너는…….”
“형님, 아직도 술이 덜 깨신 겁니까?”
형님 소리를 듣고 생각났다.
어제 시구르드 옆에 서 있던 남자다.
카이트를 깔보던 눈빛으로 쳐다보던 게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다.
“무슨 일이냐, 프리드레이프.”
시구르드에는 네 명의 아들이 있다고 한다.
그중 넷째가 이 프리드레이프 에인헤랴르였다.
그러니 카이트의 막내동생이라 할 수 있다.
“별일 아닙니다. 형님이 얌전히 잘 있는지 확인하러 왔을 뿐이죠.”
“그걸 왜 네가 살펴보는 거지?”
“아버지가 저한테 명령하셨으니까요. 형님이 허튼짓을 하지 않도록 잘 감시하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프리드레이프가 인상을 찡그렸다.
“물론, 이렇게 직접 형님 얼굴을 보러오는 건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앞으로는 아랫놈들한테 시킬 테니까요.”
“다른 일이 바쁘면 그렇게 해야겠지.”
“…….”
프리드레이프가 미심쩍어 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평소답지 않게 침착하시군요. 무슨 바람이 부신 거죠?”
“평소에는 침착하지 않았나?”
“물론입니다. 맨날 짜증을 내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행패만 부리셨죠.”
“…….”
“1서클인 소드 노비스 주제에 말입니다. 형님이 에인헤랴르의 아들만 아니었어도 진작 목이 달아났을 겁니다.”
1서클, 소드 노비스.
그러고 보니 어제도 사람들이 카이트를 비난하면서 이 부분을 지적했다.
여러 얘기를 종합하면 이건 이 세계에서 무인의 경지를 가리키는 말인 것 같았다.
이 세계에서는 내공이 아니라 ‘마력’이라는 기운을 쌓아 힘을 발휘하는 것 같은데, 서클이란 그 마력의 양을 말하는 단위로 보였다.
아마 소드 노비스는 1서클밖에 없는 하급 검사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프리드레이프,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뭡니까?”
“너는 몇 서클이었지?”
“네? 저는… 6서클의 소드 엑스퍼트죠.”
“아버지는?”
“그야 최고 단계인 9서클의 소드 마스터시죠. 근데 왜 자꾸 이런 걸 물어보시는 겁니까?”
“아니,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그렇게 둘러대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는 9서클, 막내동생은 6서클… 다른 형제들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카이트 혼자서만 1서클이라면 상당한 둔재였던 모양이군.’
사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카이트의 육체가 상당히 빈약했기 때문이다.
검마 이서원의 육체와 비교하면 정말 비실비실했다.
유일한 장점은 이서원보다 훨씬 젊다는 것 정도일까.
“나는 상당한 못난이였던 것 같구나.”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프리드레이프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능력이 부족해도 성실하기만 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겁니다. 수련도 제대로 하지 않고, 아랫사람들한테 행패만 부리고… 이번에는 후방 지원 임무까지 팽개치고 술판을 벌이셨죠.”
“…….”
“형님은 에인헤랴르의 수치입니다.”
경멸하는 눈빛.
프리드레이프는 형인 카이트를 정말로 쓰레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큰형한테 저렇게 대놓고 말한다는 건… 이미 형제 사이에 상하관계가 역전되어 있다는 소리겠군.’
평범한 형제 관계라면 막내동생이 큰형한테 저렇게 말할 수 없다.
6서클 소드 엑스퍼트인 프리드레이프와 1서클 소드 노비스인 카이트 사이에서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저렇게 막말을 해도 허용될 정도로.
“왜 그렇게 태연한 표정이십니까? 평소처럼 얼굴 붉히면서 변명이라도 해보시죠?”
“무슨 변명을 하겠나.”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람은 그동안의 행적으로 평가받는 법이다. 그렇게 평가받을 일밖에 하지 않았으니, 너한테 그런 소리를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형님…….”
프리드레이프가 당혹스러워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망나니 큰형이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뭐 이상한 거라도 드셨습니까?”
“글쎄, 어떨까.”
“…….”
한동안 내 얼굴을 쳐다본 뒤, 프리드레이프가 머리를 긁적였다.
“쯧… 됐습니다. 저도 바쁘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일이 많은가 보군.”
“지난번에 드래곤 레이드가 있었지 않습니까. 조만간 보복이 들어올 겁니다.”
“보복이 들어올 거라고?”
“네, 그러니 방비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프리드레이프는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물론, 형님은 할 일이 없으니 그냥 지금처럼 탑꼭대기 독방에서 근신이나 하십시오. 무기한 근신이지만 얌전히 지내면 언젠가 나올 수 있을 겁니다.”
“후방 지원 업무는 안 해도 되는 건가?”
“이제 누가 형님한테 일을 맡기겠습니까?”
프리드레이프의 목소리는 쌀쌀맞았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형님이 좋아하는 술도 여자도 없으니까 한동안 괴롭겠군요.”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긴 뒤, 프리드레이프는 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
* * *
독방 문에 자물쇠를 채운 뒤, 프리드레이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금발머리의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세디스라는 이름의 5서클 기사로, 프리드레이프의 부관이었다.
“프리드레이프 님, 어떠셨습니까?”
“형님이 뭔가 평소하고 달라.”
프리드레이프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빨리 내보내달라고 떼를 쓸 줄 알았는데, 그냥 차분한 분위기였어.”
“반성하고 계신 걸지도 모릅니다.”
“반성? 큰형님이?”
“대공 전하가 그 정도로 심하게 질책하신 건 처음 아닙니까? 카이트 님도 뭔가 느끼셨겠죠.”
“흠…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카이트는 정말 형편없는 남자였다.
아버지한테 질책받았다고 마음을 고쳐먹을까.
“됐다. 우리는 우리 일이나 하지.”
“네, 프리드레이프 님.”
프리드레이프가 에인헤랴르 대공가에서 맡고 있는 직책은 순찰대장이었다.
특별한 임무가 없을 때는 에인헤랴르의 본거지인 성채도시 ‘고틀란드’의 내부 순찰을 담당한다.
드래곤들은 몸집이 크기 때문에 나타나면 금방 눈치챌 수 있지만, 작은 몸집의 부하들을 암살자처럼 잠입시킬 때가 있다.
그들이 고틀란드로 숨어들어와 사람들을 해치기 전에 미리 발견해 내는 것이 프리드레이프의 역할이었다.
“다른 형님들은 지금 고틀란드에 안 계시고, 아버지도 조만간 다시 바깥으로 나가시니… 우리가 고틀란드를 지켜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프리드레이프는 세디스와 함께 복도를 걸었다.
무기한 근신에 처해진 큰형에 대한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진 상태였다.
* * *
‘독방 근신이라.’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쁘지 않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지낼 수 있다는 건 나 같은 무림인들에게 결코 나쁜 게 아니다.
일부러 깊은 산속,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무림인들도 많았으니까.
‘술이나 여자는 딱히 없어도 상관없고.’
프리드레이프는 내가 여기 갇혀 있으면 지루해 죽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지만, 나한테는 별로 상관없는 얘기다.
‘그러면…….’
일단 나는 가부좌를 틀었다.
내 안에 있는 1서클의 마력이라는 놈을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내공하고는 다른 것 같군.’
일단 마력은 아랫배가 아니라 가슴에 있었다.
또한 혈맥과 이어져 있지 않고 그냥 가슴 안에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완전히 동떨어진 건 아니다.’
마력이라는 것도 분명 사람에게 내재된 기운이다.
제대로 연결만 해 주면 내공처럼 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카이트 에인헤랴르로서 계속 이 세상에 살아야 한다면… 무공이 필요해.’
그렇다.
나는 무공을 쓸 수 있는 몸을 만들 생각이었다.
무공 하나 못 쓰는 비실이의 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었다.
‘이건 나한테 새로 주어진 기회니까.’
검마 이서원은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죽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나한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카이트 에인헤랴르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삶에서는… 달라져야 한다.’
지난번 삶처럼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생각은 없다.
나는 검마 이서원보다 더 강해져서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절대적 존재가 될 생각이었다.
전생에서는 이루지 못했던 꿈… 하늘을 나는 한 마리 용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는 꿈을 이 세상에서 이루어 내기 위해서.
‘카이트 에인헤랴르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천룡(天龍)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오늘부터 그 첫걸음을 시작해야 한다.
흑사련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터득할 수 있었던 최고의 내공심법, 흑천수라심법(黑天修羅心法).
그 구결에 따라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이 미약한 마력을… 내공으로 바꾼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이 독방에 갇혀 있는 동안,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