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Slayer Sword Demon RAW novel - Chapter 213
▣ 213화. 음모의 신 (3)
몸이 무거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으로 육체를 제어하는 게 어려워진 상태였다.
수면독이나 마비독 같은 건 아니었다. 그런 거라면 내가 스스로 해독할 수 있다.
모종의 마법 같은데, 어떤 원리로 작용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로키가… 신역의 힘을 사용한 것이겠지.’
우리와 전투를 벌이는 도중, 로키가 몰래 마법을 사용했다.
그 마법 때문에 시구르드와 지크프리트는 잠들어 버렸고, 나는 억지로 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당신은 정말로 대단하군요, 카이트.”
로키가 니드호그와 나란히 서서 말을 건넸다.
“지크프리트와 시구르도 의식을 잃었는데, 혼자 버티고 있다니… 역시 당신이 가장 뛰어난 것 같습니다.”
“칭찬해 줘서, 고맙군…….”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바로 의식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다들 너무 피곤해 보여서 말입니다.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꿈나라로 보내 드렸지요.”
로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두 사람 다 좋은 꿈을 꾸고 있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좋은 꿈?”
“네,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꿈이지요.”
그렇게 말하며 로키가 미소 지었다.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꿈일 겁니다.”
* * *
브륀힐다의 모습을 보면서, 시구르드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눈물을 흘리다니, 그동안 정말로 힘들었던 모양이군요.”
브륀힐다는 천천히 시구르드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시구르드.”
“브륀힐다…….”
“이제 다시 저를 만났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브륀힐다가 손을 뻗었다.
눈물을 흘리는 시구르드를 따뜻하게 끌어안아 주려 했다.
하지만 시구르드는 그녀의 손길을 뿌리쳤다.
“하지 마라.”
“…….”
브륀힐다가 멈칫했다.
“어째서죠?”
“너는, 내 상상 속의 브륀힐다다.”
시구르드는 가슴이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면서 말했다.
“프레이야한테 들었다. 브륀힐다는 완전히 소멸했다고.”
“…….”
“같은 외모를 지닌 발키리를 다시 만드는 건 가능하지만, 내 아내였던 브륀힐다를 되찾는 건 불가능하다.”
프레이야와의 싸움을 통해, 시구르드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눈앞에 있는 브륀힐다가 가짜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는 그냥 내 꿈속의 존재다. 진짜 브륀힐다가 아니란 말이다.”
“…….”
“허황된… 가짜다.”
프레이야가 만들어 준 발키리를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음 속에서는 반가운 감정이 발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구르드는 그 감정에 휩쓸려 브륀힐다를 끌어안거나 하지는 않았다.
시구르드는 눈앞의 브륀힐다가 가짜이며, 그녀를 껴안는다고 해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시구르드.”
“아니다, 너는 가짜다.”
“가짜인지 진짜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브륀힐다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생전과 똑같은 동작이었다.
“시구르드, 저는 당신의 마음속에 계속 살아 있었습니다.”
“뭐라고?”
“아닌가요?”
브륀힐다의 시선이 시구르드의 가슴으로 향했다.
“당신은 계속 저를 가슴 속에 품고 있었을 겁니다.”
“…….”
“저는 죽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계속 남아 있었지요.”
브륀힐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살아 있었던 제가… 어떻게 가짜일까요.”
“그건, 궤변이다!”
“궤변이 아닙니다, 시구르드.”
그렇게 말하며 브륀힐다가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저는 당신이 사랑했던 브륀힐다 그 자체랍니다.”
“아니다. 브륀힐다는, 브륀힐다는…….”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에, 홀로 아우둠라로 돌아갔던 브륀힐다입니다.”
“……!”
브륀힐다의 마음을 듣고, 시구르드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알고 계시겠죠, 시구르드.”
“브륀힐다…….”
“제가 당신을 죽여서 데려가지 않고, 혼자서 고틀란드를 떠난 건…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발키리의 임무는 발할라로 전사를 데려가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의 몸으로는 영구동토의 봉인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시체로 만든 뒤 데려가야 했다.
하지만 브륀힐다는 기껏 소드 마스터로 육성한 시구르드를 데려가지 않았다.
시구르드를 암살하려고 했다가 그냥 고틀란드를 떠났고, 프레이야한테도 거짓으로 보고를 했다.
그런 짓을 한 이유는…….
“저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했답니다, 시구르드.”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일 뿐이다. 실제로 브륀힐다가 그랬으리란 보장은…….”
“당신이 저 같은 여자는 잊어버리고, 카이트와 함께 에인헤랴르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길 기도하면서… 홀로 영구동토로 돌아갔던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것은……!”
시구르드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어째서, 나한테 말하지 않았단 말이냐!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되었던 것 아니냐!”
“당신이 저를 잊어버리길 바랐으니까요.”
“그냥 에인헤랴르에 남으면 되는 거였다! 네가 그렇게 결심해 주었다면, 나는 너를 지키려 했을 것이다! 상대가 신이라고 해도!”
“저는 프레이야 님에게서 비롯된 발키리입니다. 자율적인 행동도 가능하지만, 프레이야 님을 배신하고 에인헤랴르에 남는다는 선택은 불가능했지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사정만이라도 알았다면, 많은 것이 달랐을 것이다.
“전부, 제 탓이긴 하지요.”
“아니다, 브륀힐다. 너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카이트가 그렇게 오랫동안 방황한 것도, 결국은 제 탓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그것은…….”
“그래도, 카이트는 이제 훌륭한 어른이 되었지요.”
그건 그렇다.
카이트는 오랜 방황을 극복하고 에인헤랴르의 검사로서 훌륭히 성장했다.
“그러니 이제는 카이트에게 맡기도록 하세요.”
“카이트에게…….”
“당신은 이제 쉬어도 된답니다.”
쉰다고?
시구르드 에인헤랴르가?
“그동안 당신은 너무 오래 싸웠어요, 시구르드.”
“…….”
“이제는 쉴 때가 되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브륀힐다가 다시 시구르드에게 손을 뻗었다.
“뒷일은 다음 세대에게 맡기고… 당신은 이제 그만 쉬도록 하세요.”
“브륀힐다…….”
자신을 껴안는 브륀힐다의 손길을 느끼면서, 시구르드는 눈을 감았다.
브륀힐다의 품은 그 무엇보다 따뜻했다.
* * *
“이제 그만 쉬어라, 아들아.”
드넓은 광야 위에서, 지크프리트는 아버지인 시그문드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 원수를 갚고 파프니르를 퇴치한 것만으로도, 너는 네 역할을 다한 것이다.”
“…….”
“그 이상의 역할을 하려는 건 네 욕심이다.”
지크프리트… 초대 시구르드는 비참하게 살해당한 영웅 시그문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검이었던 그람을 되살려 원수를 갚고 파프니르를 퇴치하면서 영웅이 되었다.
“이미 너는 에인헤랴르 가문을 만들었다. 계속해서 인류를 수호하는 영웅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하였지.”
“…….”
“이 시대를 지키는 건 이 시대의 에인헤랴르들이 해야 될 역할이다. 네 후손들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처음에 에인헤랴르 가문을 만들었던 것도, 자신이 죽은 뒤 후손들이 세상을 지켜 주길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분노검 그람을 이어받은 후대의 시구르드들이 계속해서 인류를 수호해 주길 바랐던 것이다.
“너는 안심하고 잠들었을 것이다. 네 후손들이 너를 대신해서 인류를 지켜 줄 거라 믿으면서.”
“…….”
“그걸로 네 임무는 끝난 거다. 네 영혼을 혹사시키면서 계속 싸울 필요는 없다.”
사명감은 버려라.
이 시대의 일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다.
안 그래도 오랜 세월 동안 프레이야에게 조종당하느라 영혼이 한계에 도달한 상태.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맞다.
그것이 아버지 시그문드의 주장이었다.
“너는 분명 대단한 영웅이었다.”
“…….”
“하지만 영웅이라고 해서… 이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 말을 들으면서 지크프리트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탁 트인 하늘을.
* * *
잠들어 있는 시구르드와 지크프리트를 쳐다보면서, 로키가 미소 지었다.
“어째서 인간 영웅들은 그렇게 책임감이 강한 걸까요.”
“…….”
“이건 내가 해야 한다, 내 목숨을 걸고 해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혹사시키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안쓰럽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아니면 단순히 조롱하는 말일까.
“사실 신족 중에도 그런 사명감에 휩싸여 있는 존재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
“방금 당신이 쓰러뜨리고 올라온 티르도 그런 케이스입니다.”
검신 티르를 언급하면서 로키가 어깨를 으쓱했다.
“티르가 한쪽 팔을 잃은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예전에 펜리르를 글레이프니르로 속박할 때, 티르가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 한쪽 팔을 펜리르의 입안에 처넣었기 때문이죠. 그런 희생정신을 발휘하다니… 정말 영웅적이지 않습니까?”
“…….”
“정말 바보 같지요.”
그렇게 말하며 로키가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카이트, 당신은 어떻습니까.”
“뭐가, 말이냐…….”
“사명감에 휩싸인 채,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입니까?”
“…….”
“저기 있는 에인헤랴르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듯이 싸우는 존재입니까?”
그 질문을 듣고.
나는 힘겨운 숨을 토해 내면서 말했다.
“나는, 이 세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흐음?”
“내가 추구하는 건 한 가지뿐이다.”
“그게 무엇입니까?”
“자유.”
하늘을 날아다니는 용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
그것만이 내가 추구하는 목표다.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
“그렇기에… 다른 이의 자유를 짓밟는 존재들과 싸우고 있는 거다.”
로키의 얼굴을 노려보면서 그렇게 내뱉자, 아주 잠시 로키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하지만 곧바로 로키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렇군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니, 아주 흥미롭습니다.”
“…….”
“아니, 흥미를 넘어서… 경이롭군요. 자유를 추구하는 영웅, 확실히 드뭅니다. 적어도 신화시대의 영웅 중에는 그런 존재가 없었지요.”
로키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이건 정말로… 흐음, 이거, 괜찮을지도?”
“뭔 소리를 하는 거냐, 로키…….”
“카이트.”
억지로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로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자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뭐라고……?”
“우리 모두 싸우지 않고 화합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로키는 고개를 돌렸다.
“니드호그, 괜찮지 않겠습니까?”
“로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카이트는 시구르드나 지크프리트하고는 다릅니다. 뚜렷한 사상을 지니고 있으니,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요.”
“…….”
니드호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카이트가 아군이 되어 준다면 좋긴 하겠지만…….”
“그렇지요?”
“문제는 카이트가 받아들이느냐지.”
“그거야 제가 이제부터 설득하면 되는 것이죠. 바니르 신족을 복속시키고 거인족과의 화평을 성립시킨 제가 말입니다.”
신족 최고의 모사로서의 자신감을 드러내며, 로키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카이트, 다시 한번 진지하게 제안합니다. 저와 손을 잡으시지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힘겹게 대꾸했다.
“대체 네 목적이 뭐지……?”
몇 가지 단서가 있기는 했다.
로키는 애시르 신족이 괴멸되는 걸 그냥 지켜만 봤다.
몇몇 신한테 암리타를 먹여 나가라자처럼 변이시켰다.
니드호그가 로키와 손을 잡으려 하는 것 같았고, 파프니르도 침묵하고 있다.
이런 단서들을 바탕으로 로키의 목적을 추측할 수 있긴 하지만… 결정적인 것이 부족했다.
“로키, 대체 너는 무엇을 꾸미고 있는 거지……?”
“제 목표는 말입니다, 카이트.”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로키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말했다.
“원룡(原龍) 티아매트를 부활시켜, 이 세계를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겁니다.”
원룡 티아매트.
태초의 거인인 이미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기초가 되었다고 하는 존재.
그 부활을 언급하면서, 로키가 내 앞에서 미소 지었다.
“당신의 뜻을 반영해… 진정한 자유가 존재하는 세계를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