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Slayer Sword Demon RAW novel - Chapter 34
▣ 34화. 다리를 막다 (1)
“여기서 쉬었다 가겠습니다!”
어윈의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납치되었던 사람들을 데리고 노예 수용소를 탈출한 지도 사흘이 지났다. 훈련을 받은 게 아닌 민간인들과 함께 산을 넘고 숲을 돌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이트 님, 사람들이 많이 지쳐 있는 것 같습니다.”
모리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차라리 어딘가에 사람들을 숨겨놓고 원군을 데려오는 건 어떨까요?”
“그러다가 추격대가 나타나면 더 위험해. 이대로 도망치는 게 최선이야.”
“아…….”
“예상했던 것보다 사람 수가 많아서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건 이해하지만, 여기서 사람들을 두고 가는 건 버리고 가는 것과 똑같은 의미야.”
“그,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백여 명의 민간인들.
오십여 명의 기사대와 친위대로 지키면서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공녀님, 저도 카이트 님 의견에 동감입니다.”
“모르트 경…….”
모르트가 불쑥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이게 다른 군대의 포위망을 돌파하는 거라면 절망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상대는 몬스터들이죠.”
모르트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몬스터들은 평상시에는 듬성듬성 흩어져 있습니다. 전술적인 행동도 못하죠. 무리지어 다니는 놈들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역시 인간보다는 머리가 나쁩니다.”
“그건… 그렇죠.”
“우리가 정찰에 신경 쓰면서 놈들을 피해 최대한 안전하게 이동한다면, 사람들을 무사히 데려갈 수 있을 겁니다. 너무 걱정 마십쇼.”
“네, 알겠습니다, 모르트 경.”
“하하, 게다가 여기에는 카이트 님도 있고, 공녀님도 있지 않으십니까. 웬만한 위험은 다 돌파할 수 있을 겁니다.”
상당히 낙관적인 견해를 밝힌 뒤, 모르트는 다시 주위를 경계하러 우리 곁을 떠났다.
“정말로… 무사히 이 지역을 탈출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모리안이 아직 완전히 안심하지는 못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카이트 님, 그동안 제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째서지?”
“적들을 무찌르고 사람들을 구출해 내면 그걸로 다 끝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줘야 구출이 끝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네요. 제가 너무 어리석었던 것 같습니다.”
모리안은 아직 어리다.
지휘관으로서는 좀 더 경험을 쌓아야 할 것이다.
“모리안 공녀.”
“네, 카이트 님.”
“방금 전에 모르트가 말한 대로, 이대로 잘 진행해 나간다면 무사히 사람들을 데려갈 수 있을 거야. 평범한 몬스터들은 우리들 전력으로 충분히 해치울 수 있으니까.”
“아…….”
“오크나 고블린, 리자드맨 등의 집단이 어슬렁대고 있다고 해도 우리 쪽 정찰병이 사전에 발견해서 피하면 된다. 우리가 먼저 공격해서 괴멸시킨 뒤 이동하는 것도 가능하지. 선제 공격을 허용하지 않으면 민간인들을 안전하게 호송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아.”
“그, 그렇군요.”
“다만… 놈들이 수용소 괴멸을 눈치채고 병력을 보내 우리를 추격한다면 조금 골치 아파지지. 추격대의 규모가 별로 크지 않다면 우리가 격퇴하면 되지만, 병력이 많을 경우에는 사람들을 제대로 지켜내기 어려울 수도 있어.”
“……!”
이게 문제였다.
용귀족, 혹은 킹 리자드맨 같은 지휘관이 이끄는 병력이 쫓아온다면 막아내는 게 쉽지 않다.
전투 요원들만 있는 상태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지금은 민간인들을 보호하면서 싸워야 하니까.
“그,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
나는 담담히 말했다.
“상황에 맞게 대처해야지.”
* * *
깊은 밤.
나는 야영지에서 벗어나 한 바퀴 주위를 살펴봤다.
우리는 이번에 가파른 협곡을 건너서 이동했다. 주위에는 숲도 없었고, 몬스터가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가까운 곳에 위협적인 몬스터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조용한 장소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냈다.
‘불사의 영약… 또 하나 얻었군.’
테르코스를 쓰러뜨린 뒤, 나는 테르코스가 걸어나온 방향을 살펴봤다.
안쪽에 테르코스의 침실로 보이는 곳이 있었는데, 본 적이 있는 상자가 잘 보관되어 있었다.
바로 불사의 영약이 보관되어 있는 상자였다.
‘지난번에 입수했던 것과 똑같은 것 같아.’
이것도 악룡 파프니르 파벌의 아카샤니그두가 하사한 약일 것이다.
‘현재 내 내공은 4갑자… 이걸 먹으면 5갑자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미 한번 먹은 적이 있기 때문에 두 번째는 효과가 그만큼 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막강한 기운이 담긴 약인 이상, 내공에 변화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걸 먹는다고 즉시 내공이 확 늘어나는 건 아니라는 점이지.’
지난번에 불사의 영약을 먹었을 때는, 내 안에서 요동치는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방에서 뛰쳐나가야 했다.
성 밖으로 뛰어나가 한바탕 몸을 움직인 다음에야 비로소 진정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어떨까.
‘애초에 이 불사의 영약이란 정체가 무엇일까.’
지금까지 여러 배룡주의자와 용귀족들을 만나봤지만, 그들도 불사의 영약이 정확히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르고 있었다.
드래곤들이 장수하는 비결이며 인간이 먹어도 수명이 늘어난다, 강력한 힘을 부여하지만 제대로 제어를 못하면 부작용이 있다… 그냥 그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성질 자체는 무림의 영약과 비슷한 듯한데, 정작 원료가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나는 약재 등의 지식도 있다.
하지만 이 약의 정체가 무엇일지 잘 모르겠다.
‘혹시 전설 속의 공청석유(空靑石油)?’
공청석유는 자연의 기운이 모여서 농축된 특별한 액체다.
최고의 영약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도 직접 본 적은 없다. 먹어 본 사람을 만나 본 적도 없다.
어쩌면 이 불사의 영약이 그 공청석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청석유치고는 기운이 별로 맑지 않은 느낌이란 말이지.’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이걸 언제 복용하느냐다.
복용한 뒤 오랜 운기조식이 필요할 경우, 드래곤측의 추격대가 나타났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이걸 먹어야 할지 고민이 필요했다.
‘이 주변은 안전할 것 같고, 그냥 오늘 밤에 해치워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북쪽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을 때.
검은 그림자가 별빛을 가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 * *
그것은 막강한 군세였다.
행군 중인 대군단의 지휘를 맡고 있는 건 용후작(龍侯爵) 볼레로프였다.
그는 원래 어떤 귀족 가문의 장남이었지만,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원한으로 배룡주의자가 되었고 마침내 용귀족의 자리까지 오른 남자였다.
볼레로프가 이끄는 군단은 숫자 자체만 보자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머릿수로 싸우는 오크나 고블린 같은 몬스터들을 군단에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군단의 주된 병력은 발이 빠르면서도 강력한 힘을 지닌 웨어비스트 계열의 몬스터였다. 늑대인간인 웨어울프, 호랑이 인간인 웨어타이거 등 강력한 개체들이 모여 있었다.
드래곤의 하위종인 드레이크도 무려 네 마리나 포함되어 있어, 정말로 엄청난 전력의 군단이었다.
어째서 이 정도의 군단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을 지배하는 절대적 존재… 드래곤이 진노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놈이군, 카이트 에인헤랴르.’
볼레로프는 순수한 의미로 동정했다.
이번 출진이 카이트 에인헤랴르의 과도한 도발에서 시작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카샤니그두 님을 따르는 배룡주의자나 용귀족들을 척살하는 정도였다면 그나마 눈감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카이트 에인헤랴르는 아카샤니그두를 직접 도발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직접 쳐들어와서 노예 수용소를 괴멸시키기까지 했다.
이건 분명 선을 넘는 행위였다.
‘네가 선을 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드래곤들은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본격적인 전쟁을 벌여 인간들을 멸망시킬 생각이 없다.
말하자면 인간들이 지금 번영할 수 있는 건 드래곤들이 유예 기간을 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드래곤들은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선을 넘었으니, 보복을 당할 수밖에 없지.’
노예 수용소 괴멸이 확인되자마자, 즉각 추격 명령이 떨어졌다.
이건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발 빠른 전력만 모아서 신속하게 추격을 개시했다.
그 덕분에 놈들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놈들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이미 볼레로프는 정찰을 통해 카이트 쪽의 전력을 확인한 상태였다.
용살검가의 기사들이 마흔 명 정도, 광휘창가의 창기사들이 열 명 정도.
카이트 에인헤랴르와 모리안 피어너가 있다고 해도, 정말 보잘것없는 전력이었다.
그 병력으로 이 몬스터 군단을 상대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구출한 노예들을 지키면서 싸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만약 놈들이 노예들을 내버린 채 도주한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추악하기 그지없는 행위다.
자기 목숨을 살리기 위해 기껏 구해낸 노예들을 내버려 둔 채 도망치는 거니까.
이 얘기를 배룡주의자들을 통해 인간 사회에 퍼뜨리면 용살검가 및 광휘창가의 명성을 추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용귀족이시여.”
“뭐냐.”
전방에서 웨어울프 하나가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앞쪽에서 인간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지?”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직접 살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원래 웨어울프 같은 웨어비스트들은 인간에 가까운 지능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애매한 보고를 한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대체 뭐냐.”
볼레로프는 말을 탄 채 앞으로 나섰다.
전방에는 협곡 사이에 자연적으로 생긴 다리가 있었다.
굴러 떨어진 바위가 쌓여서 생긴 다리인데, 폭이 별로 넓지 않아 드레이크 한 마리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
눈을 의심했다.
그 다리 위에… 한 남자가 홀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눈을 감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설마, 저놈…….”
인상착의를 보고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저 남자야말로 아카샤니그두가 쫓던 카이트 에인헤랴르가 분명했다.
“네놈,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이냐!”
“…….”
“다른 놈들은 다 어디로 갔지?!”
홀로 다리 위에 앉아 있던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볼레로프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은 먼저 갔다.”
“뭐라고?”
“먼저 피신했단 말이다, 용귀족.”
다른 기사들이나 노예들은 이미 이곳을 떠나 도망치는 중이라는 얘기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놈이 여기에 홀로 앉아 있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네놈은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너희를 막아야지.”
“뭐라고?”
이쪽은 강력한 몬스터들로 구성된 막강한 군세.
저쪽은 한 명의 평범한 인간.
그런 상황에서… 카이트 에인헤랴르가 표정 변화없이 말했다.
“나 혼자, 너희를 막기 위해 남은 거다.”
너희 정도는 혼자서도 막을 수 있다는 듯이, 냉정한 목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