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Slayer Sword Demon RAW novel - Chapter 48
▣ 48화. 아카샤니그두 (2)
기경팔맥 중에서 몸의 앞쪽을 따라 흐르는 임맥(任脈).
그중에서 단전과 연결된 관원(關元)에서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석문(石門), 기해(氣海), 음교(陰交)를 지나 배꼽에 있는 신궐(神闕)에 이르렀다. 거기서 잠시 맴돌던 기운은 바로 수분(水分), 하완(下脘), 건리(建里), 중완(中脘), 상완(上脘), 거궐(巨闕), 구미(鳩尾), 중정(中庭)으로 치솟았다.
“……!”
가슴 중앙의 단중(膻中)을 통과할 때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기운은 거침없이 올라와 옥당(玉堂), 자궁(紫宮), 화개(華蓋), 선기(璇璣), 천돌(天突)을 통과했다.
그리고, 목 앞부위의 염천(廉泉)을 통과하여 승장(承漿)으로…….
“커헉!”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시커먼 피를 토했다.
* * *
“병사든 민간인이든 모조리 죽여라! 덤벼드는 놈이든 도망치는 놈이든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라! 얼스터를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는 거다……!”
전장(戰場) 전체에 사악한 용귀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광휘창가 피어너의 본성(本城)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절망감을 안겨 주는 목소리였다.
“정신 차려라! 맞서 싸워야 한다!”
“놈들이 성벽에 올라오게 해서는 안 된다……!”
주위에는 피 냄새가 가득했다.
성벽 아래로 수없이 많은 시체가 쌓여 있었다. 고블린의 시체, 오크의 시체, 오거의 시체… 그리고 인간의 시체.
그동안 계속 전투가 이어졌지만, 오늘 이 성벽 주위에서 벌어진 전투가 가장 격렬했다.
“크르르……!”
오크가 시체들을 쌓아서 만든 계단을 뛰어올라 성벽 위로 진입하려 했다.
하지만 피어너가 자랑하는 창기사들의 창이 오크를 꿰뚫었고, 시체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잘 했어! 그렇게 계속 버텨라! 자기 위치를 사수해!”
“네, 모리안 공녀님!”
창기사들을 격려하면서 모리안이 성벽을 질주했다.
이번 전투에서 모리안이 맡은 구역은 없다. 성벽 전체가 모리안의 전장이었다.
조금이라도 위태로운 곳이 있으면 주저 없이 달려가서 가세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리안의 전신은 땀에 젖어 있었다.
“하압……!”
게 볼그가 성벽 위로 올라오려 하는 오거의 머리를 꿰뚫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몬스터를 해치웠는데도 불구하고, 광휘창가 피어너를 상징하는 극창(棘槍) 게 볼그는 변함없는 위력을 보여 줬다.
“헉, 헉…….”
하지만, 모리안에게 슬슬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다.
이렇게 종횡무진 뛰어다닐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 더 열심히 수련할 걸 그랬어.’
모리안은 자기가 아직 열아홉밖에 안 됐다는 것도 잊은 채 스스로를 책망했다.
7서클이 아니라 8서클이었다면 좀 더 많은 활약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리안 공녀님!”
그때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러 블레이드를 펼치며 적들을 도륙하고 있는 니얼이 이쪽을 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이제 그만 공작님과 합류하십시오!”
“니얼! 그럴 수는 없어요!”
모리안의 아버지는 지금 후방에 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견뢰검 칼라드볼그를 들고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었지만, 작은 부상을 입어 결국 후퇴한 상태였다.
“도망치시라는 게 아닙니다! 힘을 온존하시라는 의미입니다!”
니얼이 손을 치켜들었다.
“아직 저놈이 남아 있으니까요!”
“……!”
모리안은 니얼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봤다.
수많은 시체들 너머에서… 마치 구경이라도 하듯이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거대한 드래곤의 모습을.
“저 드래곤이 언제 전투에 참가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게 볼그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공녀님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아군 중에는 8서클의 소드 엑스퍼트, 스피어 엑스퍼트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오러 블레이드를 펼친다고 해서 드래곤에게 상처를 입히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모리안이 게 볼그의 진정한 힘을 개방한다면… 기사회생의 역전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 알겠습니다!”
모리안은 입술을 깨물면서 성벽 위에서 내려왔다.
성벽 안은 비교적 조용했다. 민간인들이 거의 다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금쯤 안전한 곳까지 도망쳤을까?’
성벽을 사수하는 병력이 오래 버티면 버틸수록 민간인들이 대피에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병사들을 최대한 많이 살리는 것도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니얼이 적절한 타이밍에 지시를 내리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모리안은 안쪽 지휘소에서 대기하고 있을 아버지와 합류하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쿠쿠쿠쿵!
엄청난 굉음과 함께 주위가 흔들렸다.
마치 지진이 발생한 것 같았다.
“앗……!”
고개를 치켜든 모리안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성벽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 성벽 위로… 화려한 복장을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귀족!’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복장의 화려함, 그리고 눈빛의 오만함만으로도, 저 남자가 용귀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벽을 갑자기 무너뜨렸다는 건… 마법사인가?!’
모리안은 다급히 움직였다.
아버지와 합류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오오, 모리안!”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피어너 공작이 모리안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했구나. 정말 다행이다.”
“아버지, 부상은 괜찮으신지요?”
“그리 심하지 않다. 이제 치료도 다 끝났고, 바로 전장에…….”
바로 그때.
하늘에서 불꽃의 탄환이 쏟아져 내렸다.
‘마법……!’
마력으로 불꽃을 발생시켜 떨어뜨리는 화염 마법.
갑자기 쏟아지는 화염을 막아내기 위해, 모리안뿐만 아니라 여러 기사들이 다급히 오러를 전개했다.
“윽……!”
“아버지!”
화염탄을 제대로 막지 못한 피어너 공작이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모리안이 비틀거리는 아버지에게 달려가려고 한 순간, 거만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여기에 있었군.”
“……!”
아까 목격했던 용귀족이었다.
그는 위아래로 갈라진 눈썹을 꿈틀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거기 있는 남자가… 광휘창가 피어너의 수장인 플란 피어너인가?”
“네놈… 용귀족이냐!”
“그래, 위대한 아카샤니그두 님을 섬기는 용후작 어바인이라고 한다.”
거만한 표정으로 말하면서 어바인은 피어너 공작과 모리안은 번갈아 쳐다봤다.
“흠, 칼라드볼그도 게 볼그도 다 여기 있군.”
“뭐, 뭐라고?”
당혹스러워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바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광휘창가의 부녀(父女), 너희들이 갖고 있는 칼라드볼그와 게 볼그를 제출해라.”
“자, 잠깐, 그게 무슨 소리지?”
“아카샤니그두 님이 칼라드볼그와 게 볼그를 원하신다.”
“……!”
생각지도 못한 얘기였다.
드래곤이 왜 이런 검과 창을 원한단 말인가.
“어, 어째서지?”
“그걸 너희가 알아서 어쩌려고? 순순히 넘기기나 해라.”
“웃기지 마라! 너희들에게 피어너의 보물을 넘겨줄 수는……!”
“어바인 용후작.”
그때 피어너 공작이 입을 열었다.
“칼라드볼그와 게 볼그를 넘기면… 이대로 물러나 줄 건가?”
“아버지!”
“대답해다오, 용후작.”
모리안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피어너 공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대로 공격을 멈추고 물러나준다고 약속해 준다면, 칼라드볼그와 게 볼그를 넘겨줄 수 있다.”
“하하, 이것 참.”
하지만 어바인은 웃기만 했다.
“아주 낙천적인 성격이군. 그래 갖고 어떻게 영주 노릇을 하나?”
“뭐, 뭐라고?”
“우리가 동원한 고블린과 오크, 오거들에게도 포상을 내려줘야지. 다들 살이 부드러운 민간인들의 고기를 먹고 싶어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데, 딱딱하고 지저분한 병사들 시체만 먹여주라고? 나는 그렇게 냉혹한 사람이 아니야.”
“……!”
피어너 공작도, 모리안도 눈을 크게 떴다.
“네, 네놈… 그러고도 인간이냐?”
“인간? 웃기는군. 나는 용귀족이다.”
화려한 소맷자락을 펄럭이면서 어바인이 웃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광휘창가의 부녀.”
“닥쳐라! 너희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맞서 싸울 것이다……!”
유약한 줄만 알았던 아버지의 일갈에 모리안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싸워야 해!’
모리안은 게 볼그를 두 손으로 꽉 쥐면서 어바인을 노려봤다.
마법사와 싸워 본 경험은 별로 없지만, 지금처럼 빈틈을 보이고 있을 때 공격한다면…….
“저렇게 나오는데, 어쩌시겠습니까?”
“흠, 어쩔 수 없군…….”
쿵.
육중한 소리가 들린 직후.
건물들 사이로, 시커먼 머리가 튀어나왔다.
“……!”
모리안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 멀리서 가만히 대기하고 있었을 드래곤이 어느새 근처까지 와 있었다.
“드, 드래곤!”
“아카샤니그두……!”
악룡 파프니르의 수하, 아카샤니그두.
갑자기 나타난 시커먼 드래곤 앞에서, 많은 기사들이 전의를 상실했다.
“그래, 그것이 옳다. 창과 검을 내려놓고… 목숨을 구걸해라.”
아카샤니그두가 만족스러워 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다고 해서 살려 주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
모리안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카샤니그두는 정말로 사악한 드래곤이다. 지난번에 사람들을 납치해 간 것도 아카샤니그두의 부하들이 한 짓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아카샤니그두를 만난다면 전력을 다해 싸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죗값을 치르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보니 드래곤은 정말 터무니없이 강대한 존재였다.
‘드레이크 같은 하위종하고는 비교도 안 돼!’
몸집이 거대하긴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거대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압살당할 것 같았다.
다른 기사들이 겁을 먹고 검이나 창을 떨어뜨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리안 님……!”
바로 그때.
성벽 쪽에서 니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모리안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래, 아까 니얼이 말했듯이……!’
지금 여기서 드래곤에게 대항할 수 있는 건 게 볼그를 든 모리안뿐이다.
칼라드볼그를 들고 있는 아버지는 어깨를 다쳐서 제대로 싸울 수 없다.
아카샤니그두가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공격해야 한다.
‘광휘창가 최강의 창, 게 볼그라면……!’
게 볼그는 그 자체로도 매우 우수한 창이다.
하지만 그 진정한 힘은 투창(投槍)으로 사용했을 때 드러난다.
모리안의 선조들은 게 볼그를 던져… 수많은 드래곤의 목숨을 빼앗아 왔다.
‘제대로 명중만 한다면……!’
파앙!
게 볼그가 사출되었다.
오러와 어우러지면서 게 볼그가 가속, 아카샤니그두의 목을 노렸다.
전승대로라면, 목에 명중한 순간 수많은 가시가 돋아나와 아카샤니그두의 숨통을…….
“흠…….”
아카샤니그드의 앞발.
대수롭지 않게 치켜든 그것이… 게 볼그를 공중에서 낚아챘다.
“알아서 바쳐 주는군, 인간…….”
“……!”
모리안은 숨을 삼켰다.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저렇게 아주 간단히 막힐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실력 부족이다. 진짜 힘을 끌어내려면 최소한 10년은 더 수련해야겠군…….”
“윽…….”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모리안은 무력감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 모리안!”
“그러면 남은 건… 칼라드볼그인가.”
아카샤니그두의 시선이 피어너 공작에게 향했다.
“어바인,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너는 나머지 일을 처리해라.”
“네, 그러면 군단을 둘로 나눠서 절반은 병사들을 소탕하고 절반은 민간인들을 추격하도록 하겠습니다.”
“말했을 텐데. 그런 건… 알아서 하라고.”
“네, 아카샤니그…….”
어바인의 목소리가 중간에 끊겼다.
“말을 왜 끝까지 안 하는…….”
아카샤니그두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어바인에게 시선을 향했다.
하지만, 아카샤니그두도 중간에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바인……?”
“…….”
어바인이 말없이 쓰러졌다.
그 미간에는 작은 단검이 하나 꽂혀 있었다.
“…….”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모리안도, 피어너 공작도, 아카샤니그두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어너 공작.”
바로 그때.
어디선가 걸어 나온 남자가, 자리에 주저앉아있던 피어너 공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을 빌리겠습니다.”
“아, 어?”
허를 찔린 피어너 공작이 칼라드볼그를 빼앗겼다.
그 광경을 보고, 모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모리안 공녀, 괜찮은가?”
“아…….”
“사흘 버텨달라고 했는데, 용케도 버텨줬군. 수고 많았어.”
“아아……!”
모리안의 두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런 모리안을 달래듯이 어깨를 두드려준 뒤, 남자가 천천히 걸어갔다.
거대한 드래곤을 향해, 어떤 두려움도 없이.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인 것 같군, 아카샤니그두.”
“네놈……!”
아카샤니그두가 처음으로 감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거대한 몸을 부르르 떨면서, 날개를 활짝 펴며 분노했다.
“카이트 에인헤랴르,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나도 갑자기 나타났다는 드래곤이 너일 줄은 몰랐어. 이걸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카이트 에인헤랴르.
그가 당당한 모습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상대해 주지, 아카샤니그두.”
지금까지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빛이, 찬란하게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