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Slayer Sword Demon RAW novel - Chapter 57
▣ 57화. 몰려오는 적들 (4)
“머, 멈춰라! 내가 누군지 아느냐?!”
금발의 중년 남성이 뒷걸음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중년 남성 주위에는 친위대 같은 자들이 있었지만, 이미 절반은 내 칼을 맞고 죽었다.
참고로 나머지 절반은 알아서 도망친 상태였다.
“나는 유리부르크 백작이다! 너희 대장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귀족에 걸맞은 대우를…….”
“내가 대장인데.”
“뭐?”
“내가 카이트 에인헤랴르다.”
“…….”
유리부르크 백작이 눈을 깜박이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네, 네가 카이트 에인헤랴르라고……?”
“그래. 그러니까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해라.”
칼라드볼그를 치켜들면서 말하자, 유리부르그 백작이 입을 뻐끔거렸다.
“이, 이보게, 나는 애초에 이번 싸움에 별 생각이 없었네. 루스베르그 후작에 의해 억지로… 커억!”
“들을 가치가 없는 말을 하는군.”
유리부르그 백작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문득 고개를 치켜들자, 불길이 닿지 않는 산 쪽으로 도망치는 집단이 보였다.
“신속하게 철퇴에 성공한 놈들이 있군. 저건… 엘덴비움 백작이려나.”
니얼이 알려 준 바에 의하면, 엘덴비움 백작은 유리부르그 백작과 비슷한 중요도의 인물이다.
이대로 도망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잡아야지.”
나는 놈들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기회를 엿보고 있는 자들이 계속 따라오는 것을 느끼면서.
* * *
‘저건 악마인가?’
슈데르트는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불 속에서도 태연하게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학살하는 카이트의 모습은 악마 그 자체였다.
‘어떻게 이런 불길 속에서도 끄떡없는 거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9서클의 소드 마스터라고는 해도 타오르는 불에는 뜨거움을 느낀다.
그런데 카이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불 속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다, 단장님.”
부하들도 당혹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어째서 카이트 에인헤랴르는 눈썹 하나 까딱 안 하는 겁니까? 무슨 마약 같은 거라도 한 걸까요?”
“…….”
부하의 귓속말에도 슈데르트는 아무런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그냥 말없이 카이트를 쫓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계속 쫓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걸까?’
슈데르트는 회의감을 느꼈다.
아까부터 계속 카이트를 습격할 틈을 노리고 있었지만… 도무지 기회가 없었으니까.
결국 슈데르트는 부하들을 데리고 산속까지 쫓아가게 되었다.
* * *
“엘덴비움 백작, 슬슬 포기하시지.”
“……!”
검풍(劍風)을 날려 바위를 무너뜨렸다.
앞길이 막히자 엘덴비움 백작이 황급히 뒤돌아 봤다.
이미 수하들은 다 쓰러지고 엘덴비움 백작 혼자만 남은 상태였다.
“카, 카이트 에인헤랴르, 네놈은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엘덴비움 백작이 손가락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어떻게 불길 속을 마음대로 걸어 다니는 거냐!”
“어째서라고 생각하지?”
“네놈 설마… 배룡주의자냐?”
“배룡주의자?”
“불사의 영약을 먹어 신비한 힘을 손에 넣은 게 아니냔 말이다!”
“…….”
“이놈! 드디어 정체를 드러냈군! 사악한 배룡주의자 놈! 용살검가의 장남 주제에 드래곤의 힘을 빌려 강해지다니……!”
그는 갑자기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 때문에 반론하기가 좀 그랬다.
내가 불사의 영약을 먹은 적이 있는 건 사실이고, 지금 수화불침의 경지에 도달한 것도 드래곤 하트 덕분이니까.
“너도 귀족이라면 부끄러움을 알아라!”
“부끄러움, 부끄러움이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불에 타죽는 부하들을 내버려두고 혼자서만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 않았나보군.”
“……!”
정확히는 혼자서 도망친 게 아니라 심복들 몇 명만 데리고 도망친 거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지휘관으로서 부대를 수습할 의무는 어디에 내던진 거냐?”
“시, 시끄럽다. 어차피 그놈들은 소모품에 불과한 평민들… 엘덴비움 백작 가문의 주인인 내 목숨이 더 중요하다!”
“너희 같은 놈들은 항상 그런 말을 지껄이는군.”
무림에서도 몇몇 명문세가와 싸울 때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소리를 하는 놈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나?”
“뭐, 뭐라고?”
“별 볼 일 없는 놈일수록 그런 소리를 잘 지껄이더군.”
“……!”
내가 앞으로 한 걸음 접근하자, 엘덴비움 백작이 손을 치켜들었다.
“자, 잠깐만!”
“또 뭐지?”
엘덴비움 백작이 다급히 고개를 치켜들고 소리를 질렀다.
“슈, 슈데르츠!”
“……?”
“뭐 하고 있는 거냐! 내가 버티면 너희가 나서주기로 했잖아! 대체 뭐 하고 있는 거냐고!”
그는 마치 발악하는 것처럼 절규했다.
“용병이면 용병답게 일을 하란 말이다! 빨리 카이트 에인헤랴르를 해치워……!”
“…….”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후방의 숲 속으로 시선을 향했다.
“네 이름이 슈데르츠인가?”
“윽……!”
잠시 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 명 정도의 흑의인(黑衣人)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이라 잘 눈에 띄지 않았지만, 옷자락에 검은색 늑대가 새겨져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슈데르츠인 것 같았는데, 열 명 중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것 같았다.
‘8서클이군.’
역량을 확인한 뒤, 나는 다시 엘덴비움 백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 녀석을 해치운 뒤 상대해 줄 테니.”
“……!”
다시 눈이 마주치자 엘덴비움 백작이 숨을 삼켰다.
“이, 이봐.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너무 시끄럽다. 목소리를 낮춰라.”
“슈데르츠! 흑랑기사단!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빨리 이 녀석을 뒤에서 치라고!”
엘덴비움 백작은 슈데르츠 등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걸 깨닫고 엘덴비움 백작이 몸을 벌벌 떨었다.
“자, 잠깐, 카이트, 카이트 공자님,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살려, 살려…….”
단말마의 비명조차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단번에 숨통을 끊었다.
그렇게 엘덴비움 백작을 해치운 뒤, 나는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
슈데르츠가 부하들과 함께 입을 다물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흑랑기사단이라고 했나.”
“…….”
니얼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하극상을 달성한 뒤 세력을 키워 나가고 있는 신진 용병단이라고 했다.
열 명밖에 없는 걸 보니 정예들만 모아서 온 모양이었다.
“한 명이 대표로 덤비든, 열 명이 동시에 덤비든 해라.”
“……!”
그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봤다.
그리고… 제각각이긴 했으나 다들 검을 치켜들었다.
“동시에 덤비기로 한 건가?”
그렇게 확인했을 때.
슈데르츠가 입술을 깨물며 왼손을 치켜들었다.
“너희들, 물러서라.”
“네?”
“갑자기 무슨…….”
“나 혼자 한다.”
나머지 아홉 명이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다 함께 협공해야 이길 수 있다고 하셨으면서…….”
“물러서!”
갑작스러운 호통에 다들 뒷걸음쳤다.
그리고 슈데르츠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섰다.
“내가 대표로 싸우겠소.”
“그래, 알겠다.”
슈데르츠가 장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했다.
“날카롭고 견고하군.”
“고맙소.”
나는 수라홍련검으로 염검(炎劍)을 펼쳤다.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검을 보면서 슈데르츠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위축되지 않고 달려들었다.
“흐읍……!”
쿵!
강하게 땅을 밟으면서 검을 휘둘렀다.
수많은 실전을 겪으면서 강해져온 사람만이 펼칠 수 있는, 매서운 공격이었다.
“…….”
휘익.
나는 발을 움직이지 않은 채 검을 휘둘렀다.
수라홍련검의 불꽃이 오러 블레이드를 모조리 집어삼켰고… 오러에 의해 보호되지 못한 슈데르츠의 검은 결국 부러지고 말았다.
“…….”
슈데르츠가 허탈한 표정으로 부러진 검을 쳐다봤다.
나는 그를 쳐다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검의 차이가 컸다. 내 검이 평범한 검이었다면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었겠지.”
“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을 거요.”
그렇게 말하면서, 슈데르츠가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자기가 대표로 혼자 나서서 싸웠으니… 나머지 부하들은 살려 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부하들을 끔찍이 아끼는 편인가?”
내가 질문하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오.”
“그러면 어째서지?”
“열 놈이 죽는 것보다 한 놈이 죽는 편이 더 낫지 않겠소.”
얼핏 듣기에는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부하들을 희생시키고 자기 혼자 도망치려 했던 귀족들은, 이런 당연한 말을 절대로 입에 담지 못할 것이다.
“슈데르츠, 하극상을 했다고 하던데.”
“맞소.”
슈데르츠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언젠가 루스베르그 후작에게도 하극상을 해서, 북부 전체에 이름을 날릴 생각이었소.”
“꿈이 컸군.”
“이제는 더 이상 의미 없는 꿈이오.”
“그럼 조금만 더 꿈을 꿔봐라.”
“……?”
나는 검을 다시 허리에 차면서 말했다.
“또다시 하극상을 시도할 기회를 주지.”
“무슨 소리요?”
“산 아래에는 아직도 지휘관급 귀족들이 남아 있다. 나는 놈들 얼굴을 잘 모르니, 하나하나 분별하기가 쉽지 않아.”
허를 찔린 슈데르츠를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생포해라. 할 수 있겠나?”
“……!”
슈데르츠는 물론, 다른 이들도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비로소 이해한 것이다.
“카, 카이트 공자, 당신은 대체…….”
“하극상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언제든지 시도해 봐도 좋다. 쉽지는 않겠지만.”
“……!”
그들은 혼란에 빠진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이런 제안을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슈데르츠.”
“카, 카이트 공자, 님…….”
떨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슈데르츠를 향해.
나는 다시 한번 말을 건넸다.
“내 기사가 되어서, 북부일통(北部一統)을 위해 헌신해라.”
슈데르츠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본 뒤… 한쪽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슈데르츠의 모습을 보고, 나머지 아홉 명도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제각각 소리치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여라. 신속하게 처리하도록.”
“네……!”
내 명령에 그들은 즉각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무림에 있었을 때도 저런 녀석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 회주님.
– 뭐냐, 총관.
– 저런 떠돌이 들개 같은 놈들도 천룡회에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칼부림이나 하던 놈들입니다.
– 총관, 자네는 저들하고 제대로 눈을 마주쳐 본 적이 있나?
– 네?
– 밑바닥 흑도들 중에도 눈빛이 썩어 있는 놈이 있고 그렇지 않은 놈들이 있지. 저 녀석들은 후자에 해당된다.
– 회주님…….
– 저 녀석들의 눈빛은 악에 받쳐 있었어.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며 살아왔기에, 조금이라도 위로 올라가고 싶어서 발버둥쳐온 놈들이다.
– 회주님 눈에는 그렇게 보이시는 겁니까?
– 그래, 자기들을 인정해 주는 사람 밑에서 제대로 된 목표를 갖게 된다면 누구보다 치열하고 성실하게 싸울 놈들이지.
– 회주님을 위해 싸우는 칼이 될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 나를 위해 싸우는 것이든, 자기들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이든, 그건 중요치 않아. 보다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칼이 된다는 것이 중요하지.
– 보다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칼…….
– 그런 확신만 가질 수 있다면, 그들은 망설임 없이 올곧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칼이 될 수 있을 거다.
‘싸워 봐라, 슈데르츠.’
불타는 평원으로 달려 나가는 녀석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말을 건넸다.
‘너희는 북부일통의 선봉장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 흑랑기사단은 귀족들의 심장부를 찌를 것이다.
흔들림 없는, 한 자루의 칼날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