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Slayer Sword Demon RAW novel - Chapter 64
▣ 64화. 검마의 위세 (2)
“빨리 마차에 실어라! 이것도, 이것도!”
“후, 후작님, 너무 많습니다.”
루스베르그 후작은 도망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뒤늦게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 무식한 놈들! 이것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 건지 모르는 거냐! 이러니까 북부인들이란……!”
남쪽에서 사들인 그림 등의 예술품들.
루스베르그 후작은 그것들을 모조리 마차에 실은 뒤 출발하려고 하는 중이었다.
황제파 귀족들의 영향으로 ‘귀족적인’ 취미에 중독된 루스베르그 후작 입장에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보물들이었으니까.
“이게 다 에인헤랴르 놈들의 손에 넘어간다고 생각해 봐라! 놈들은 예술 같은 건 이해 못 해! 다 부숴 먹을 거다! 아니면 헐값에 팔아넘기든가!”
“그, 그래도 지금 마차 숫자도 부족한데, 이걸 다 실으면 이동 속도가…….”
“적들이 우리를 따라잡을 수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것!”
루스베르그 후작은 부하들을 윽박질렀다.
“놈들이 방어선을 돌파했다고 해도 이 저택까지 오려면 이틀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아직 여유는 있단 말이다!”
“그래도…….”
“됐으니까 빨리 짐이나 실어!”
목소리를 높인 뒤, 루스베르그 후작은 자기 전용 마차에 올라탔다.
사실 루스베르그 후작도 최대한 빨리 도망쳐야 한다는 건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거금을 투자해서 모아놓은 예술품들을 버리고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남쪽 귀족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것도, 다른 북부 귀족들과는 달리 ‘문화’를 이해하는 귀족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란 말이다. 예술품들을 내던진 채 도망쳤다고 알려지면…….”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 루스레브르그 후작은 남쪽으로 도망쳐서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황제파 귀족에게 몸을 의탁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인헤랴르 쪽에서도 남쪽까지 쫓아오지는 못할 테니, 거기서부터 재기를 도모하면 된다.
“예술품들을 귀족들에게 선물하면서 병력을 빌리는 방법도 있어!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단 말이다!”
이제부터는 정치적인 싸움이 된다.
에인헤랴르에게 부당한 침략을 받았다고 남쪽 귀족들에게 호소하면서 지지를 모아야 한다.
물론 그들은 에인헤랴르와의 직접 충돌을 꺼리겠지만… 정치 공작으로 여론을 만들면 가능할 것이다.
“그래, 북부대공 본인도 아니고, 그 아들놈에게 짓밟힌 채 끝날 수는 없지…….”
루스베르그 후작은 이를 갈았다.
그리고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여봐라! 슬슬 출발시켜라!”
“알겠습니다!”
말을 탄 호위대에 둘러싸인 채,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술품들을 실은 짐마차들도 뒤에서 따라올 것이다.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두고 봐라, 카이트 에인헤랴르…….”
까드득, 이를 갈면서 루스베르그 후작이 재기를 다짐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마차가 덜컹하고 멈췄다.
“뭐하는 거냐!”
깜짝 놀란 루스베르그 후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바깥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 후작님, 앞쪽에…….”
“대체 뭐냐! 확실히 말해!”
“앞쪽에, 바이콘을 탄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바, 바이콘?”
바이콘은 머리에 뿔이 2개 달려 있는 시커먼 말이다.
몬스터는 아니지만 ‘불순’을 상징하는 짐승이라 사람들이 꺼린다.
차르노보그 같은 괴인(怪人)은 일부러 바이콘을 길들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잠깐, 설마…….”
설마 차르노보그가 살아 있던 것일까.
루스베르그 후작은 흥분에 휩싸였다.
“차, 차르노보그 님!”
차르노보그가 살아 있었다면 큰 힘이 된다.
카이트 에인헤랴르를 막아 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원군의 등장에 루스베르그 후작은 다급히 마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도와주러 오셨군요!”
“아닌데.”
하지만.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건 사악한 인상의 노인이 아니었다.
아버지처럼 검은색 머리카락을 지닌, 냉철한 인상의 청년.
그가 바이콘 위에 올라탄 채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너를 잡으러 온 거다, 루스베르그 후작.”
“…….”
루스베르그 후작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저 남자가 이곳에 있는 걸까.
“카, 카이트 에인헤랴르……?”
“그래, 저번에도 얼굴을 본 적이 있을 텐데.”
“어, 어떻게, 벌써 여기에…….”
여기까지 오려면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도 이틀 이상 걸린다. 물론, 아무도 앞길을 가로막지 않았을 경우의 얘기다.
“너, 너는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 아직 저쪽 평야에 있어야 하는데, 어째서……!”
“명마(名馬)를 얻었거든.”
“며, 명마?”
“이 녀석 말이야.”
카이트가 바이콘의 뒷목을 쓰다듬자, 바이콘이 콧김을 불며 응답했다.
서로 마음이 통한 듯한 모습이었다.
“바, 바이콘을 타고 와서, 가능했다는 건가?”
“그래, 이 녀석은 지치지도 않더라고.”
“대, 대체 바이콘을 어떻게 길들였기에…….”
“그냥 처음부터 나를 잘 따르던데.”
“……!”
루스베르그 후작은 전율했다.
“아, 악마…….”
“뭐?”
“너, 너는 악마다! 바이콘을 그렇게 길들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손가락을 치켜들면서 루스베르그 후작은 소리쳤다.
“이 사악한 놈! 물러가라! 물러가란 말이다, 이 악마……!”
부들부들 떨면서, 미친 듯이 절규했다.
눈앞에 있는 규격 외의 존재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너 같은 놈은 이 세상에서 있어서는 안 된다! 당장 사라져라!”
“바이콘 타고 다니는 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건가? 다들 싫어하네.”
카이트가 유감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쯧, 어쩔 수 없지.”
“……!”
바이콘을 탄 채 카이트가 마차 쪽으로 다가왔다.
호위대들이 다급히 검을 뽑았지만, 다들 겁을 먹은 상태였다.
“뭐, 뭐하는 거냐. 어서 저 악마를 막아라!”
“후, 후작님, 하지만…….”
“저런 악마를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전의를 상실한 호위대들이 알아서 길을 비켜 주기 시작했다.
바이콘을 탄 채 유유히 마차로 다가오는 카이트를 보면서, 루스베르그 후작은 비명을 질렀다.
“히익……!”
마차 안으로 숨었다.
벌벌 떨면서 몸을 움츠렸다.
“이건 꿈이다, 악몽일 거다……!”
“이건 현실이다, 루스베르그 후작.”
“억……!”
콰쾅!
폭음과 함께 마차가 박살 났다.
루스베르그 후작은 피투성이가 된 채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으윽……!”
먼지 사이로 카이트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이콘에 올라탄 채 검을 치켜들고 있는 카이트의 모습은, 그야말로 악마와도 같았다.
“아, 악마…….”
“자꾸 그렇게 부르지 마라.”
짧게 말하면서 카이트가 검을 휘둘렀다.
“나는 검마니까.”
절망에 휩싸인 루스베르그 후작에게, 무자비한 칼날이 떨어져 내렸다.
* * *
루스베르그 후작이 죽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저항하던 병사들도 차례차례 백기를 들었다.
아직 병력 자체는 많이 남아 있는 상태였지만, 루스베르그 후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들 전의(戰意)를 상실해 버렸다.
“사후 처리는 제가 프리드레이프 공자님과 함께 진행하겠습니다, 카이트 공자님.”
루스베르그 후작의 저택에 도착한 니얼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루스베르그 후작과 중소 영주들의 연합을 이렇게 빨리 제압하다니, 북부일통을 생각보다 빨리 실현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아직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이야.”
“첫걸음이지만, 아주 큰 걸음이죠.”
니얼은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
북부의 대귀족인 루스베르그 후작을 제압했으니, 북부를 하나로 만드는 것을 꿈꾸는 니얼 입장에서는 상당히 기쁜 일일 것이다.
“이제 북부의 고만고만한 세력들은 더 이상 에인헤랴르에 대들 생각을 하지 못할 겁니다. 그동안 중립을 지켜 왔던 세력들도 에인헤랴르에 복종하겠죠. 뿐만 아니라…….”
니얼이 벽에 걸려 있는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카이트 공자님이 차르노보그를 쓰러뜨렸으니, 음지에서 활동하던 반사회적 세력들도 더 이상 함부로 날뛰지 못할 겁니다.”
“그런가?”
“네, 북부 암흑가에서 차르노보그의 위상은 절대적이었으니까요. 그 차르노보그를 카이트 공자님이 쓰러뜨렸으니, 다들 몸을 사리게 될 겁니다.”
그러고 보니 자치 도시 크란켈의 유흥업소들이 차르노보그에게 상납금을 바치고 있었다는 얘기도 들었던 것 같다.
“지금 카이트 공자님이 크란켈에 찾아가면 유흥업소 대표들이 알아서 튀어나와 잘 좀 봐 달라고 뇌물을 바칠 겁니다.”
“얼마 전에 내가 찾아갔을 때는 호구 취급을 당했는데 말이야.”
“하하, 이제는 그럴 일이 없겠죠. 어디를 가든 공자님을 얕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처음 이쪽 세계에 왔을 때만 해도… 어딜 가도 얕잡아 보였다.
어느 정도 활약을 한 이후에도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북부에서는 말이다.
“이제 북부에서 카이트 공자님에게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거의 없습니다. 루스베르그 후작은 죽었고, 중소 영주들은 공자님에게 바싹 엎드리고 있고… 피어너 가문도 공자님에게 우호적이니까요.”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곳이 있지.”
“크레스니크 말이군요.”
귀살마가 크레스니크.
에인헤랴르 및 피어너와 함께 북부 3가문으로 꼽히는 명가이지만, 아직도 나는 그곳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곳에 파견되어 있다는 이바르 에인헤랴르에 대해서도, 아는 게 별로 없다.
“니얼, 크레스니크가 계속 지금처럼 조용할 것 같나?”
“글쎄요. 그 부분에 관해서는…….”
니얼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을 때.
어윈이 급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카이트 님!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뭐지?”
숨을 헐떡이면서 어윈이 소리쳤다.
“북쪽에서 대공 전하가 드래곤들과의 싸움을 마무리 지으셨다고 합니다!”
* * *
우우우우…….
울음소리 같은 바람 소리가 귀를 울렸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대지 위에서, 시구르드는 북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
눈 앞에 펼쳐진 설원(雪原)은 본래 하얀색이어야 했다.
하지만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곳이 많았다.
그동안 흐른 피가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 시구르드는 천천히 걸어갔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 주위가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설원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사체들이 제대로 보이게 된 것이다.
“…….”
인간의 시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전사자 자체가 별로 많지 않았고, 수습할 수 있는 유해는 대부분 수습했기 때문이다.
브레스에 의해 그 자리에서 증발했다든가, 그런 경우에는 수습 자체가 불가능했지만.
“…….”
오히려.
드래곤의 사체가 더 많았다.
거대한 검상(劍傷)에 쓰러진 드래곤들.
대부분 소드 마스터의 공격에 쓰러진 드래곤이다.
그중에서 절반 이상이 시구르드의 검에 쓰러졌다.
우우우우…….
바람 소리가 계속 시끄러웠다.
눈보라 속에서 시구르드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저 멀리 산맥 위에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존재’와 눈을 마주쳤다.
“…….”
이끼로 뒤덮인 고목(古木)을 연상케 하는, 갈색과 녹색이 뒤섞인 존재.
여기서 굴러다니는 일반 드래곤들하고는 격(格)이 다른 에인션트 드래곤.
독룡(毒龍) 니드호그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
눈이 마주쳤지만 니드호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자기 파벌의 드래곤들이 떼죽음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니드호그는 저 너머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언젠가 있을 인룡대전(人龍大戰)까지, 저 에인션트 드래곤은 전장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대공 전하.”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관 역할을 하는 노기사(老騎士) 볼테온이었다.
“귀환 준비가 끝났습니다.”
“알겠다.”
“그리고…….”
“뭐지?”
시구르드가 묻자, 볼테온이 작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카이트 님이 루스베르그 후작을 해치우고, 중소 영주들을 완전히 복속시켰다고 합니다.”
“…….”
“여러 얘기가 들려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카이트 님이 잘 마무리를 지었나 보군요.”
시구르드는 따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볼테온은 웃으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
“하지만, 기사 중에는 카이트 님이 월권행위(越權行爲)를 했다는 목소리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까 보니 황룡기사단의 아그나르 단장도 부정적으로 보고 계신 것 같더군요.”
“…….”
“대공 전하가 부재중인 틈을 타서 너무 멋대로 움직이지 않았나… 그런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시구르드는 다시 북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산맥 위에 있었던 독룡 니드호그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공 전하.”
“고틀란드로 돌아간다.”
차갑게 대답하며 시구르드는 등을 돌렸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을 확실히 해야지.”
수많은 드래곤들의 사체를 뒤로 하고.
북부대공이 아들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