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Slayer Sword Demon RAW novel - Chapter 71
▣ 71화. 귀살마가 (4)
우리는 디나르 고개를 넘어 크레스니크 가문의 영지 안으로 진입했다.
블라디미르, 세르게이, 드미트리 세 명의 형제들이 앞장서서 우리를 안내했다.
“설마 이렇게 일이 잘 풀릴지는 몰랐습니다.”
“그러게요. 크레스니크의 영지 내부로 안내를 받다니.”
어윈과 모르트가 내 옆에서 떠들어 대자, 슈데르츠가 이의를 제기했다.
“이건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뭐?”
“슈데르츠, 그게 무슨 소리지?”
“그동안 계속 폐쇄적이었던 크레스니크 가문에서 왜 공자님을 초대하지? 함정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해.”
슈데르츠의 의견에 루살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솔직히 저 같으면 이런 초대에는 응하지 않습니다.”
“자, 잠깐만.”
모르트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설마 저놈들이 카이트 님을 데려가서 죽이기라도 하겠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 크레스니크는 그렇게 막나가는 가문이 아니야. 북부를 대표하는 명문가 중의 하나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명분은 어떻게든 만들면 되는 거지. 공자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면 돼.”
슈데르츠가 말하자 어윈과 모르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죄를 뒤집어씌운다? 그래, 그런 식이라면…….”
“하긴 카이트 님도 비슷한 방식으로 일을 해결한 적이 여러 번 있었지…….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지는 않으셨지만.”
“공자님이 크레스니크 공작을 죽이려 했다든가, 방법은 얼마든지 있단 말이지.”
“카이트 님이라면 갑자기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루살카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며 나를 쳐다봤다.
“카이트 님, 정말 이대로 따라가도 되는 건가요? 저는 솔직히 걱정이 됩니다.”
“다들 걱정이 많군.”
나는 담담히 말했다.
“놈들이 함정을 파서 나를 치려 한다고 가정해 보자.”
“네…….”
“그러면 나한테도 놈들을 칠 명분이 생기는 거 아니냐?”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윈도, 모르트도, 슈데르츠도, 루살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그게 그렇게 됩니까?”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긴 한데…….”
“카이트 공자님이니 하실 수 있는 말이겠군요.”
“보통 사람의 발상이 아닙니다…….”
애초에 크레스니크가 어떤 놈들인지조차 아직 파악이 안 되었다.
시구르드는 놈들이 배룡주의와 관련이 있을 거라 의심하고 있었지만, 명확한 증거를 확보한 건 아니었다.
크레스니크가 별다른 비밀 없이 그냥 숨어 살고 있을 뿐인 놈들이라면 조용히 인사나 하고 오면 된다. 하지만 놈들이 나쁜 마음을 먹고 나를 해치려 하고 있다면 그걸 기회 삼아 반격하면 되는 것이다.
“너희들은 얌전히 따라오면서 주위 구경이나 해. 쉽게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네…….”
크레스니크의 영지는 높은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였다.
상당히 땅이 비옥해 보였는데,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마을들을 살펴봐도 물자가 빈곤한 지역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원래 살던 세상과 비교하자면 사천 지역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들락날락하기는 어렵지만, 비옥한 땅 덕분에 상당히 풍요로운 지역…….’
기후 자체도 고틀란드 일대보다 훨씬 따뜻했다.
피어너 가문의 얼스터 지역도 비교적 따뜻한 편이었으니… 에인헤랴르 가문만 아주 열악한 곳에 터를 잡은 셈이다.
‘에인헤랴르의 조상님들은 왜 굳이 그런 땅을 본거지로 삼았는지 모르겠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크레스니크의 영지를 달렸다.
저 멀리 크레스니크의 본거지인 ‘쿠드라크 성’이 보이고 있었다.
* * *
“카이트 공자님이 크레스니크의 영지 내부로 들어갔다고?”
“네, 그렇습니다.”
연락을 들은 니얼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니얼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소소한 충돌 이후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크레스니크의 영지 안으로 들어갔다니.
“카이트 공자님이 무슨 생각이 있는 건가?”
“그, 글쎄요.”
“으음…….”
카이트 특유의 파격성을 생각하면, 크레스니크의 진짜 모습을 직접 살펴보려는 대담한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크레스니크 내부에 직접 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다.
“슈데르츠와 루살카도 데려가서 그나마 낫긴 한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함께 갈 걸 그랬군.”
크레스니크에는 9서클의 매직 마스터인 블라디미르가 있다.
8서클의 실력자들도 수두룩할 테고, 만만치 않은 상대다.
“어쩔 수 없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여기를 비울 수는 없지. 카이트 공자님이 뒷일을 맡기셨으니까.”
남쪽의 황제파 귀족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예의주시해야 한다.
니얼은 함부로 자리에서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였다.
“일단… 고틀란드에 있는 북부대공 전하에게 전서구를 보내야겠어.”
에인헤랴르의 최고 권력자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니얼은 펜과 종이를 꺼내들었다.
* * *
크레스니크의 본거지인 쿠드라크 성은 산 위에 세워진 성이었다.
뾰족한 탑 여러 개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어두침침한 분위기였다.
“귀신이 나올 듯한 분위기군요.”
“아니, 이 경우에는 흡혈귀겠지. 옛날에 크레스니크 가문에서 퇴치했다는 놈들 말이야.”
모르트와 어윈이 성을 감상하며 수군댔다.
그러자 블라디미르가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일부 호위병만 빼고 이곳에 남아 줬으면 좋겠군. 숙소는 따로 준비해 주지.”
“블라디미르 공자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카이트 님을 지켜야…….”
“보다시피 그렇게 큰 성이 아니야. 크레스니크 본가와 일부 가신들만 머무르는 곳이라서 말이지. 오십 명이 넘는 기사들을 받아들이는 건 곤란해.”
“음…….”
블라디미르의 말대로, 내 부하들이 다 들어가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카이트 님, 어떻게 하실까요?”
“어쩔 수 없지. 어윈, 모르트, 슈데르츠, 루살카… 이렇게 네 명만 들어간다. 나머지는 바깥에서 대기해.”
나는 나머지 부하들을 대기시킨 뒤, 가장 믿음직스러운 네 녀석만 데리고 가기로 했다.
어윈과 모르트는 실력은 부족해도 정규 기사 출신인 만큼 여러 모로 도움이 되고, 8서클인 슈데르츠와 루살카는 전력으로써 쓸 만하니까.
“이쪽으로.”
크레스니크 측에서도 성 안으로 들어가는 건 블라디미르, 세르게이, 드미트리 뿐이었다.
여담이지만 세르게이와 드미트리는 나하고 싸우다가 입은 부상 때문에 여기까지 계속 마차를 타고 왔다. 지금은 마차에서 내려 자기 발로 걷느라 자꾸 끙끙대고 있었다.
‘음침한 성이군.’
겉모습도 음침한 느낌이었는데, 내부는 정말 대놓고 음침했다.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듯했고, 벽에 걸려 있는 등불도 별로 밝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블라디미르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치 시체와 대면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군. 이쪽이다.”
블라디미르는 동생들과 함께 우리를 안내했다.
여기로 오는 길에 들은 말에 의하면, 크레스니크 본가 사람 중에서 현재 이곳에 머물고 있는 건 크레스니크 공작 한 사람뿐이라고 한다.
자식들은 각자 변방에 나가서 관문을 지키고 있는데, 지금처럼 종종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린다는 것 같았다.
“제1공자님, 안녕하십니까.”
“수석 집사, 오랜만이군.”
블라디미르는 초로의 집사와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준비가 되셨냐? 미리 연락을 드렸는데.”
“그것이… 지금 주무시는 중입니다.”
“주무신다고?”
“네, 요새는 많이 피곤해하셔서…….”
“흠, 어쩔 수 없군.”
얘기를 듣고 블라디미르가 우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게 됐군.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한동안 휴식을 취해 줄 수 있겠나?”
“상관없어. 이왕이면 여독을 푼 다음에 인사를 드리는 게 낫겠지.”
“양해해 줘서 고맙군.”
결국 우리는 집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방으로 안내받았다.
“카이트 공자님은 이쪽 방을 쓰시고, 나머지 호위 기사님들은 이쪽 방들을 쓰시면 됩니다. 때가 되면 말씀을 드릴 테니, 편히 쉬고 계시지요.”
나에게 주어진 방은 비교적 편안한 분위기의 침실이었다.
바깥은 어두침침한 분위기였지만,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침실은 그냥 평범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카이트 님.”
집사들이 물러나자, 부하들이 내 방에서 제각각 의견을 말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이 성 자체도 너무 음침해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차르노보그 스승님의 거처와 비슷한 분위기입니다. 수상합니다.”
다들 귀살마가 크레스니크의 분위기에 많이 겁을 먹은 듯했다.
“알았으니까, 너희도 쉬어라. 그동안 휴식을 취할 새가 없었으니까.”
“카이트 님, 그럼 호위는…….”
“됐으니까 그냥 쉬고 있어.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알겠습니다.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생기시면 꼭 불러 주십시오.”
어윈이 고개를 숙인 뒤 나머지 녀석들을 데리고 나갔다.
‘확실히 수상하긴 하단 말이지.’
무림에서도 이렇게 분위기를 잡고 있는 놈들은 흔치 않았다.
마교(魔敎) 쪽이라든가… 웬만큼 사악한 놈들이 아니고서야 자신들의 본거지를 이런 분위기로 꾸며 놓지 않는다.
‘자기 집을 이렇게 꾸며 놓았다는 건, 정신 자체가 상당히 비뚤어져 있다는 뜻이지.’
귀살마가 크레스니크.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집안인 걸까.
나는 궁금증을 느끼면서 침대 위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호출이 있을 때까지 운기조식이나 하고 있을 생각이었다.
* * *
예상과는 달리, 크레스니크 공작과의 면담에는 시간이 걸렸다.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나니,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오늘 만나는 건 어려울 것 같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결국 하룻밤 묵고 내일 만나는 것으로 얘기가 진행되었다.
블라디미르는 상당히 미안해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밤이 깊어지자, 나는 슬슬 방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 경지면 기척을 숨기고 성안을 탐색하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놈들의 마법이 내 존재를 감지할 수도 있다는 점은 고려해야 했다.
“……?”
바로 그때.
아주 짧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용히 문이 열리면서, 바깥에서 불침번을 서던 루살카가 얼굴을 내밀었다.
“공자님.”
“뭐지?”
“이 사람이…….”
루살카 옆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아까 만났던 수석 집사였다.
“공자님, 잠시 와 주셨으면 합니다. 최대한 조용히.”
“…….”
목소리를 낮추면서,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살카.”
“네, 공자님.”
“계속 여기 있어.”
“알겠습니다.”
차르노보그 밑에 있었기 때문인지 루살카는 눈치가 빨랐다.
앞으로 루살카는 내가 계속 방 안에 있는 것처럼 불침번을 서고 있을 것이다.
“이쪽입니다.”
나는 수석 집사를 따라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성안은 아주 조용했다. 복도 바닥에 양탄자가 깔려 있어 발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한참을 걸은 뒤 수석 집사는 아무것도 없는 벽에 손을 댔고, 소리 없이 비밀통로가 출현했다.
‘피어너 가문에도 이런 게 있었는데… 이쪽 가문들은 다 이런 걸 하나씩 만들어 놓나?’
안으로 들어가자 저절로 문이 닫혔다.
수석 집사의 긴장이 조금 누그러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집사,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만나셔야 되는 분이 있습니다.”
“그게 누군데?”
“금방 아시게 될 겁니다.”
조금만 걸으니 비교적 밝은 공간이 출현했다.
작은 서재 같은 곳이었는데, 우아한 나무 의자 위에 백발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드디어 와 줬군.”
노인에게서는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반박귀진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차르노보그 때하고는 느낌이 달랐다.
“내 몸을 탐색하지 말게. 이미 서클이 없는 몸이니까.”
“…….”
놀랍게도 노인은 내가 자신의 마력을 확인하려 들었다는 걸 눈치챘다.
이건 차르노보그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만나서 반갑군. 내가 바로… 귀살마가 크레스니크의 가주인 일리야 크레스니크일세.”
노인의 목소리에서는 품격이 느껴졌다.
몸이 안 좋다는 얘기와는 달리 눈빛도 살아 있었다.
“용살검가 에인헤랴르의 장남, 카이트 에인헤랴르입니다.”
나는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일리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구르드의 장남이 훌륭하게 성장한 것 같아서 기쁘군.”
“아버지를 잘 아십니까?”
“물론이지. 두세 번 만나 봤을 뿐이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그 남자를 동지처럼 생각하고 있었네.”
그렇게 말하면서 일리야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카이트, 이렇게 자네가 찾아온 건 나에게 있어서 불행이기도 하고 행운이기도 하네.”
“어째서 그렇지요?”
“자네는 블라디미르가 선의로 자네를 데려왔다고 생각하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꿍꿍이속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럼 얘기가 빠르겠군.”
일리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장남인 블라디미르는 자네를 이용하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온 거네.”
“어떤 식으로 이용하려는 겁니까?”
“자네가 나를 죽였다고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것이지.”
“…….”
나한테 일리야를 죽였다는 죄를 뒤집어씌운다.
그건 실제로 일리야가 죽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누명이다.
“공작님, 그렇다면…….”
“블라디미르는 나를 죽일 생각이네.”
어째서 일리야가 나를 몰래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부탁하네, 카이트.”
일리야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블라디미르를 처단해 주게. 지금 이곳에서 그 녀석을 막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자네뿐이네.”
귀살마가 크레스니크의 수장이, 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