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Slayer Sword Demon RAW novel - Chapter 80
▣ 80화. 네 마리의 드래곤 (1)
우리는 계속 서쪽으로 말을 달렸다.
중간에 마을에 들러 휴식을 취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마을에 있을 때 드래곤들에게 습격당하면 골치가 아프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폐허가 된 마을을 발견했다.
“카이트 공자님, 몬스터들에게 습격을 받은 뒤 버려진 마을로 보입니다.”
마을 내부를 들여다본 슈데르츠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살지 않게 된 지 한참 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오늘 밤은 여기서 묵도록 하지. 이왕이면 지붕 있는 곳에서 쉬는 게 나으니까.”
“알겠습니다.”
우리는 비교적 깨끗한 상태로 남아 있는 건물을 찾아서 숙소로 삼았다.
아나스타샤의 수행원들은 간만에 지붕 있는 곳에서 잠들 수 있게 되어서 안도하는 눈치였다.
* * *
깊은 밤.
외곽에 앉아 북쪽 하늘을 지켜보고 있자, 배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형님도 불침번을 서시는군요.”
이바르가 지팡이를 짚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불침번 정도는 전부 아랫사람들한테 맡기셔도 될 텐데요.”
“난 그렇게 안 해.”
무림에서 부하들이 많았을 때도, 나는 항상 최소 한 시진 이상은 불침번을 섰다.
딱히 부담을 나눠 가지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나만큼 야간 경계를 잘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종종 어둠 속에 숨어 야습의 기회를 노리던 적들을 발견할 때가 있어서, 나름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으셨잖습니까?”
“지금은 그렇다는 얘기지.”
“그렇군요.”
“너야말로 왜 나온 거지? 너는 가서 자.”
“그냥, 잠에서 깨서 말입니다.”
이바르가 내 근처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지팡이를 옆에 내려놓고 자기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몸은 좀 괜찮나?”
“괜찮습니다, 카이트 형님.”
내 질문에 이바르는 미소를 지었다.
“이래 봬도 체력은 있는 편입니다.”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결국 드래곤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군요. 당장이라도 드래곤들이 우르르 나타날 것처럼 말하더니.”
“샤가르디오스가 허풍을 떤 것일 수도 있고, 드래곤들 쪽에서 아직 준비가 안 된 것일 수도 있지.”
“이대로 오비르 고개까지 아무 일도 없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
이바르의 목소리가 조금 진지해졌다.
“카이트 형님.”
“뭐지?”
“만약 정말로 드래곤이 여러 마리 나타나고, 그걸 카이트 형님이 격퇴한다면… 카이트 형님은 정말로 북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가 되시겠군요.”
“…….”
“아버지가 형님을 정식 후계자로 지정하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군요.”
이바르가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바르.”
“네?”
“나를 너무 떠보려 하지 마라.”
“…….”
내가 차갑게 말하자 이바르가 입을 다물었다.
“너는 야심이 있는 놈이야. 차기 북부대공 자리를 진지하게 노리고 있지.”
“…….”
“예카테리나의 마음을 얻어 크레스니크 가문을 장악하려 했던 것도 그 일환이었을 텐데.”
침묵하는 이바르를 향해, 나는 계속 말했다.
“너는 이번 여정을 통해 내 능력과 됨됨이를 파악하려고 하는 중이야. 앞으로 나를 상대로 어떻게 싸울지 작전을 세우기 위해.”
“형님…….”
“그런 게 아니면 굳이 나를 졸졸 따라올 이유도 없지.”
현재 차기 후계자 쟁탈전은 이바르가 가장 앞서 있고, 헤스테인이 그 뒤를 쫓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내가 급부상하고 있다. 그동안 망나니짓만 하고 다니던 장남이 갑자기 치고 나오니, 이바르 입장에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분명히 말해 두지, 이바르.”
“네?”
“나는 북부대공 자리에 큰 관심이 없어.”
“…….”
이바르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누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니까.”
“카이트 형님,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 부하한테도 종종했던 얘기야.”
“…….”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너하고 차기 북부대공 자리를 놓고 다툴 생각은 없어.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라.”
나는 이바르가 차기 북부대공이 되어도 아무 상관없었다.
이바르가 나를 견제한답시고 이상한 짓을 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
하지만 이바르의 표정은 별로 편치 않았다.
나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카이트 형님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해 안 해도 된다. 그냥 알아 두기만 해.”
“정말로 이해하기 어렵군요…….”
이바르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카이트 형님.”
“뭔데.”
“제 꿈은 시구르드의 이름을 잇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야?”
시구르드는 우리의 아버지가 아닌가.
“카이트 형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시구르드는 대대로 에인헤랴르 가문의 가주가 되는 사람한테 주어지는 이름입니다.”
“…….”
“아버지도 어릴 때는 다른 이름이었지만, 분노검(憤怒劍) 그람을 계승하면서 시구르드로 이름을 바꾸셨죠.”
그건 몰랐다.
“본래 시구르드는 에인헤랴르의 전설적인 영웅의 이름… 그람을 들고 악룡 파프니르를 격퇴한 공적을 세우신 분입니다.”
“…….”
“저는 예전부터 그 이름을 동경했습니다. 에인헤랴르의 가주가 되어 시구르드의 이름을 습명(襲名)하고 싶었죠.”
이바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기 위해서, 이십 년 넘게 계속 노력해 왔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말이죠.”
“그래서?”
“그런데… 형님은 몇 달 만에 저를 앞질러 버리시는군요.”
이바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형님이 어떻게 그 정도로 강해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정말로 형님이 부럽습니다.”
“뭐가 부럽지?”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형님처럼 싸우지는 못할 테니까요.”
“…….”
“이 다리로는 검을 휘두르지 못합니다. 뱀처럼 기어 다니면서 싸운다면 모르겠지만요.”
그렇게 말하면서 이바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이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십여 년 동안 필사적으로 노력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 발뭉도 받을 수 있었죠.”
아직도 허리에 차고 있는 발뭉을 만지면서, 이바르가 말했다.
“하지만 형님은 고작 몇 달 만에 저보다 우위에 서셨습니다. 용살검가 에인헤랴르의 장남다운 무훈(武勳)을 세우셔서 말입니다.”
“…….”
“결국 용살검가의 후계자는 드래곤을 상대로 멋지게 싸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겁니다. 저 같은 놈이 후계자 자리를 탐낸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바르가 내 앞에서 이런 속내를 드러내는 건 처음이었다.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 속내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봐, 이바르.”
“네, 형님.”
하지만, 나는 이바르에게 위로하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헛소리하지 마라.”
“네?”
“전장에 나서서 멋지게 싸우고 싶었던 거라면 다른 길을 걸었어야지.”
“가, 갑자기 무슨…….”
“너는 일찌감치 에인헤랴르에서 나갔어야 했어.”
“……?”
이바르가 눈을 깜박였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크레스니크에 가서 마법을 배우면 됐을 거 아냐. 그럼 지금쯤 최소 6서클 이상은 되었을 것 같은데.”
“……!”
내 말을 듣고 이바르가 숨을 삼켰다.
“이바르, 딱히 검을 들고 있어야만 드래곤과 싸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마법을 날려도 얼마든지 드래곤과 싸울 수 있지. 그리고 이건 다리가 불편해도 아무 상관없어.”
“혀, 형님, 그건…….”
“용살검가 에인헤랴르다운 짓이 아니라고?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칼로 죽이든 마법으로 죽이든 드래곤을 죽이면 되는 거지. 적어도 아버지가 그런 걸로 사람을 차별할 것 같지는 않아.”
“혀, 형님,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뭐가 억지라는 거지? 나는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데.”
“에인헤랴르의 사람이 크레스니크에 몸을 의탁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외부에서 마법을 배워서 에인헤랴르에 돌아와 봤자…….”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을 거라고?”
“네, 당연히 그렇지요! 줄곧 에인헤랴르에 머물며 에인헤랴르를 위해 일해 온 사람이 아니니까요! 아무런 실적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이바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반론할 자격이 있었다.
“나는 몇 달 전까지 실적은커녕 실수만 쌓으며 사람들에게 욕만 먹고 있었는데 말이야. 나보다는 좋은 조건 아닐까?”
“……!”
이바르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뭐, 지금처럼 청룡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승승장구하는 건 어려웠겠지.”
“그, 그렇습니다. 제가 그나마 지금 정도 위치를 확보한 건 계속 에인헤랴르에 있으면서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잘해 온 거 아닌가?”
“네?”
“이바르.”
나는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아까 같은 얘기를 한 건, 왜 마법을 안 배웠냐고 질타하기 위한 게 아니야.”
“그, 그럼 뭡니까?”
“너는 지휘나 외교 등의 실적을 쌓아 에인헤랴르 대공이 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지. 그리고 실제로 그걸 통해 경쟁자인 헤스테인을 제치고 높은 평가를 받아 왔어. 바깥에서 마법 같은 걸 배우고 오지 않아도 에인헤랴르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던 거지. 그런데 왜… 인제 와서 나한테 잘 싸워서 부럽다는 소리를 늘어놓는 거지?”
“……!”
그렇다.
나는 이 부분을 지적하고 싶었다.
“지휘나 외교 등을 통해 실적을 쌓아서 에인헤랴르 대공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흔들리지 말고 계속 그걸 추구해. 자기가 선택한 길에 긍지를 갖고 그 길을 계속 나아가란 말이다.”
“카이트 형님…….”
“네가 허리에 차고 있는 발뭉을 봐라, 이바르.”
그 말을 듣고 이바르가 자기 허리를 내려다봤다.
발뭉의 황금 칼자루는 한밤중에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건 네가 그동안 옳은 길을 걸어왔다는 증거다. 그런 게 아니라면 아버지도 너한테 발뭉을 주지 않으셨을 테니까.”
“……!”
“흔들리지 마라, 이바르. 남들에게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렇게 흔들리면, 무슨 일을 하든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할 거다.”
이바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다 보니 정말로 형 노릇을 하게 되는군.’
카이트 에인헤랴르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어쩔 수 없다.
동생이 옆에서 한심한 소리를 하고 있는데 그냥 못 들은 척할 수도 없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이바르에게 해 줄 수 있는 얘기가 있었다.
“하지만 말이다, 이바르.”
나는 천천히 말을 건넸다.
“네가 정말로 드래곤과 직접 싸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네……?”
“불편한 다리를 완전히 고쳐 줄 수는 없겠지만… 남들하고 칼싸움을 할 수 있을 정도로는 만들어 줄 수 있지.”
“……!”
이바르가 숨을 삼켰다.
“카, 카이트 형님,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런 게 가능하다고요?”
“그래.”
“노, 놀리지 마십시오. 형님이 의사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합니까?”
“이 녀석이 평생 속고만 살았나. 믿기 싫으면 관두든가.”
“형님……!”
“하지만, 조건이 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이바르를 향해, 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지금까지 쌓아 왔던 걸 다 버려라.”
“네?”
“청룡기사단을 시작으로… 그동안 네가 온갖 실적을 쌓으며 얻어왔던 걸 다 내던지라고. 완전히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거지.”
현재 이바르는 청룡기사단 단장이라는 신분을 갖고 있다.
여러 부하를 거느리고 있으며, 각지에 쌓아 둔 인맥 등 다양한 정치적 자산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걸 다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감찰기사대의 말단 기사로서 내 밑으로 들어온다면, 언젠가 드래곤과의 전쟁에 참가할 수 있는 몸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
나는 허풍을 떨고 있는 게 아니었다.
서클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이바르라면, 내공을 축적해 무공을 사용하는 게 가능할 테니까.
무공을 쓸 수 있게 되면 하반신의 장애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다.
보법을 펼치면서 적과 근접전을 펼치는 건 쉽지 않겠지만, 꼭 그래야만 적과 싸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다만… 그렇게 하려면 다른 건 전부 다 버리고 무공 수련에만 매진해야 할 것이다.
차기 에인헤랴르 대공이 되기 위해 준비해 왔던 것들조차, 다 버려야 한다.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그러니 모든 걸 다 버리고 오라는 거다.”
“형님…….”
이바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호언장담하시는 겁니까?”
“근거는 네 앞에 있다, 이바르.”
“네?”
“내가 어떻게 단기간에 이 정도로 강해졌다고 생각하는 거지?”
“……!”
이바르가 숨을 삼켰다.
“물론, 네가 나만큼 빠르게 강해지지는 못할 거다. 하지만 언젠가는 드래곤과의 전장에 나설 수 있게 되겠지.”
“카이트 형님…….”
“그러니,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나는 이바르가 어느 쪽을 택하든 상관없었다.
기존의 길을 고수하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북부대공 자리를 추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쌓아 온 실적을 다 버리고, 내 밑에서 무공을 배워 한 사람의 무인(武人)이 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건 이바르가 결정하면 되는 일이니까.
“형님,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도무지 이해가……!”
“내가 오늘 밤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얘기는 이게 끝이다.”
“카이트 형님!”
“어쩔 수 없어.”
나를 다그치는 이바르를 내버려 둔 채, 나는 북쪽 하늘을 향해 시선을 향했다.
“손님이 왔으니까 말이다.”
“네?”
시커먼 밤하늘.
별빛을 가리며, 여러 개의 그림자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폐촌으로 다가왔다.
평범한 생물로는 불가능한, 엄청난 속도로.
“……!”
쿵! 쿵! 쿵! 쿵!
숨을 삼키는 이바르의 앞에서, 네 개의 굉음이 들렸다.
육중한 생명체가 착지하는 소리가 네 번이나 들린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이바르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드래곤이… 이렇게나 많이?”
그렇다.
밤하늘을 가르고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드래곤이었다.
적갈색, 황토색, 자주색, 흑록색… 전부 네 마리.
“에인헤랴르의 장남이여…….”
가장 몸집이 큰 적갈색 드래곤에서 위엄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밤이… 네가 죽는 날이 될 것이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드래곤”
냉담하게 대꾸하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죽는 날은 내가 정한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허리에 찬 칼라드볼그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