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Slayer Sword Demon RAW novel - Chapter 90
▣ 90화. 파죽지세 (1)
수정 동굴.
악룡 파프니르 파벌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거대 지하 동굴에서, 베리타스투스는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에인헤랴르의 기사단이 각지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네, 최전방의 백룡기사단과 황룡기사단은 물론, 서쪽에 배치된 적룡기사단도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시구르드의 흑룡기사단이 동쪽으로 이동 중입니다.”
베리타스투스 직속의 용귀족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정보를 수집해 보니, 대규모 단체 훈련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대규모 단체 훈련……?”
“이번에 에인헤랴르가 피어너에 이어 크레스니크와도 동맹을 체결했다고 합니다. 주위의 중소 영주들도 에인헤랴르에게 복종하게 되었고, 에인헤랴르가 북부 전체의 주도권을 잡게 된 상황입니다.”
“북부 전체의 주도권을…….”
“그래서 주요 기사단들을 동시에 움직이는 것으로… 에인헤랴르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게 아닐까 합니다. 북부의 인간들을 상대로 말입니다.”
“…….”
베리타스투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놈들이 단순히 에인헤랴르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거라면 이쪽에서 반응해 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과연 그것뿐일까.
“시구르드 에인헤랴르는… 그런 정치적 행동을 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렇습니까?”
“그래, 시구르드가 아니라 다른 자식들이 꾸민 일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일반적인 드래곤들과는 달리, 베리타스투스는 인간들의 심리나 성향 등도 깊이 이해하고 있다.
주적(主敵)이라 할 수 있는 에인헤랴르에 관해서는 수시로 정보를 확인하고 있으며, 특히 시구르드에게 관심을 기울여 왔다.
“시구르드는 남을 위협하기 위해 검을 뽑지 않는다. 시구르드가 검을 뽑았다면… 누군가를 찌르려 할 때뿐이지.”
“그렇다면…….”
“다만 그게 우리 드래곤들일지, 아니면 다른 인간들일지는… 모르겠군.”
“현재 북부의 영주들은 전부 에인헤랴르에게 우호적입니다. 굳이 다른 영주들을 공격할 이유는 없을 텐데요.”
“영주들의 목을 날려 버리고 직접 통치할 생각일 수도 있지…….”
“아, 그렇군요.”
“하지만, 시구르드가 우리를 노리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최소한의 대처는 해 둬야겠지.”
베리타스투스는 앞발의 발가락을 까닥이며 말했다.
“지금 주변에 대기 중인 드래곤들을… 불러들여라. 각지에 파견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베리타스투스 님.”
지시를 받은 용귀족이 신속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베리타스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구르드의 아들들이 장성하면서… 에인헤랴르에도 변화가 있는 것 같구나.”
얼마 전, 베리타스투스의 수하인 드래곤 네 마리가 당했다.
카이트 에인헤랴르를 쓰러뜨린 뒤 신화병장을 탈취해 오라고 보낸 것이었는데, 결국 역공을 당해 전멸한 것 같았다.
그동안 에인헤랴르 측과의 싸움에서 수많은 드래곤들이 죽어 나갔지만, 태어난 지 30년도 안 된 애송이한테 드래곤 네 마리가 동시에 당한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파프니르 폐하가 직접 나서게 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베리타스투스는 수정 동굴 깊숙한 곳에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 * *
“요 며칠 사이 드래곤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용백작’의 작위를 지닌 용귀족인 필로테스가 질문을 던지자, 같은 작위의 동료 오리나스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에인헤랴르 측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더군. 서쪽의 오비르 고개 근처에 북부대공의 흑룡기사단의 알짱거리고 있는 모양이야.”
“뭐라고? 설마 북부대공이 이쪽까지 오지는 않겠지?”
지금 필로테스와 오리나스가 있는 곳은 크레스니크 공작령 북쪽에 위치한 산성(山城)이었다.
산성이라고는 해도 오크와 고블린들이 돌을 쌓아 건축한 것으로, 이 일대의 몬스터들을 통제하는 사령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이쪽 방면으로 북부대공의 흑룡기사단이 쳐들어오면 우리가 가장 먼저 죽게 될 텐데.”
“그렇겠지. 우리한테 흑룡기사단을 상대할 병력 같은 건 없으니까 말이야.”
이 일대에는 몬스터들이 많긴 하지만, 다들 고만고만한 놈들뿐이다.
필로테스와 오리나스가 이곳에 배치된 지 꽤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몬스터들을 동원하여 무슨 작전을 수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냥 가끔가다 주변 동향을 수정 동굴로 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이쪽으로 쳐들어오지는 않을 거야. 여기에 뭐가 있다고 북부대공이 이쪽으로 기사단을 진격시키겠어?”
“하긴 그것도 그렇군.”
“그리고 흑룡기사단 같은 놈들이 이쪽으로 오면 멀리서도 보일 테니까, 위험하다 싶으면 그냥 도망가면 돼.”
“하하, 그것도 맞는 말이야.”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다음 외출 계획이나 세우자고. 지난번에 납치해 온 인간 노예들이 다 죽어 버렸으니, 이번에는…….”
시시덕대며 떠들어 대던 오리나스의 목소리가 중간에 끊겼다.
“오리나스? 뭐야?”
왜 저러나 하고 필로테스가 오리나스의 얼굴을 들여다봤을 때.
갑자기 오리나스가 털썩 쓰러졌다.
뒷머리에 작은 단검이 박힌 채.
“……!”
깜짝 놀란 필로테스가 숨을 삼킨 순간, 웬 청년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용귀족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인간 노예도 아닌 것 같았다.
“누, 누구냐!”
필로테스는 혼란에 휩싸인 채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위대한 베리타스투스 님에게 용백작의 작위를 수여 받은 필로테스! 네 정체를 밝혀라!”
“정체?”
“그, 그래, 네 정체를 밝히란 말이다!”
“흠… 그쪽이 먼저 정중히 자기소개를 해 줬으니, 무시하면 실례가 되겠지.”
검은 머리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시구르드 에인헤랴르 대공에게 소드 마스터로 인정받은 카이트 에인헤랴르라고 한다.”
“……?”
필로테스는 잠시 침묵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 잠깐만, 지금 뭐라고…….”
“불사의 영약도 먹은 놈이 벌써부터 귀가 어두워졌나?”
“카, 카이트 에인헤랴르? 정말로?”
그러고 보니 소문으로 들었던 연령대와 비슷하다.
그러면, 정말로…….
“어, 어째서 에인헤랴르의 소드 마스터가 여기에 온단 말이냐!”
필로테스는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치며 뒷걸음쳤다.
“이곳에는 드래곤도 없고 고위 용귀족도 없다! 너 같은 놈이 쳐들어올 곳이 아니란 말이다!”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 왔겠지.”
“이, 이유? 한 사람의 소드 마스터가 투입될 이유가 이곳에 있단 말이냐?”
“이곳 자체에 큰 의미는 없어. 그리고…….”
카이트 에인헤랴르가 필로테스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향했다.
“이곳에 온 소드 마스터는 한 사람이 아니다.”
그 직후.
필로테스는 목에서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어……?”
목이 잘렸다.
그 소름 끼치는 사실을, 필로테스는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아…….”
필로테스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추락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별다른 소리를 내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검을 거둬들이는 중년 남자의 모습을 보았을 뿐이었다.
* * *
“역시 움직임이 빠르시군요, 아그나르 경.”
바닥을 굴러다니는 용귀족들의 시체 앞에서, 나는 아그나르에게 말을 건넸다.
“덕분에 지휘관으로 보이는 용귀족들을 빠르게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
“저 혼자서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카이트 님 지분이 더 크지요. 작전을 세운 건 카이트 님 아닙니까.”
아그나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지금 우리는 베리타스투스의 본거지로 침투하기 위해 험준한 산길을 지나는 중이었다.
하지만 조잡한 산성 하나가 완전히 길을 막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곳을 돌파하기 위해 나와 아그나르가 나선 것이다.
“어쨌든 용귀족들을 쓰러뜨렸으니 이곳의 몬스터들은 그냥 오합지졸이 되었을 겁니다.”
“네, 다른 용귀족들도 주위에 없는 것 같으니 이대로 돌파하면 되겠죠.”
소드 마스터 급의 실력자 두 명이 잠입하여 적의 지휘관부터 해치운다.
나와 아그나르가 있었기에 취할 수 있었던 전술이었다.
“그럼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아그나르가 휘파람을 불자, 곧바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바람처럼 달려온 사람이 있었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리안이었다.
“모리안 님, 지휘관으로 보이는 용귀족들을 처단했습니다. 슬슬 다 함께 움직입시다.”
“벌써 해치우시다니… 역시 소드 마스터 두 분이 있으면 다르군요! 바로 움직이게 하겠습니다!”
이어서 다른 아군들도 속속 도착했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몰려들기 시작한 몬스터들과 전투를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은 주로 오크나 고블린 같은 잔챙이들뿐으로, 내가 직접 훈련시킨 기사들과 피어너 및 크레스니크의 정예병들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특히…….’
파팟!
최근 본격적으로 전장에 복귀한 이그니카가 쌍검을 휘두르며 고블린들을 도륙했다. 내가 가르쳐 준 연리음양검을 제법 능숙하게 사용하는 모습이었다.
그녀 옆에서는 루살카가 오크의 가슴에 구멍을 내고 있었는데, 역시 내가 가르쳐 준 대로 수라비룡검의 기본 초식을 잘 사용하고 있었다.
‘차르노보그의 제자여서 그런지, 검법을 흡수하는 속도가 빠르군.’
슈데르츠 등과는 달리, 이그니카와 루살카는 다른 것에는 욕심이 없고 오로지 강해지는 것만을 추구한다.
차르노보그가 그런 가치관을 주입시킨 건지, 애초부터 그쪽에 적성에 있는 아이를 선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강해지는 것에 탐욕적이었다.
붉은 옷과 검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며 몬스터들을 도륙하는 모습은 다른 어떤 기사들보다 위협적이었다.
‘원래 오행에서 적(赤)은 화(火), 흑(黑)은 수(水)를 상징하지. 나중에 그쪽 무공까지 가르치면 그림이 괜찮겠어.’
물론, 내 부하 중에서 이그니카와 루살카만 활약하고 있던 건 아니다.
어윈이 이끄는 1분대, 슈데르츠가 이끄는 2분대도 육합흑구검법을 펼치면서 견실하게 몬스터들을 해치우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우리 감찰기사대들이 출진해 있는 동안 남쪽의 감찰기사본부는 프리드레이프의 기사대가 맡아 주고 있다. 지금까지 니얼이 그 일대의 정리를 잘해 놨기 때문에 별일 없을 것이다.
“피어너 창기사의 힘을 보여 줘라!”
“크레스니크 마법병단, 아군을 철저히 지원하도록 하세요!”
광휘창가 피어너와 귀살마가 크레스니크에서 나온 병력 또한 큰 힘이 되어줬다.
피어너 측의 창기사들은 모리안이, 크레스니크 측의 마법사들은 아나스타샤가 지휘하고 있었는데,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좋은 전과를 내주고 있었다.
게다가 아그나르가 데려온 황룡기사단의 정예 기사들까지 있었기 때문에… 잔챙이 몬스터 정도는 순식간에 괴멸시킬 수 있었다.
“카이트 님.”
전장 전체를 살펴보고 있던 니얼이 내게 다가왔다.
“북서쪽에서 좁은 산길을 발견했습니다. 역시 그쪽으로 진행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이곳 뒤처리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불을 지르거나 하면 오히려 놈들에게 더 일찍 알아차리게 될 겁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나을 겁니다.”
“주위 몬스터들이 몰려와서 사체를 뜯어먹어 주겠군.”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지도, 그리고 그동안 생포한 용귀족 및 배룡주의자들에게서 얻어낸 정보를 조합하여 대략적인 침입 경로를 정해 놓은 상태다.
이대로 산을 넘고 숲을 지나 베리타스투스의 본거지인 수정 동굴까지 접근하면 된다.
아군 숫자가 워낙 적기 때문에 드래곤들도 우리를 발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드래곤들의 지배 영역에는 몬스터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지만, 일부 지능이 높은 종족을 제외하면 다 멍청한 놈들입니다. 우리를 발견한다고 해도 먹잇감으로 생각해서 달려들 뿐이죠.”
“하지만 방심하면 안 돼. 간혹 지능이 높은 개체가 탄생하기도 하고, 용귀족들이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
“네, 우리가 수정 동굴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최대한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상대가 인간이었다면 이런 침투 작전은 아예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침투하고 있는 곳은 넓디넓은 드래곤들의 지배 영역이다.
군데군데 머리 나쁜 몬스터들이 배치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우리가 소규모 정예 부대로 파고들면 드래곤들에게 소식이 전해지는 걸 최대한 늦출 수 있다.
베리타스투스가 의도를 눈치채고 각지에 파견한 드래곤들을 불러들이기 전에 수정 동굴에 도착한다면… 우리의 승리다.
* * *
“…….”
이바르는 북쪽 하늘에 시선을 향했다.
지금쯤 카이트가 아그나르 등을 거느리고 드래곤의 지배 영역을 돌파하고 있을 것이다.
그 원정에 직접 참여할 수 없다는 게… 이바르 입장에서는 무척 안타까웠다.
‘어쩔 수 없지.’
카이트에게서도 시간이 필요할 거란 얘기를 들었다.
수련이 제대로 결실을 맺을 때까지는 전장에 나가는 건 엄두도 내지 말라는 게 카이트의 얘기였다.
‘아직 나는 아무런 힘도 없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이바르는 다시 천막 안에 들어갔다.
이번 원정에서 이바르가 맡은 역할은 ‘후방 지원’으로, 카이트의 공격대가 돌아올 때까지 할 일이 없었다.
‘형님이 가르쳐 준 대로, 심법의 구결을 되새기면서 운기조식이나 하자.’
흑천수라심법.
아무래도 그게 카이트가 갑자기 강해진 비결 같았다.
그 구결에 따라 운기조식을 하면 ‘내공’이라는 게 생기면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솔직히 비현실적인 얘기지만… 이바르는 지금 그것만을 믿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바르는 천막 안에 숨겨 놓았던 검은 가죽 주머니를 풀어, 커다란 마석 덩어리를 꺼냈다.
드래곤 하트였다.
‘항상 드래곤 하트를 의식하면서 운기조식을 하라고 하셨지.’
카이트가 크레스니크 공작령에서 획득한 여섯 개의 드래곤 하트.
그중 다섯 개는 이번 원정에 들고 갔지만, 한 개는 이바르에게 맡겼다.
운기조식을 할 때마다 곁에 두고 항상 의식하라고 했는데… 솔직히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시키는 대로 해야겠지.’
이바르는 가부좌를 틀었다.
옆에서 반짝이고 있는 드래곤 하트를 의식하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얼마 뒤 형이 큰 전과를 거두고 돌아오면… 그동안 이런 성과가 있었다고 가슴 펴고 말하기 위해서.
절실한 운기조식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