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id RAW novel - Chapter 380
0379 황희 정승
칡소가 앞에서 당기고, 내가 뒤에서 고정하는 쟁기는 열심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순식간에 바닥이 까지고, 단단하던 흙더미가 조각조각 깨져나갔다.
물론, 마냥 수월하게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콩콩이가 바닥에 박혀 있던 큼직한 바위들을 뽑은 것이나, 뿌우뿌우가 나무를 뽑아낸 자리에 생겨난 구덩이들 때문이었다.
“으억!”
소가 끄는 쟁기를 고정한다고 힘을 주어 잡고 있던 나는, 갑자기 나타난 구덩이에 턱- 걸린 쟁기에 배를 부딪혔다. 마치 어릴 때 학교에서 밀대 걸레를 배에 대고 밀다가 찔린 느낌이었다.
“압빠!”
“아뿌, 아포?”
그리고, 내가 쟁기에 배를 부딪히며 바닥에 나자빠지니, 근처 바위에서 내가 하는 것을 보고 있던 아이들이 호다닥 달려왔다.
소은이는 내가 넘어지면서 어디 다치기라도 했을까 걱정하듯 바라보았고, 은수는 내 배를 도닥였다. 아푸지마- 하면서 말이다.
“아빠는 괜찮아.”
대비하지 못한 충격에 아픈 배를 슥슥 문질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픈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만 아이들이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나는 바닥에 있는 구멍들을 다 메꿔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대로 있다간 배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그곳을 다 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밭으로 삼은 곳이 꽤 넓었기 때문에 구덩이가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을 하나하나 메우려면 꽤나 노동력이 필요할 것이 뻔했다.
직원들이라도 불러서 저길 다 메워야 하나 싶었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이 밭을 만드는 것에는 직원들을 따로 동원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근비를 주는 거나 노동법 위반이라던가 하는 것을 떠나, 필요한 인원을 모두 부른다면 동물원의 업무가 마비될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쟁기를 잡아 세웠다. 어차피 밭도 갈아야 하는 것이었으니, 겸사겸사 밭을 갈면서 구덩이를 메우기로 했다. 두어 번 밭을 갈면서 구덩이를 메우면 적당히 평탄화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칡소들이 쟁기에 적응할 수 있도록 몇 번 갈아엎을 계획을 갖고 있었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저 내가 중간중간 조심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원래 밀대 걸레를 배로 밀 때도 한두 번 갖다 박으면 그다음부터는 조심하게 되어 있었다.
“자, 아빠는 다시 쟁기질할 거니까 저기 앉아 있어.”
“우웅. 압빠, 칡소 위에 앉아 있으면 안 돼?”
“칡소한테?”
“웅!”
“그럼 칡소한테 소은이가 물어봐. 위에 타도 괜찮은지.”
내 말에 환한 미소를 지은 소은이가 곧바로 칡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대로 녀석의 등 위에 올라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폴짝폴짝 뛰면서 올라타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에, 아이들을 칡소의 위에 앉혀 주었다. 따로 안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물들을 꽤 타본 소은이는 아주 능숙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은수도 그런 소은이의 앞에 앉아, 소은이의 품에 안겨 있었다.
“출발하자!”
“출바알!”
아이들이 내 말을 따라 하는 것과 동시에 칡소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밭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뒤엎어졌고, 약간의 고랑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앞에 구덩이!”
그리고, 아이들이 칡소의 위에 올라탄 덕에, 구덩이로 인한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다. 구덩이에 빠져서 덜컥거릴 것을 예상하고 있는다면, 그 충격을 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멈칫거리게 되긴 하지만, 그래도 꼴사납게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아프게 갖다 박는 일도 없었고.
“자, 이번에는 왔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서 가자.”
일자로 길게 나아갔던 우리는 어느덧 밭의 끝에 도달했고,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밭의 끝에서 끝으로 지그재그로 움직이듯 밭을 가는 것이었다.
조금은 느리지만 무척 강한 힘을 내는 칡소 덕분에 밭이 아주 빠른 속도로 갈려나갔다. 게다가, 밭이 갈리면서 주변으로 흩어지는 흙들이 구덩이를 메우고 있었다.
“압빠, 다 했어!”
쟁기를 잡고 힘을 쓰고 있으니, 어느덧 밭 전체를 다 갈아엎게 되었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보니, 아주 많은 고랑들이 생겨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구덩이 같은 것들도 대부분 사라져 있었다. 흙이 가볍게 뿌려진 거라 밟으면 푹푹 꺼지긴 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밭을 한차례 다 갈아엎은 것을 확인한 다음, 칡소에게서 쟁기를 벗겨냈다. 작업이 끝난 것은 아니었고, 다른 한 마리의 칡소에게도 쟁기질을 시킬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칡소가 두 마리니, 한 마리만 일을 시킬 생각은 없었다. 두 마리가 동시에 끄는 쟁기도 있긴 하지만, 그 정도의 힘은 필요치 않았기에 둘 다 투입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그렇게 벗겨낸 쟁기는 곧바로 다른 녀석에게로 옮겨졌다. 이미 한 번 씌운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버벅대지 않고 씌울 수 있었다.
“압빠!”
“아뿌!”
물론, 소은이와 은수도 옮겨 태웠다. 그렇게 자유를 찾은 칡소는 소은이와 은수가 앉아 있던 바위 주변으로 다가가, 그대로 퍼질러져 앉았다.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쟁기를 메고 있는 칡소에게 소리쳤다.
“아까 쟤가 하는 거 봤지? 그렇게 하면 돼.”
“알았어요우우우.”
무으우우- 소릴 내며 대답한 칡소가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이미 한 번 제대로 갈린 밭이기 때문인지, 아주 부드럽게 쑥쑥 밀고 나갔다. 조각난 흙더미가 다시 한번 조각나며 꽤나 부드럽게 바뀌었다.
그렇게 칡소들의 힘을 빌려 몇 번 밭을 갈아엎고 나니, 주변과 확연히 달라진 땅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아래에 파묻혀 있던 흙이 위로 올라오고, 이름 모를 풀들이 파헤쳐져 있었다.
고랑을 조금만 더 다듬고, 잡초 같은 것들을 제거하고 나면 완벽한 밭이 될 것 같았다.
“압빠.”
“응?”
그런데 고랑은 칡소들이 판다고 해도, 잡초 같은 것들은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하던 내게 소은이가 다가왔다. 은수와 손을 꼬옥 붙잡은 채로.
“압빠, 칡소 이름 내가 지어도 돼?”
“소은이가?”
“웅! 내가!”
칡소들의 이름을 짓고 싶다는 소은이의 외침에 순간 망설였다. 얼룩덜룩한 무늬로 얼룩이라는 이름을 지어버린 칡소가 여전히 강원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이름을 지으려고 이러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소은이나 나나 작명 실력이 거기서 거기였다. 그래서 이름을 짓지 않고 동물의 종을 이름처럼 부르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런 생각까지 하고 나니, 못 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이 녀석들로 계속 농사를 짓게 될 것이니, 이 녀석들에게도 자신들만의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 소은이가 한 번 지어줘.”
“히.”
내 말에 소은이가 아주아주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왠지 불길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그렇다고 이제 와서 말을 바꾸지는 않았다.
“얘는 황희! 얘는 정승!”
“……소, 소은아? 그거 어디서 들었어?”
갑자기 황희와 정승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초등학교 2학년이라 아직 한국사를 배우는 것도 아닌데, 어디서 들은 이야기야?
“선생님한테!”
황당함이 가득 담긴 내 물음에, 소은이는 선생님한테 들었다며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일을 엄청 잘 했던 황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로 시작한 이야기는 우리가 황희하면 흔히 떠올리는 그 이야기였다. 누렁소와 검은소 중 누가 더 일을 잘 하오? 라는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초등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었기 때문인지, 황희라는 인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려준 것은 아니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동물들도 나쁜 말이나 비교하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니, 친구들에게 절대 그런 말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긴, 황희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주면 그것도 문제지. 황희도 비리를 저지른 게 좀 있는 편이니까.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튼, 그렇게 선생님으로부터 듣게 된 황희 정승 이야기에서 소은이의 기억 속에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것은 하나였다.
“선생님이 황희라는 정승 아저씨가 엄청 일을 잘 했다고 했어!”
바로, 황희가 일을 아주 잘 했다는 것 말이다. 동물들과 말이 통하는 소은이에게는 말을 조심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억나는 거라곤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것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 그래……. 그거 참 일을 열심히 할 것 같은 이름이네…….”
“그치이?!”
소은이는 자기가 지은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드는 건지, 해맑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대로 은수를 데리고 가서, 얘가 황희고 쟤가 정승이야. 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아니……. 황희는 이름이 맞긴 한데, 정승은 그냥 관직의 명칭이라고 할 수 있는 건데…….
잠시 소은이가 지은 이름을 수정해 주어야 하나 싶었지만, 소은이가 만족하는 것 같았으니 놔두기로 했다. 심지어 칡소들도 뭔가 마음에 든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한숨을 내쉰 나는, 다음 작업을 위해 소은이를 다시금 불렀다.
“소은아. 은수랑 같이 양들을 데리고 올래? 아빠는 황희랑 같이 여기 한 번 더 갈고 있을 테니까, 소은이는 정승 타고 다녀와.”
“양? 양은 왜?”
“양은 바닥에서 자라는 풀을 먹을 때 뿌리까지 홀라당 다 먹거든. 다른 애들은 뿌리는 안 먹고 이파리만 탁 뜯어 먹잖아?”
“오옹! 그래서 양들이 있는 곳 바닥이 맨날 잔디가 없었구나!”
“그렇지. 그래서 여기 있는 풀들도 조금 먹게 할 거야. 다른 곳에 있는 풀들은 못 먹게, 여기로 바로 데려올 수 있지?”
“웅!”
소은이는 힘차게 답하더니, 은수와 함께 정승을 타고 양들이 있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아이들이 떠나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황희에게 쟁기를 걸어, 마지막으로 밭을 갈았다.
그리고, 때 마침 밭을 다 갈았을 즈음 아이들이 양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얼마 전에 털을 깎았는지, 꽤나 얇은 몸을 드러내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에게 이제 막 갈아둔 밭을 가리켰다.
“얘들아. 여기 바닥을 뒤엎어 놓은 곳에 있는 풀들은 싹 먹어도 돼. 다른 곳에 있는 건 안 되고.”
풀을 싹 다 먹어도 된다는 내 말에, 양들이 두 눈을 번쩍 빛냈다. 이 녀석들은 사람들이 주는 건초나 생초도 좋아했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닥에서 직접 뜯어 먹는 풀이었기 때문이다.
매우 좋아하는 그 풀들을 다 뜯어 먹어도 된다고 하니, 양들이 아주 공격적으로 바닥을 휩쓸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마치 메뚜기 떼가 추수 직전의 논을 휩쓸어가는 것처럼, 바닥에 있는 풀들을 싹 쓸어갔다. 녀석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저 파헤쳐 진 흙만이 무성할 뿐이었다. 괜히 염소와 더불어 토지를 황폐화시키는 동물이란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다.
그런 양들의 모습에 감탄을 해야 할지, 안타까움을 느껴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니 주변에서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밭을 조성하느라 자연구역에서 약간의 소란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보니, 관람객들이 꽤나 자주 주변을 기웃거렸다. 그렇기에 그런 관람객들 중 한 명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가오는 발소리의 주인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드루이드, 이곳이 그 밭이라는 곳인가요?”
내게 찾아온 사람은 바로 무하마드였다. 드넓은 자연구역을 빠짐없이 둘러보겠다며 자연구역을 거닐던 도중, 이곳에서의 소란에 호기심을 느끼고 찾아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