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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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마법이 사라진 날
결국, 장군석이 성벽에 도달했다.
하늘을 찌를 듯 거대한 돌 거인의 팔이 높이 올라갔다가 내리쳐졌다.
콰앙. 세상이 뒤집히는 굉음과 함께 두터운 성벽이 쩌억 갈라졌다.
하늘인 병사들이 개미 떼처럼 흩어졌다. 이미 의미가 없어진 전열을 짓밟으며 크고 작은 거석이 떼를 지어 도시로 몰려들었다.
지상 최강이라던 남운관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 용맹하던 하늘인 병사들이 돌 거인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을 피해 도망치며 울부짖었다.
“시문께선, 시문께선 어디에 계시는가!”
“시문 나리! 도와주소서, 나리!”
남운관이 자랑하는 천재 마법사 시문이 못 하는 일은 세상에 없었다.
그 열여섯 소년이 소매를 떨치며 주문을 외우면 하늘이 열리고 땅이 갈라졌다. 아무리 거대한 장군석도 세 발짝을 못 걷고 거꾸러졌다.
그러나 언제나 위기에서 도시를 구해온 그가 오늘따라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마법사들도 역할을 못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반나절 전까지 땅과 하늘의 기운을 자재로 다루던 격 높은 마법사들이 모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총치총령에게 달려갔다.
“선무시여! 법술을… 법술을 쓸 수가 없습니다!”
“주문을 외워도 기운이 반응하질 않습니다!”
“대기 중에 법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세상에 법력이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남운관의 총치총령 완씨 선무는 불과 번개, 바람의 마법을 다루는 최고위의 마법사였다.
시문을 제한다면 선무만큼 고강한 공격 마법사는 땅 위에 세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선무의 손끝에선 작은 불티 하나 일지 않았다.
마법의 근원이 되는 마력이 세상 어디에서도 느껴지질 않았다.
“어찌… 어찌 이런 변고가….”
항상 온후하고 침착하던 총치총령이 입술만 떨 뿐 답을 못 주는 것을 보고 절망한 마법사 하나가 주저앉아 부르짖었다.
“아아! 이대로 세상이 망하는가!”
콰앙.
그 말에 답하듯 돌 거인이 다시 팔을 휘둘렀다.
이제 형체조차 남지 않은 남쪽 성벽을 마저 짓밟으며 장군석이 육중한 발을 도시에 들였다.
한 발짝 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도시가 통째로 흔들렸다.
일 년 내내 깨끗한 물이 솟고 사람이 붐비던 광장도, 번듯하게 닦인 가도도, 수백 채가 넘는 으리으리한 기와집도 차례차례 짓밟혔다.
산지사방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 다녔다.
그러나 자꾸자꾸 도시로 들어오는 거석 무리 앞에선 마땅히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모두가 절망하고 공포에 질린 가운데, 딱 한 사람 아무 감흥이 없는 이가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구릉에서 무너지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청년이 생각했다.
‘드디어 망하나? 망하면 좋지. 이참에 다 뒈졌으면 좋겠네.’
아직 청년이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다.
그러나 소리 내서 말할 날이 올 터였다.
1. 7일 전
쿵. 쿵. 쿵. 거석의 발소리가 위협적으로 지축을 울렸다.
거석 중에서도 유독 큰 놈이었다. 육중한 몸뚱이는 절벽처럼 높고, 한 걸음이 십수 척은 될 것 같았다.
몸통 가운데로부터 나선 모양으로 뻗어 나온 빛 무늬가 불길한 주홍빛을 흘렸다.
소녀의 등에 업힌 남자아이가 불안한 듯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누나, 괜찮아?”
“응, 괜찮아!”
소녀의 대답은 활기찼다.
“잡히지 않아?”
“절대 안 잡혀!”
소녀는 동생을 업은 채로도 쏘아낸 화살처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소녀는 맨발이었다. 짧은 천 옷으로 몸통을 감쌌을 뿐, 맨팔과 맨다리가 그대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어깨 가부터 성글게 땋은 검고 긴 머리가 뒤로 휘날렸다.
날랜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돌 거인과의 거리는 부쩍부쩍 벌어졌다.
이대로 거리를 벌리면 곧 놈도 쫓기를 포기할 것이다.
돌이 사람을 습격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소녀는 모른다.
땅에서 빛을 품은 큰 돌이 일어나, 거대한 사람 형상을 하고 돌아다니며 사람을 덮치고 무리를 지어 도시와 마을에 쳐들어온다.
사람들을 내쫓고, 건물과 밭을 짓밟고, 마지막에는 수원 위에 쌓여 물길을 막는다.
얼마 없는 수원을 거석이 차례차례 파묻어 버려서, 이젠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거석을 따돌리고도 얼마간 더 달리자 등성이 저쪽에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소녀가 말했다.
“이 너머가 남운관이야. 싸움이 있나 보다.”
남운관시는 남방에서 가장 큰 도시로, 두 사람의 목적지였다.
동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거석이랑 싸우는 거야?”
“그렇겠지? 그래도 걱정 마. 남운관시에는 엄청 강한 마법사 나으리들이 있다고 했잖아? 마법사 나으리들이 다 쳐부숴 줄 거야.”
그렇게 말하는 소녀도 마법사나 마법을 본 적은 없었다.
마법을 부리는 땅님은 세상에서 제일 귀하신 분들이었다.
소녀가 자란 산골 마을엔 땅님같이 귀하신 분들은 살지 않았다.
외지에서 다녀가는 이들도 반민 상인 무리가 다였다.
구릉을 넘자 남운관의 드높은 성곽이 드러났다.
거대한 도시를 둘러싸고 돌로 쌓은 석벽이 십수 장 높이로 솟아 있었다.
성곽 주위에선 전투가 한창이었다.
거인 형상을 하고 몸통에 빛 무늬를 단 돌덩이들이 수도 없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맞서는 것은 대열을 짠 하늘인 어른들이었다.
대열이 한꺼번에 다리에 돌격해서 쓰러뜨리거나, 거석의 몸통만큼 큰 바위를 집어 던져 부수기도 했다.
하지만 거석들은 좀처럼 수가 줄지 않았다. 무너진 놈들도 내버려 두면 다시 빛 무늬를 중심으로 엉겨 붙어 형체를 갖추었다.
“저렇게 싸우면 안 될 텐데….”
소녀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린 순간, 하늘에서 뭔가가 번쩍였다.
우르릉하는 뇌성이 들리고 굵은 빛줄기가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벼락은 무리 한가운데 있던 큰 거석을 정확하게 때렸다.
구우우웅, 돌이 울었다.
거석에는 입이 없었지만 소녀에겐 돌이 비명을 지른 것처럼 느껴졌다.
생물처럼 움직이던 돌이 힘을 잃고 기울었다.
팔다리 구실을 하던 돌덩이들이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가고, 몸체의 나선무늬에서 빛이 사그라졌다.
거석은 쿵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렸다.
등 위의 동생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누나, 방금 봤어? 벼락 떨어지는 거 봤어?”
“봤어….”
“저거야? 저게 마법이야?”
“그런가 봐….”
소녀가 놀람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마법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뒤를 잇는 것처럼 대여섯 발의 우레가 이어졌다.
그때마다 거석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소녀의 얼굴이 기쁨과 기대로 물들었다.
“진짜였어. 정말 남운관엔 마법사 나으리들이 있었어! 얼른 가자!”
도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거칠게 날뛰는 거석 무리를 통과해야 했다.
소녀는 몸을 숙이고 속도를 높였다.
금방 성벽이 가까워졌다. 거석과 싸우는 어른들의 대열도 바로 앞에 있었다.
대열에 있던 어른 몇이 둘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뭐야, 여기 왜 애가 있어?”
“어디서 온 거야?”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성벽으로 뛰었다.
싸움 중에 자기들에게 상관하면 대열이 흐트러질까 봐서였다.
하지만 어른들 눈엔 다르게 보인 모양이었다.
무리에서 사람 셋이 뛰어나왔다.
한 남자가 소녀의 팔을 세게 잡아챘다.
“이 녀석! 외부 놈이냐?”
“놔요. 도망가려던 거 아니에요!”
소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동생을 업은 팔을 풀었다.
하란도 얼른 땅에 내려섰다.
자기 발로 서는 걸 보여주지 않으면 약골로 의심받을 터였다.
소녀의 팔을 잡은 남자가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니들 외부에서 왔지? 보호자는 어디 있어?”
“전 제 몫을 해요. 이 애는 제가 보호하고요!”
몫을 한다는 말에 뒤에 선 남녀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일찍 독립하는 것은 소질과 기개의 증표였다.
몫을 하는 하늘인은 아무리 어리더라도 존중을 받았다.
몫을 하고 가족을 책임지면 두말할 것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붙잡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부족이 같이 오지 않았단 말이냐? 너희를 미끼 삼아 난리통에 숨어들려는 거 아니야?”
“저흰 방랑족이 아니에요! 풀 나는 데 출신이에요!”
소녀는 성이 났지만 그래도 팔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힘을 겨루려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었다.
함부로 호전성을 보이는 사람은 집단에서 잘 받아주지 않는다.
“풀 나는 데 몫이 있으면 왜 둘이서 여길 와?”
“남운관시에서 살려고 왔어요. 제 이름은 호란, 동생 이름은 하란이에요.”
뒤에 선 여자가 남자를 말렸다.
“라왕, 그쯤 해. 어서 대열로 돌아가야지.”
남자는 소녀의 팔을 놓고 경고하듯 말했다.
“너희, 돌아다니지 말고 저쪽 벽에 딱 붙어 있어. 호락호락 시에 들여보내 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세 사람은 둘을 놔두고 싸움터를 향했다.
저들끼리 이야기 주고받는 것이 들렸다.
“왜 그리 못되게 굴어? 하늘인이잖아. 몫도 한다는데.”
“반쪽짜리인지 어떻게 알아! 두 몫짜리도 받아주기 힘든 판에, 이런 꼬맹이들이….”
하란이 잔뜩 기가 죽어서 누나를 올려다보았다.
호란은 동생에게 손을 내밀었다.
“벽으로 가자. 일단은 말을 듣는 게 좋을 것 같아.”
“혼자 갈 수 있어.”
하란은 손을 잡지 않고 성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침을 참는지 목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호란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동생은 날 때부터 몸이 약했다.
기침하고 숨이 짧은 병이 갈수록 더해서 나이가 들어도 자기 몫 할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동생은 제가 약하다는 걸 숨기고 싶겠지만 어른들은 이미 눈치를 챘을 것이다.
하란도 그걸 아는지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누나, 어른들이 우릴 받아줄까?”
호란이 태평하게 말했다.
“받아주겠지. 이렇게 거석들이 쳐들어오는데, 왜 하늘인을 마다하겠어?”
태어날 때부터 강한 힘과 빠른 몸놀림을 지닌 하늘인들은 어디에서나 자기 몫을 하는 일꾼이었다.
싸움이 잦은 곳에서는 더욱 환영받았다.
호란은 자신이 무리에 도움이 될 거란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동생은 여전히 걱정이 태산이었다.
“반민 상인들 말 못 들었어? 남운관시에서 살려면 엄청 큰 돈을 내야 한다던데. 우리한테도 돈을 내라고 하면 어떻게 해?”
호란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경멸조로 말했다.
“그건 제 몫 못 하는 반민 얘기겠지. 몫 있는 사람한테 동전 부스러기가 왜 필요해?”
“철우 머리가 그랬잖아. 이제는 그런 세상 아니라고. 하늘인도 돈이 있어야 된다고.”
“하란아, 손에서 놓으면 없어지는 거는 우리 거가 아니야. 할일 하는 게 중요하지, 손 안에 쥔 게 뭐가 중요해?”
“누나는 그렇지만, 나는….”
“너는 내 가족이잖아!”
호란이 소리쳤다.
“걱정 마. 누나가 몫 하는 거 보면 아무도 너한테 뭐라고 안 할 거야!”
하늘인의 삶의 방식은 단순하다.
타고난 힘으로 제 앞을 가리고, 무리에 공헌하고, 보호가 필요한 가족을 건사한다.
무리는 몫을 하는 사람을 모아 힘을 키우고 삶터를 지킨다.
삶터에는 언제나 제 몫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남운관처럼 크고 제대로 된 삶터는 더 그럴 것이다.
호란만큼 몫을 하는 하늘인을 받아주지 않을 리가 없다.
호란은 허리에 맸던 보따리를 동생에게 맡기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정 그렇게 걱정되면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누나가 한몫하고 올게!”
호란은 날카로운 눈으로 싸움판을 살폈다.
보기에 마법이란 그렇게 자주 쓸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우레가 한 차례 떨어지면 거석들이 픽픽 쓰러졌지만, 이후 다음 마법이 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반면 거석들은 숫자를 앞세워 쉴 새 없이 몰려들었다.
큰 놈을 상대하는 대열을 작은 놈이 옆에서 덮치면 대열이 속수무책으로 흐트러졌다.
그사이 전선은 점점 성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호란은 제일 큰 대열에 짓쳐 드는 한 놈을 표적으로 정했다.
“왼몸 하나!”
호란은 전장으로 달려 들어가며 크게 함성을 질렀다.
대열 없이 단독으로 싸우러 들어간다는 신호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