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0
0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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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 일꾼들 사이에서 단이 나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지난번보다 짐이 가볍고 다리를 행전으로 감싸 돌아다닐 채비를 한 모습이었다.
호란은 내심 반가웠다.
추선이 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길잡이다. 이것의 발걸음이 느리니 누가 업고 달려야 한다. 누가 하겠느냐?”
“반민을 업는다굽쇼?”
채련이 불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추선은 자기도 마뜩잖다는 듯이 말했다.
“길잡이가 뒤에 처지면 무슨 노릇을 하겠느냐? 질질 끌고 갈 수도 없으니 하는 수 없지.”
채련의 얼굴이 흙을 씹은 듯 변했다.
순번대로라면 단을 업는 건 채련의 몫이었다.
다른 꾼들은 다 자기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호란은 단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지난번 봤을 때처럼 나긋한 웃는 얼굴을 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맘이 난처할 터인데 표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제가 업을게요.”
호란이 손을 들었다.
“길잡이면 어차피 앞길을 가야지요? 제가 길을 물으며 척후를 하겠습니다.”
“아서라. 저것이 키만 큰데 네가 업으면 다리가 땅에 끌려서 다 닳아 없어지겠다.”
타호가 말하자 모두가 와르르 웃었다. 호란은 조금 발끈했다.
“나 그렇게 작지 않아! 추켜 업으면 돼!”
더 단을 업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호란이 단을 업게 되었다.
채련과 한돌이 짐을 지고, 소앵은 호란과 번갈아 척후를 하기로 했다.
시현이 휘장에서 나와 남여에 오르고 일행은 성문을 나섰다.
호란의 등에 오른 단이 나직하게 인사했다.
“신세 집니다요, 나리.”
“뭘, 내 몫인데.”
목적지는 새로 찾은 소금광산이라고 했다.
일행은 한동안 구릉을 따라 달렸다.
도시에서 멀어지자 그나마 있던 수풀과 덩굴식물도 사라지고 메마른 황무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을 앞서 나가는데 뒤에서 소앵이 소리쳐 불렀다.
“호란! 문께서 잠시 멈추라셔!”
“알았어!”
무리로 돌아가니 시현은 남여에서 내려와 있었다.
단이 호란의 등에서 내려오자 시현이 품에서 지도 하나를 꺼내서 폈다.
시현이 단에게 말했다.
“가까이 와도 좋다.”
“은혜를 받듭니다.”
단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시현이 단에게 물었다.
“네가 시 바깥 지리에 고루 밝다고 들었다. 어디를 다녀 보았느냐?”
단이 대답했다.
“천한 것이 몇 가지 재주가 있어 광산과 유전을 다니며 거리와 위치를 측량하였으며, 길사 어른들을 모시고 물길을 찾으러 다니기도 십수 번입니다.
지도에 실린 곳과 실리지 않은 곳에 대충 눈이 닿아 있사오니 어줍게 보시더라도 하문하소서.”
시현이 약간 놀라며 물었다.
“측량사더냐? 관속이니 맡은 일이 중할 터인데 어찌 길잡이로 따라왔느냐?”
단이 답하기 전에 추선이 당황하며 끼어들었다.
“그놈은 외지 것이라 측량사가 될 수 없사옵니다. 그저 잔재주가 좀 있어 길사 어른들께서 몇 번 쓰신 것이지요.”
시현의 눈빛이 엄해졌다.
그가 노려보자 추선이 시선을 깔았다.
유전과 수원의 정확한 위치는 군사 기밀로 아무나 측량할 수 없었다.
본디는 물과 토지를 관리하는 벼슬아치인 길사의 일이었다. 부득이 반민을 쓸 때는 출신과 심성이 검증된 이를 관에 종신직으로 두고 부렸다.
거석 탓에 타지와의 전쟁이나 하늘인 무리의 약탈 위험이 줄어들면서 제도가 흐트러진 것이었다.
설령 문제가 되어도 단의 입을 막기는 어렵지 않다. 죽여 없애면 된다.
시현은 단을 보았다.
단은 공손하게 미소를 짓고 서 있었지만 눈빛은 끝을 모르게 깊었다.
시현은 무심코 탄식했다. 아마 그는 자신의 용도를 알고도 쓰였으리라.
시현은 지도를 펼친 채 단에게 내밀었다.
“성 남쪽 방면에서 광산, 유전, 채집터로 가는 길, 그 외에 관병과 백성이 빈번하게 오가는 곳을 지도 위에 모두 표시하여라.”
단이 연필을 꺼내 지도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호란은 호기심에 슬쩍 들여다보았다가 기겁해서 물러났다.
알 수 없는 선과 글씨가 가득한 것이 호란이 아는 지도가 아니었다.
단이 선을 다 그리자 시현이 잠시 지도를 들여다보더니 단에게 물었다.
“이쪽과 이쪽, 이쪽에는 왜 통행이 없느냐?”
“거석이 많이 출몰하는데 마땅한 산물은 없기 때문입니다.”
“세 곳 모두 말이냐?”
“실은 정남쪽에 쓸 만한 광이 몇 곳 있기는 하오나, 가는 길에 거석이 많고….”
단은 무엇을 기억해내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듣기로 요 일이 년, 더그레 분지 사방 수십 리에 물길이 모조리 말라 도저히 작업장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합니다.”
시현의 눈빛이 변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한쪽 지평선을 노려보았다. 시현이 물었다.
“시에서 정남쪽이 어디냐?”
“지금 보시는 그 방향입니다.”
단이 한쪽을 가리켰다. 이제까지 가던 길에서 꽤 빗겨나간 방향이었다.
시현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가 결심한 듯 말했다.
“단, 호란, 앞길을 잡되 무리에서 떨어지지 말아라. 이제부터 정남쪽으로 간다.”
“예에?”
추선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타호가 당황하며 만류했다.
“나으리, 위험합니다! 그쪽은 거석이 수도 없습니다!”
시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가 나를 곁에 두고 거석을 두려워하느냐?”
“그, 그렇다 해도….”
추선은 정색을 하고 사정을 했다.
“작은 어른, 거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호위도 몇뿐인데,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있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유가 있어서 가는 것이다. 중한 일이니 두말하게 하지 말거라.”
“하오나….”
“추선아, 내가 이미 명하였다.”
시현이 날카롭게 말했다.
“네 걱정이 충심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더그레 분지를 둘러봐야겠다. 명에 따르거라.”
추선이 낭패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몫꾼들은 추선만 쳐다보았다.
당연히 윗전의 명을 따라야겠지만 머리의 뜻과 윗전의 뜻이 다르면 어찌해야 하는가?
몫꾼들은 이런 경우를 당해본 일이 없었다.
몫꾼들이 안달하는 것을 느꼈는지 시현의 시선이 와닿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말해도 좋다.”
“시문 님….”
호란이 주뼛거리며 물었다.
“저, 분지에는 뭐가 있어요?”
그 말에 어째선지 시현의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그렇구나….”
그가 탄식하듯 말했다. 그가 무언가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너희가 내 이야기를 들어보겠느냐?”
몫꾼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타호가 말했다.
“마, 말씀 내리소서.”
“그간 물이 마르고 거석이 성해 왔을뿐더러 최근에는 세상의 기운이 움직이는 형세마저 심상치가 않다.
이달 들어 땅과 하늘의 기운이 미세하게 남쪽으로 흘러가는 기색이 있었으나, 남운관은 워낙 땅과 사람의 기운이 성한 곳이라 내가 확신을 못 하였다.
그러나 오늘 여기까지 나와 보니 이변이 확연하구나. 주위 기운이 모두 전만 못한데 유독 남쪽 한 점에만 기운이 가득 모여 있는 것이 느껴진다.
무슨 조짐일까 염려되니 한시바삐 살펴보고 싶다.”
시현이 차근하게 설명했지만 둘러선 하늘인들은 이해를 못 한 표정이었다.
추선이 물었다.
“기운이라 하시면….”
“세상을 움직이고 만물을 살게 하는 기운을 말함이다. 법술의 근본이 되는 법력이라고 하면 좀 더 알기 쉽겠느냐?”
시현은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흘러라.”
그의 손 앞에 작은 회오리가 나타났다가 빙빙 돌며 사라졌다. 시현이 말했다.
“이것을 물과 흙, 공기가 머금으면 그저 기운이라 하고, 사람과 동식물에 깃든 것은 생명력이라 하며, 어디에도 얽히지 않고 허공과 땅속에 남아돌아 사람이 주문으로 부릴 수 있는 것은 법력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본질은 모두 같은 것이다. 그리고 본디 돌은 생명 없이 멈추어 기운을 머금은들 그것이 나고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기운이 돌에 깃들어 흐르면 어떻게 되겠느냐?”
“거석이 되는군요?”
소앵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생각해 보거라. 남쪽에 기운 모인 곳이 더그레 분지라 치고. 그 사방에 물이 말랐다 하면…. 물이 없으면 거기에 생명 있는 것이 없을 것인데, 거기 모인 기운이 다 무엇이겠느냐?”
사람들의 얼굴에 핏기가 빠져나갔다.
저마다의 머릿속에 셀 수 없이 많은 거석 떼의 모습이 스쳐갔다.
추선이 황망하게 소리쳤다.
“그러면 위에 먼저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원군을 부르고, 그리고….”
시현이 물었다.
“위라 함은 누구를 말함이냐? 지원으로 누구를 부르겠느냐?”
추선은 대답하지 못했다.
직위를 말하면 남운관의 최고 윗사람은 시의 내치를 책임지는 총치이자 전군을 지휘하는 총령 완선보 무였다.
그러나 땅인이 높고 낮음을 말하는 기준은 직위 외에 또 있었다.
지금 추선의 눈앞에 있는 열여섯 소년이 남운관은 물론 온 세상에서 가장 지고하고 가장 강대한 이였다.
추선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대었다.
“소인이 겁을 먹고 헛소리를 하였습니다. 굽어살피소서.”
“용서하마.”
시현이 짧게 말했다.
추선이 일어섰다. 무릎과 이마, 손바닥에서 모래가 후드득 떨어졌지만 추선은 그것을 털지 않았다.
“명하신 대로 모시겠습니다. 타호, 남여를 지거라.”
다들 군말 없이 움직였다.
호란은 단이 방향을 가리키는 대로 앞서 나갔다.
“분지에 뭐가 있을까? 거석이 잔뜩 있을까?”
호란이 묻자 단이 곤란한 듯 답했다.
“글쎄요, 저 같은 것이 뭘 알겠습니까.”
대답은 했지만 단은 뭔가 골똘해 있어서 평소만큼 사근한 기색이 아니었다.
호란은 단이 겁이라도 먹었나 하고 활기차게 북돋는 말을 했다.
“겁내지 않아도 돼! 바로 뒤에 시문께서 계시잖아?”
단이 웃었다.
“호란 나리는 무섭지 않으십니까?”
“시문께서 계시는데 뭐가 무서워? 거석이 아무리 많아도 금방 쓱싹이야!”
“아니, 거석 얘기가 아니라요. 시문 큰나으리 말씀대로, 물은 점점 없어지고, 거석은 점점 늘어나고…. 세상이 망할까 무섭지 않으세요?”
호란은 너무 놀란 나머지 발걸음을 멈출 뻔했다.
“세상이 망해? 진짜로? 어떻게?”
호란이 지나치게 격하게 반응해서 단까지 놀란 듯했다.
“아뇨, 나리. 혹시 말입니다. 혹시 그런 생각 해 보신 적 없으시냐는 뜻이었어요. 망할 거라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깜짝이야. 난 진짜 망할 거라는 줄 알았잖아.”
호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건 생각도 안 해봤어. 마을이 망하는 건 몇 번 봤지만…. 세상이 어떻게 망해?”
“망할 수 있지요. 마을이 망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물이 말라서 사람이 흩어지고, 거석이 마지막 남은 도시와 마을까지 다 부수면… 그때가 세상이 망하는 때지요.”
호란은 잠시 단이 말하는 무서운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 사라졌다.
“에이, 그렇게 되지는 않지. 내가 아는 마을이 망한 건 큰머리가 못되게 굴어서 몫꾼들이 흩어졌기 때문이야. 몫꾼들이 비실거려서 수원을 못 지킨 곳도 있고.
그러기가 쉬운가? 남운관만 해도 봐. 시문 님 같이 훌륭한 분도 있고, 몫꾼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거석이야 막으면 되지. 왜 망해?”
“하하, 그렇겠지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봅니다.”
단은 실없이 웃고 입을 다물었다.
쉬엄쉬엄 달리는 사이 해는 중천을 넘었다.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발을 멈췄다.
시현을 쉬게 하려고 단이 해 가림막을 치기 시작했다.
그때 주위를 둘러보던 한돌이 외쳤다.
“나으리! 저기 거석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