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00
100화
* * *
열이 천천히 말했다.
“일단 오늘 밤은 지내고 나서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주면 고마운 일이다.”
시현이 답했다. 하지만 열은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다만… 보셨다시피, 저는 어디에 가려던 중이었습니다. 이제 위께선 제가 집을 나서게 해주지 않으시겠지요. 그 길로 어디 가서 고해 바칠까 염려하실 테니까요.”
호란은 당황해서 열과 시현을 번갈아 보았다.
열을 믿었지만, 막상 열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어째 겁이 났다.
시현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대답했다.
“불안치 않은 것은 아니다만. 내가 어찌하겠느냐. 우리는 여기 조용히 있을 테니 다녀오너라.”
“괜찮으시겠습니까. 힘으로 잡아두셔도 제가 모면할 방도가 없습니다만.”
“신세 지는 처지에 그래서 쓰겠느냐. 그저 언제 돌아올지라도 알려주면 마음이 더 편할 것이다.”
“어디를 가는지는 묻지 않으십니까.”
“알아도 달라질 것이 없지 않으냐.”
열은 무언가를 읽으려는 듯이 가만히 시현을 보았다.
그의 얼굴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그가 말했다.
“늦어도 한 시진 반 사이에는 돌아오겠습니다. 부엌에 물독이 있고, 벽장에 깨끗한 금침이 여러 채 있으니 편히 쓰십시오.”
“고마워.”
호란이 답했다.
열은 예를 하고 방을 나가 대청에 얹어둔 전모를 집어 들었다.
열이 소리 없이 대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호란은 방문을 닫았다.
시현이 한숨을 쉬었다. 어깨가 축 처졌다.
그는 더 이상 낙담한 기색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쉬자. 피곤하구나.”
그가 답호 위에 두른 세조대를 끄르며 작게 말했다.
호란은 얼른 벽장을 열어 금침을 내렸다.
하지만 단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언제 사람이 몰려올지 모르는데 잠이 오겠습니까? 그자를 내보내 준 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시현이 말했다.
“이 밤에 차려입고 나가던 것을 보면 아마도 약조된 일이겠지. 보내지 않으면 반대로 시끄러워질 수도 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설령 일이 꼬인들, 밤새 골목을 도망쳐다니는 것보다는 잠시 쉬기라도 하는 게 나을 것이다.”
시현의 목소리엔 어울리지 않게 자조적인 기색이 있었다.
그는 겉옷을 벗고 낯을 씻고 와서는 안쪽 자리에 누워버렸다.
바로 잠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무얼 더 말하기가 싫은 듯했다.
단이 유등의 불빛을 낮췄다.
두통이 가시질 않는지 계속 찌푸린 얼굴이었다.
호란이 말했다.
“단도 쉬어. 불안하면 내가 깨어 있을게.”
“난 지금은…. 아니다. 알았어.”
단도 곧 겉옷을 벗고 자리에 누웠다.
호란은 불을 다 끌까 하다가 그만두고 단의 이부자리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간혹이지만 단은 자다가 시달리는 일이 있었다.
특히 일 없이 피곤해한다 싶은 날이면 밤중에 크게 소리를 지르며 깰 때가 있었다.
오늘은 가뜩이나 큰일을 겪었으니 또 그럴지 모른다.
옆에서 보다가 설치는 것 같으면 깨워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골목에 몇 사람의 발소리가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들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호란은 숨을 죽였다.
사람들이 계속 시현을 찾고 있었다.
이렇게 일이 커졌는데도 불을 밝히거나 소리를 높이지 않고 조용히 찾아다닌다는 건 좀 의외였다.
확실히 음모가 공공연한 것은 아니었다.
단의 걱정과는 달리 시문 님을 적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적이 누군지를 모르니 총치부로 돌아가기가 두려웠다.
주먹을 들고 쳐들어오는 놈들은 맞서 싸우면 된다.
하지만 시현의 음식이나 옷에 무엇이 들어 있으면 그것은 호란이 알 방법도 막을 방법도 없었다.
안락하던 총치부가 돌아보니 거미굴 같았다.
호란은 무릎 위에 고개를 떨구고 다른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 * *
단이 눈을 떴을 때는 동틀녘 가까운 때였다.
그는 창밖에 새벽 어스름이 서린 것을 보고 혀를 찼다.
두통 때문에 잠시 눕기만 하려던 것이 어느새 깊이 잤다.
그래도 쉰 보람은 있어 두통은 한결 가셨다.
방안엔 잠든 시현과 저뿐 호란의 모습도 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바깥에서 불빛과 말소리가 낮게 새어 들어왔다.
어느 분이 그렇게 팔자가 좋으신지 간간이 웃음소리가 섞였다.
단은 겉옷을 대강 걸치고 대청으로 나섰다.
주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방이 두 간씩 있는 구조였다.
건너편 방 한쪽에서 불빛과 사람 소리가 나왔다.
다가가자 호란이 기척을 듣고 안에서 문을 열었다.
“단! 벌써 일어났어? 머리 아픈 건 좀 어때?”
“좀 나아졌습니다. 별일 없으셨어요?”
“아무 일 없었어! 이리 와서 앉아.”
단이 방 안으로 발을 디디자 하열이 자리에 앉은 채 가볍게 목례를 했다.
호란과 열 사이에는 차와 음식을 차린 소반이 있었다. 그릇은 이미 반 이상 비었다.
와. 단은 벌써부터 머리가 도로 아픈 기분이 들었다.
분명 호란 제가 먼저 망 보겠다고 했는데.
셋 중 둘은 잠들었고, 저 혼자 깨 있으면서 주는 거 다 먹고 다 마시냐.
그것도 지 입으로 첩자라고 한 사람이 주는 거를.
호란이 속 좋은 데는 정도란 게 없었고 단은 그 점을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싫어하곤 했다.
단은 이곳이 하열의 집이란 것부터 믿지 않았다.
혼자 살 만한 집도 아니었고 혼자서 이 정도로 완벽하게 관리할 수 있는 집도 아니었다.
보나 마나 하유관 총치부에서 의도를 갖고 관리하는 가옥이었다.
관에서 남 눈 덜 닿게 사람을 접대할 때 쓰는 곳이라 보면 얼추 맞을 것이다.
언제든 다른 용도도 될 수 있겠고.
“앉아! 차 마실래? 열이가 그러는데, 이거 엄청 좋은 차래.”
호란이 새 잔을 소반에 올리면서 활기 있게 물었다.
단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같은 것을 마셨습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됩니다.”
열이 엷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음성엔 살짝 가시가 있었다.
단이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
“아니…. 괜찮아요. 그쪽 볼일은 잘 끝났습니까?”
“위께서 마음 써주신 덕분에요. 정확하게 한 시진만에 돌아왔습니다. 뒤에 아무도 달고 오지 않았습니다.”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호란이 양쪽의 눈치를 보더니 열에게 말했다.
“열아. 너무 마음 상하지 마.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단은 지금 좀 날카로워서. 오늘… 아니, 어제 여러 가지 있어서.”
“예. 이해합니다. 위를 모신 입장에서 먼저 살피고 경계하는 것도 아래의 일이지요.”
열이 부드럽게 웃더니 덧붙였다.
“조금 덜 서툴게 경계해주면 서로 편하겠지만. 아무한테나 그런 걸 바랄 수는 없지요.”
단은 웃고 말았다.
안 그래도 예인치고 성격 좋은 치를 별로 못 봤다.
이자는 그중에서도 절기라더니 과연 한두 번 시비 터 본 태가 아니었다.
이쯤 되면 호란도 열이 일부러 단의 신경을 긁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열아. 그러지 마. 단은 아파. 마음 상하면 안 돼.”
호란이 찌푸리자 열이 웃으면서 말했다.
“제 성격이 원래 이렇답니다. 호란 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열은 단을 바라보았다.
“호란 님이 불편해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태도가 나빴던 걸 인정합니다. 제가 사과하면 그쪽도 아까 한 말을 사과해 주겠습니까?”
열이 이렇게 말하자 호란이 단을 향해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왠지 울컥한 단이 쏘아붙였다.
“뭐를 사과하란 겁니까. 염탐꾼 쪽? 관기 쪽? 아니면 관기가 염탐꾼인 게 뻔하다고 한 쪽?”
“단! 그런 말이 어딨어?”
호란만 화들짝 놀랐을 뿐 열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호란은 안절부절못하더니 열을 보고 사과했다.
“미안해. 단이 원래는 저러지 않는데, 몸이 좀 아파서….”
“아니요. 전부 사실인걸요. 평소에도 많이 듣는 말이고.”
열이 미소지었다. 미소 끝자락에 살짝 처연한 기색이 있었다.
호란이 그것을 보고 더욱 어쩔 줄 몰라 했다.
지켜보는 단은 짜증이 나서 다 엎고 싶었다.
저딴 속 보이는 수작에 넘어가는 건 물정 모르는 거 이전에 정신머리의 문제였다.
아니면 얼굴 밝히는 문제거나.
호란이 단의 소매를 살짝 당겼다.
“단, 방금은 열이한테 너무 심했어. 열이가 이렇게 도와주는데.”
“무슨 생각으로 도와주는지, 언제까지 도와줄지 누가 압니까.”
“어쨌든 지금은 열이가 우릴 도와주고 있잖아. 그건 고마운 거야. 시문 님도 믿을 땐 믿어야 한다고 했잖아. 응? 단….”
단은 결국 울화를 터뜨렸다.
“믿고 싶으면 너나 믿고, 난 좀 내버려 둬! 대체 언제부터 알았다고 열이 열이 타령이야?”
열이 단을 빤히 보았다.
단은 실수를 깨닫고 인상을 쓰며 얼굴을 덮었다.
지금 자신은 정말로 평소 상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 방에 와서 앉지를 말아야 했다.
열이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이자가 본디부터 이렇게 호란 님께 방자하게 대했습니까?”
호란이 단 쪽으로 붙으며 손을 저었다.
“괜찮아. 그런 거 아니야. 단하고 나는 친구라서 그래.”
“본디 그랬다는 말씀이군요.”
열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저로서는 이해가 안 갑니다. 호란 님이 친하게 여겨주신다 한들, 아래가 거기 응석을 부리는 데에는 한도가 있어야 합니다.”
단은 화가 나지 않았다. 뭐라 말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와 호란의 사이를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할지 그는 이전부터 다 알고 있었다.
화를 낸 건 호란이었다. 검은 눈동자가 차가운 빛을 냈다.
그가 열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열아. 네 생각이 어떻든 상관없어. 이건 단하고 내 사이 일이야.”
열은 호란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지만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주제넘은 말을 용서하십시오. 과연 이자의 방자함이 두 분만의 문제로 끝나는 일입니까?
전날 이자가 위께 얼마나 큰 누를 끼쳤습니까. 곧바로 총치전 앞에 무릎 꿇어 법도를 넘어선 죄를 빌고 위의 은덕을 칭송했어야 마땅하지요. 그랬으면 나쁜 여론도 훨씬 덜하고, 위께서 이토록 곤경을 입으시는 일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자는 제 몸을 사리고 보전할 뿐 아무 도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위께서 하유관을 위해 그리 애써오셨건만, 한 사람의 안하무인으로 얼마나 많은 일이 그르쳐졌습니까.”
호란의 얼굴에서 핏기가 내렸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그건….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니야. 그런 걸로 단을 탓하면 안 돼. 그런 걸 하라고 하면 안 돼.”
“어째서입니까? 이자가 뭐가 특별해서요. 대체 위께서 이자를 얼마나 총애하시기에.”
열이 눈을 가늘게 하며 단을 보았다.
“설마하니, 이자가 호란 님과 맞먹는 듯 구는 것도 위께서 뜻하신 일입니까?”
호란은 거의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펄쩍 뛰었다.
“아니야! 시문 님이 어쩌셔서 우리가 친구가 된 게 아니야. 우린, 우린… 진짜 친구고, 그리고…. 말했잖아, 단이 얼마나 몫을 많이 하는데!”
“그렇습니까? 흔한 경우기는 하군요. 자기는 남보다 잘났으니 당연히 특별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열이 가벼운 경멸조로 말했다.
“결국에는 운 좋아서 주인 복 누리는지를 모르고.”
“열아. 그만 해!”
호란이 결국 언성을 높였다. 열은 그제서 입을 다물었다.
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답할 가치도 없었고 그럴 기력도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