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 * *
시현은 성 아래의 호란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단은 한쪽 계단에 발을 디디려던 참이라 반대편에서 시현에게 다가가는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사정을 모르는 주위 사람은 아무도 그를 막을 생각을 안 했다.
어쨌든 그는 총령이었다. 제 위치를 벗어나 문에게 접근한다 한들 쉬이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물러나! 모두 떨어져!”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에 놀란 단이 뒤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계인이 시현의 팔을 뒤에서 비틀어 잡고 있었다.
“계인!”
시현은 벗어나려 했지만 곧바로 날을 세운 단도 끝이 목에 닿아왔다.
계인이 단도를 꽉 쥐어 시현에게 들이대며 주위에 거칠게 소리쳤다.
“물러나! 물러나라고! 문이 상한다!”
각루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혼비백산해서 흩어졌다.
계인이 살기등등한 소리로 요구를 외쳤다.
“동문에 큰 수레 둘과 마력석 닷 궤를 준비해라! 내 가족과 집안의 호위대를 데려와라! 바로 하지 않으면 문께서 어찌될지 모른다!”
시현이 등 뒤의 계인에게 말했다.
“그만두어라! 이럴 일이 아니다, 아직 돌이킬 수 있다!”
“닥쳐!”
계인의 목소리에는 시현에 대한 뚜렷한 적의가 담겨 있었다.
그가 높은 소리로 부르짖었다.
“편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뒤로 휘무와 짜고 나를 옭아넣었어! 처음부터 다 알고 한 거지! 사람을 버린 패 취급하고!”
시현은 무엇이 계인을 이토록 몰아넣었는지 곧 깨달았다.
지씨옥이었다. 정확히는 지씨옥으로 휘영이 행사한 위력이었다.
그는 소용없을 걸 알면서도 계인을 달래려 했다.
“아니다. 지씨옥에 대해 미리 말하지 못한 건 팔대관성 사이의 협약 때문이다. 그대를 속이려 한 것이 아니다.”
“웃기지 마! 당신도 휘무가 판 짜는 걸 거들었잖아! 날 제일 등신 만든 건 당신이야!”
계인이 눈이 벌게져서 소리쳤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독침 사건 전만 해도 휘영은 지씨옥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시현은 내내 총령부와 함께 대량의 작은 마력석에 의존한 작전을 논의해 왔다.
이후 휘영은 마음을 바꿔먹었지만, 계인에게는 내용을 전달하지 않은 것이다.
아마 그쯤 해서 마력석 보유고의 부실과 그 내막을 파악했을 것이다.
휘영은 시현과 제 사람들을 중심으로 주각루를 채웠다. 계인과 그 파벌은 다른 데에 허수아비처럼 벌여두었다.
그리고 모두의 눈앞에서 직접 전선을 쓸어버렸다.
의미는 분명했다. 그 행동은 계인 파벌의 사람들에게는 경고였고 계인에겐 선고였다.
시현은 다시 계인을 진정시키려 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생각하라. 잘못이 있다 해도 그대에겐 그간 쌓은 공이 있지 않은가. 죄가 가벼워질 길이 반드시 있다.”
“당신은 휘무를 몰라. 이미, 이미 늦었어….”
계인이 중얼거렸다. 그는 두려움으로 반쯤 미친 것처럼 보였다.
손이 떨리는 결에 칼끝이 목을 살짝 찔러들었다. 시현이 머리를 젖히며 신음했다.
계인은 눈을 희번득거리더니 사방에 소리쳤다.
“어디서든 주문 쓰려 하면 바로 안다! 하늘족이 다가와도 안다! 허튼 생각 하지 마! 그래, 하늘족은 전부 각루에서 내려가! 당장!”
단은 허둥대는 사람들 틈에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소리 안 나게 걸낭을 내려놓고, 총통을 감싼 천을 풀면서 동시에 공이를 막아둔 노끈을 뺐다.
마침 가진 것은 위력 대신 명중률을 높여 놓은 장총이었다.
계인은 주위의 법군들과 하늘인들에게 온통 신경이 분산되어 있었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고 단은 움직이지 않는 표적 쏘는 데 자신이 있었다.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계인과는 달리 단의 움직임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단이 제대로 겨누기도 전에 시현이 소리쳤다.
“안 된다, 단!”
시현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계인은 극상격이다! 잘못이 있어도 아래가 손댈 수 없다! 네가 죄를 받는다, 총통을 치워라!”
단은 우뚝 선 채로 얼어붙었다. 그의 눈빛을 본 시현도 그대로 얼어붙었다.
뒤늦게 단을 눈치챈 계인이 칼날을 세우며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무기를 버려! 문이 상할 것이 무섭지 않느냐!”
단은 천천히 장총을 내려놓았다.
시현은 단에게서 시선을 피하면서 계인에게 다시 말했다.
“계인, 제발. 가족을 생각하라. 그대의 반려와 자제들을 생각하라.
그대는 격이 있고 공이 있으니 죄가 있어도 연좌가 가족에게 닿지 않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함께 도주하면 다르다. 도주했다가 붙잡히면 다들 어찌되겠는가.”
“그러니까 당신도 함께 가야 해. 안전한 곳에 다다를 때까지의 인질이다.”
계인의 음성에 더욱 날이 섰다. 시현이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죄를 어디까지 크게 할 셈인가….”
그래도 그는 계속 계인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설령 도주에 성공한들 어디로 간다는 것인가. 무작정 도망 나가서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닥쳐! 알아서 할 거라고! 나도 인이야! 마력석만 있으면 어떻게든 돼!”
계인이 소리쳤다. 칼끝이 다시 목을 찔러와 시현은 더 말하지 못했다.
계인은 이미 이성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라곤 눈앞에 닥쳐온 일을 회피할 생각뿐이었다.
변고 이후로 그가 해온 일이 다 그랬다.
저지른 잘못에 직면하길 피하고자 점점 더 큰 잘못을 저지르며 일을 크게 만들어갔다.
이제는 누구도 그가 스스로 망친 신세를 수습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황은 더 위험했다.
아무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몰랐다.
주위의 법군들도 그것을 눈치채고 필사적으로 계인을 달래려 했다.
상급관 하나가 무릎까지 꿇으며 호소했다.
“다 준비하겠습니다, 총령님! 가족분들도 모셔오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부디 날을 한 치만, 아니 반 치만이라도 내려주십시오! 이미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이상 문을 상케 하시면 아니 됩니다!”
그 말에 계인이 손을 조금 낮추었다.
하지만 시현은 그 서슬에 칼끝이 움직이면서 피부를 더 긁어놓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막막했다. 설득할수록 계인을 더 자극하는 것 같았다.
휘영이 순순히 계인의 협박에 응할 리도 없었다.
상황이 나아질 길이 안 보였다.
그래도 단이 계인을 쏘아버리게 둘 수는 없었다.
계인은 하유관의 극상격이자 관성과 속령 전체의 군권을 상징하는 총령이었다.
권위에 금 간 휘영이 제 자존심 값으로 단의 목숨을 받아가고자 할 것이다.
단이 시현에게 중요한 사람인 걸 거듭 확인했으니 더욱 그것만을 원할 것이다.
휘영은 원한 걸 반드시 갖는 사람이었다. 그 지씨옥까지도.
시현으로선 도저히 감수할 수 없는 위험이었다.
그때 단이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두 손을 공손히 앞에 포개 공수한 자세였다.
하지만 그의 키가 큰 만큼 계인은 바짝 긴장했다.
계인이 칼을 추키며 뭐라 소리치려는데 단이 먼저 큰 소리로 말했다.
“계인이시여. 혹시 하유관에 마력석 군납하시던 백희상단 방씨 온의 어르신을 기억하십니까?”
“온의?”
계인이 표정이 바뀌었다.
물론 하유관에서 군납에 연관된 사람이 중서부 상권을 휘어잡았던 백희상단 방씨 온의를 모를 수는 없었다.
온의는 죄짓고 추방당한 딸을 보살피고자 상단주가 된 사람이었다.
상행을 하면서 사방에 자선과 구휼을 베풀어 중서부에서는 웬만한 고관보다 덕망과 명성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벼슬을 내려놓고 관성을 나와 황야에서 살아간 땅인이었다.
계인이 어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못 정한 채 물었다.
“온의가 왜? 네놈이 온의를 아느냐?”
단은 이 화제가 계인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것을 알고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자못 심상한 상황인 것처럼 여유 있는 어조로 말했다.
“계인께서 가족분들과 함께 하유관을 나서실 작정을 하셨다 하시니까요. 그러시다면, 이후로는 온의 어르신의 전철을 밟아가시면 아주 좋을 것입니다.”
“온의를?”
“예. 온의 어르신께서는 다천관서 누리시던 온갖 부귀영화를 놓으시고 따님 한 분과 함께 거친 황야로 나오셨지만 항시 마음에 시름이라곤 없으셨습니다.
법술로 많은 이를 지켜 모두의 존경을 받으셨고 만족한 수십 년을 보내셨지요. 계인께서도 뜻하시면 가족과 함께 여생을 그리 보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단은 계인을 달래고 위로하는 듯 다감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말만 들으면 그에게 희망을 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단이 말할수록 계인의 눈에는 오히려 짙은 불안이 깃들었다.
계인이 더듬거렸다.
“온의는… 달라. 그자는 다르지 않으냐.”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살 길은 찾기 나름입니다. 마음은 먹기 나름입니다. 법술은 계인께서 더 고강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온의가 다천관을 나온 건, 딸 때문에….”
계인이 말을 흐렸다.
그가 차마 못 한 말은 온의는 죄지은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이었지만 단은 못 알아들은 척 말을 받았다.
“예. 따님께서 대역을 범하셨지요. 서격 시험 치를 자격을 잃고 20년 추방을 당하셨습니다.”
단이 슬픈 듯 눈썹을 내려뜨렸다.
“온의 어르신께서 백희상단과 유람하시면서 따님께 세상의 백 가지 기쁨을 선사하셨지만 단 하나, 따님께서 평생 격에 달하지 못한 슬픔만은 풀어주지 못하셨습니다. 한스러운 일이지요.”
“격….”
계인이 불안한 듯이 중얼거렸다.
도망쳐 관성 밖에서 마주하게 될 삶에 대해 처음으로 실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았다.
단이 부드럽게 말했다.
“의외로 황야도 살 만한 곳입니다. 부, 권력, 명성, 재화, 정과 기쁨. 사람 사는 데 있는 모든 것이 다 있지요. 없는 것은 땅님들의 격, 그것 하나뿐입니다.”
계인의 표정을 일그리며 반박했다.
“격, 나는 극상격이다. 그건 하유관 밖에 나가도 변하지 않아.”
“아니요. 계인께서는 폐격되실 것입니다.”
단이 잘라 말했다. 시종 다감한 듯했던 그의 음성이 단호하게 날을 세웠다.
계인이 안색이 변해 숨을 들이켰다. 단은 틈을 두지 않고 읊었다.
“위의 위이신 문의 시해는 모의만으로도 대역, 실행할 시도를 하셨으니 말할 것 없이 대역, 전시의 군수물자 횡령 또한 대역입니다.
작은 죄는 땅님께 닿지 않고 여간한 죄는 상격 이상에 닿지 않지만 대역은 신분으로도 격으로도 면할 수 없습니다.
시문께서 용서하셔도 하유관 사법서가 용납지 않을 것입니다. 폐격되실 것입니다.”
계인이 고개를 휘저었다.
“안 돼, 그건 안 돼! 나는….”
그가 황망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둘러본들 그를 구원할 것이 눈에 띌 리 없었다.
계인의 얼굴에 절망감이 깊어졌다. 계인이 시현을 콱 끌어당겼다.
“당신이… 문이시여, 당신이 문령으로 날 사면해 주시오! 나를, 내, 내 가족도….”
“계인….”
시현이 안타깝게 그를 불렀다.
계인은 횡설수설하면서도 시현이 정말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절망과 두려움이 그를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단이 공수한 자세 그대로 등을 곧게 세웠다.
그가 또렷하고 위압적인 소리로 말했다.
“계인이시여. 자진하십시오.”
계인도, 시현도,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이 다 굳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