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 * *
의자 팔걸이를 부여잡고 그가 겨우 말했다.
“그러거라.”
장지가 열리고 단이 들어왔다.
그는 시현이 아무것도 안 하고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은 걸 보고 좀 놀란 것 같았다.
“왜 불도 안 켜고 그러고 계세요. 피곤하시면 소세 준비를 시킬까요?”
“아니다. 아직은 되었다. 불도… 그냥 두거라.”
“그럼 작은 것 하나만 켜겠습니다.”
단은 방 한쪽의 작은 등을 켜고 불을 최대한 낮게 한 다음 침상 옆의 물주전자를 확인했다.
채워둔 물이 안 줄고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살짝 인상을 썼다.
“나리님, 제가 여행 중에 수분 보급 잘 하시라 말씀을 계속 드린 건, 여행 안 할 땐 안 드셔도 된다는 뜻이 아니었는데요.”
단이 주전자를 기울여 잔을 채웠다.
곧 큰 손이 탁자에 물잔을 내려놓았다.
시현은 무엇에 끌리듯 불쑥 물었다.
“이제는 내 물 내가 떠 먹으라고 안 하느냐.”
“아무리 말씀드려도 스스로 안 챙기시잖아요. 저도 수가 없죠.”
단이 쓱 웃으며 가볍게 받아쳤다.
시현은 쓴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넉살을 이길 수가 없었다.
자기가 착각한 게 꼭 자기 탓만은 아니었다.
저리 스스럼없는 태도에다, 그만큼 도움을 받고 보살핌을 받으면 대개는 착각하지 않을까.
조금은 가까워지고 있다고.
더는 나쁜 감정이 없을 거라고.
있어도 풀리고 있을 거라고… 노력하면 풀 수가 있을 거라고.
착각한 게, 기대감을 가졌던 게 꼭 시현의 잘못은 아니었다.
단은 환기를 마치고 침소를 나가려는 참이었다.
좋은 일이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시현이 충동적으로 말했다.
“단, 넌 역시 내게 화가 나 있지 않으냐.”
단이 돌아보았다. 그가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자꾸 왜 그러시는 건데요.”
단은 다가와서 탁자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가 시현을 달래려는 듯이 말했다.
“왜요. 새벽에 성질 부렸던 거 때문에 그러세요? 그땐 진짜로 두통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아니면 계인 일 때문에 맘 상하셨어요? 달리 방법이 없었잖아요.”
시현이 이마를 짚었다.
“조금이라도 솔직해져 주면 안 되겠느냐. 계인의 일로 마음이 상했던 것은 내가 아니다. 너였다.”
단이 살짝 굳었다.
표정엔 변화가 없어도 깊은 데서 그의 감정이 변한 걸 시현은 느낄 수 있었다.
시현이 말했다.
“나라고 말리고 싶어서 말렸던 게 아니다. 계인을 쏘면 그건 위아래 문제만이 아니라 남운관과 하유관의 문제가 된다. 휘무가….”
“아니, 그때 제가 인상 좀 긁었다고 이러시는 거예요?”
단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을 끊었다.
“나리님, 그건 잠깐 울컥했던 것뿐이에요. 나리님한테 화낸 게 아니에요. 저도 다 아는데요, 걱정해서 말려주신 거.”
시현은 멍하니 단의 얼굴을 보았다.
답답한 표정에 살짝 짜증까지 섞이는 것이 자못 진짜 속내를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정말로 단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시현이 안 믿는 걸 눈치채고 단이 설득조가 되었다.
“저도 성질이야 많이 났었죠. 상대가 칼을 들이대도 내 주제엔 저항도 하면 안 된다는데, 어떤 놈이 속이 좋습니까?
그래도 순간적으로 욱한 것뿐이라고요. 제가 나리님한테 신세 진 게 몇 번이고 빚진 게 얼만데, 고작 그런 걸로 억하심정을 품겠어요? 더구나 저 살려주신다고 그런 건데.”
시현의 어깨가 더 처졌다.
그는 무언가 깨달은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시현이 맥없는 소리로 말했다.
“그거구나…. 그게 너를 더 화나게 하는 거구나. 네가 미워하는 사람에게서 자꾸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게.”
단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시현은 이 이야기를 붙들고 늘어진 걸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단이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제가 언제 그런 소릴 했어요….”
시현이 씁쓸하게 말했다.
“말 안 해도 알아야 했던 일이 아니냐. 너는 마음에서 내 도움을 원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매번 주위 사정이 너를 몰아넣었지. 그만큼 화나는 일이 세상에 또 없었을 것이다.”
단이 손으로 얼굴을 쓸고 작은 숨을 토했다.
그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무슨 얘길…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데요. 저한테 무슨 소릴 듣고 싶으신데요.”
“내가 미우면 그저 미워하면 된다. 단. 빚이니 신세 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
시현은 여전히 후회하는 채로 말했다.
“너도 사실은 알지 않느냐. 그동안 있었던 일 중에 네가 잘못해서 일어난 건 아무것도 없다. 내가 별다르게 잘한 것도 없다.
네가 매번 위험하고 부당한 처지에 내몰리는 것도, 네 말과 수단이 세상에 있는 그대로 통하지 않는 것도, 무엇 하나 네 탓이 아니다.
탓을 찾자면 오히려 나와 다른 땅인들의 탓이겠지. 내가 원래 있던 힘으로 뒤늦게 수습하는 척을 했다고 그게 무슨 덕이니 신세가 되겠느냐.”
단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짧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깨가 흔들렸다.
잠시 숙이고 있던 그가 작게 말했다.
“시발. 이걸 확 죽여버리지도 못하고.”
크지는 않아도 거칠어진 음성에 시현이 흠칫했다.
단이 눈을 들었다. 눈동자 가운데에서는 언제나처럼 불을 품은 주홍이 타고 있었다.
그가 애써 소리를 누르며 말했다.
“아량도 미치게 넓으시지. 그래서, 이제는 미워하는 것까지 네 허락 받고서 미워하라고? 야, 정말로 돌은 거 아니냐?”
“그런 뜻이… 그럴 리가 없지 않으냐!”
시현이 펄쩍 뛰었다. 그가 탁자를 짚고 몸을 내밀었다.
“그런 게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다. 네가 빚진 마음이 될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거다! 넌 내게 아무것도…. 오히려 신세 지고 있는 건 내 쪽이고, 너를 필요로 하는 것도 내 쪽이고, 나는 항상….”
단과 눈이 다시 마주치고 시현은 말을 멈추었다.
그는 정말로 말 꺼낸 것을 깊이 후회했다.
시현이 단과 말로 풀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건 단이 꼬여 있어서가 아니었다. 원래도 시현과 사람들의 사이가 항상 그랬다.
그가 불만을 말하면 질책이 되었다. 감사를 말하면 치하가 되었다. 바람을 말하면 명령이 되었다.
그가 이해한다고 말하면 허락이 되었고 선의를 드러내면 시혜가 되었다. 호의는… 그건 말할 것도 없었다.
시현이 그걸 잊은 게 아니었다.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그는 그냥 착각을 한 것뿐이었다.
자신과 단 사이에는 위아래를 나눈 선 이외의 무엇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있기도 있었다. 그가 기대한 호의 비슷한 감정이 아니었을 뿐.
시현은 단이 저를 대하는 태도를 바꿨던 이유도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단은 최소한, 그의 적의를 시현이 더 이상 접하지 않도록 해주려던 거였다.
속에 뭐가 깔렸든 표면에는 위아래 관계만을 남겨두려고 했다.
부채감에서나, 어쩌면 그저 선량한 마음에서.
시현은 그것이 더 기분 상했다.
그런 사탕발린 배려까지 받아야 할 정도로 그의 마음이 나약하지는 않았다.
시현은 내밀었던 몸을 거뒀다.
그는 짧게 입술을 물었지만 곧 단을 똑바로 보았다.
“나는, 내가 처음에 하려던 말은… 나도 바보가 아니다. 네게 이유가 있고 신의가 있어서 이 여행을 계속할 뿐 속에서는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을 안다. 이제 와서 안 그런 척할 필요가 없다.”
“…….”
단은 말없이 비틀린 웃음만 지었다.
시현이 다시 말했다.
“네 마음속에 무엇이 있든 그것은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상관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나는… 나는 아무 마음을 쓰지 않을 것이다. 너는 처음부터 남에게 손이나 올리는 성질 비틀린 사람이었다. 나도 너를 계속 싫어할 것이다.”
단이 또 헛웃는 소리를 냈다. 직전의 비틀린 웃음과는 조금 달랐다.
단이 웃으며 물었다.
“그거 언제까지 붙들고 질질 끌 건데?”
“평생 담아둘 것이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이미 몇 번을 말하였느니.”
단이 다시 웃고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습관처럼 침소 전체에 시선을 스친 그가 물었다.
“소세 물은?”
“이곳의 시중꾼을 불러다오. 두 각 후에 와달라 해라.”
“아, 욕은 내가 다 먹는다니까, 진짜로.”
단이 투덜대며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기척이 거실 밖으로 사라지자 시현은 한숨을 쉬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미끄러뜨렸다.
그는 속을 더 상하지 말기로 마음먹었다. 내일을 생각하면 쉬어야 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후회도 자괴감도 지나갈 것이다.
그가 망치는 일이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 * *
다음 날 오전, 총치 조씨 휘무는 승전을 선언하는 포고문을 반포했다.
시현에게도 공식으로 사자를 보냈다.
시현은 운주관 배알처에 자리 잡고 사자를 맞았다.
미리 전한 시간이 되자 배알처의 문 여섯 쪽이 모두 열렸다.
활짝 열린 문으로 관인 차림을 한 다섯 사람이 들어왔다.
맨 앞에는 대언의 복식을 갖춘 남자가 있었다.
깃과 아무 문양이 없는 연옥빛 단령을 입었고 직위를 나타내는 띠를 두르지 않았으며 흰 사선을 펼쳐 들어 얼굴을 가렸다.
직함을 가진 사람으로서나 한 개인으로 온 것이 아니라 오직 위의 말을 전하는 이로서 자리하였음을 의미했다.
뒤에 선 네 관인은 시현 앞에 허리를 숙였으나 대언은 곧게 선 채였다.
그가 사선 뒤에서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대 남운관 총치부 전권대리 무상 완씨 시문 전, 대 하유관 총치총령 조휘영, 대언.
시문께서 본성에 있을 변을 보아 지나치지 않으시고 먼 길을 달려와 경고해 주신 데 크게 감사하오.
귀한 지혜를 나누어 본로의 식견을 넓히고 적에 맞설 기지를 주신 데 크게 감사하오.
어려운 싸움 앞에 함께 일어서 굳은 성벽 같은 전우가 되어 주신 데 크게 감사하오.
시문의 베푸신 바가 모두 본성의 힘이 되어 뜻한 대로 승전을 거두었으니 그 기쁨을 함께 나누려 하오.”
시현이 짧게 답했다.
“감사를 받아들이겠다.”
“그 또한 시문의 혜량하심으로 알고 감사히 여기겠소.”
남자는 여기까지 말하고 얼굴을 가렸던 사선을 천천히 내렸다. 공식적인 대언의 역할이 끝났다.
대동했던 다른 관인들은 다시 한 번 시현에게 예를 한 뒤, 모두 눈을 내리깔아 대언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뒷걸음질로 처소를 나갔다.
시현의 처소에 있던 시중꾼들도 마찬가지로 얼굴을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단도 눈치를 보고 호란을 끌고 안쪽 방으로 빠졌다.
문이 모두 닫히고 배알처에 남은 것은 시현과 대언으로 온 사람 둘뿐이었다.
사선 아래서 드러난 얼굴은 하열이었다.
평소 느슨하게 묶어 한쪽으로 늘어뜨리던 머리칼을 단정하게 틀어올리고 있었다.
그는 크고 정중한 동작으로 두 팔을 올려 시현의 앞에 큰절을 올렸다.
바닥에 이마를 댄 채 움직이지 않는 열에게 시현이 말했다.
“고개 들기를 허한다.”
열이 얼굴을 올렸다. 그가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위 없는 이를 뵙습니다. 불초 하열이 감히 대언의 역을 지고 무상 전에 입을 열고자 합니다.”
“말하라.”
“이번에 본성의 대역한 자들로 인해 위께서 연이어 고초를 겪으신 것은 본성이 고개를 들 수 없는 일입니다. 휘무께서 심심한 유감을 표하셨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