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11
111화
* * *
시현이 말했다.
“휘무의 본뜻은 항상 진정하였고, 그가 안팎으로 큰 어려움을 만나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음을 안다. 이미 뜻같지 않게 된 일들을 어찌하겠느냐. 내가 마음에 담아두지 않겠다.”
“대하와 같은 은덕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열이 한 번 더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그가 머리를 숙인 채 말했다.
“대죄인 정계화의 망동이 감히 위께 누를 끼치고 본성에 큰 수치를 입혔습니다. 위께서 너그러움을 베푸셨으니 본성에서도 불문할 것은 불문할 것입니다.”
“그리 알겠다.”
이것으로 계인이 시현에게 직접 칼을 들이대어 상처 입힌 것과, 단이 많은 눈 앞에서 하유관의 극상격에게 화기를 겨누려 하고 죽으라 요구한 것이 함께 없던 일이 되었다.
시현은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열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했다.
“정계화와 그 일당의 처분은 어찌하시겠습니까.”
“그것은 하유관의 사법서에 맡기겠다.”
“그러시다면 위께서는 부디 떠나실 날까지 편히 머무시고 본성의 잡다한 일에는 마음을 쓰지 마소서. 이후의 회의에서는 마력석 일로 부정 저지른 자들의 이야기가 끝없이 나올 터. 어지러운 모습을 보이기가 난망하다고 휘무께서 이르셨습니다.
이미 뜻을 깊이 나누었으니 굳이 더 대면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것이며, 다만 떠나실 때 관성 밖까지 전송하시겠다 하셨습니다.
나머지는 서신으로 갈음하셨습니다.”
“알겠다.”
열이 품에서 봉해진 서신을 하나 꺼내어 시현에게 받들어 올렸다.
시현이 서신을 받고 퇴실을 허하자 열은 예하고 다시 얼굴을 가리며 물러갔다.
열이 이렇게 조씨 휘무의 뜻을 전할 때마다 시현은 속으로 감탄하곤 했다.
열은 정보 다루기에 참으로 특출한 인재였다.
말이란 모아들이는 것만큼이나 내보내는 것도 중요한데, 열은 상부의 의향을 다듬어진 언어로 바꾸어 전하는 능력이 무척 뛰어났다.
대언이 나가자 시중꾼들이 돌아왔다.
시현은 거실에 들어 주위에 사람을 모두 물린 뒤 서안 앞에 앉았다.
휘영의 서신을 펼치자 소리글자와 뜻글자를 격식 없이 섞어 휘갈겨 쓴 악필이 드러났다.
인사치레도 없이 대뜸 본론이 시작되었다.
이후로 향후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고 마지막에 또 돌 인간을 모조리 갈아버리겠다 욕하는 말이 있었다.
시현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서한을 끝까지 읽은 뒤 접어 넣었다.
그동안 휘영과 주고받은 필담이니 서한이 대체로 이런 식이었고, 오늘 것은 개중 온건한 편이어서 당황스러울 것은 없었다.
조휘영 무는 외모에서 느껴지는 첫인상과는 상당히 다른 사람이었다.
보화상단 채씨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성격에 괄괄한 데가 있었다.
특출하고 유능한 사람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명철한 직관이 있고 머리 회전이 무섭게 빨랐으며 난관을 뚫는 강력한 돌파력이 있었다.
다만 그 돌파력이란 것이 여러 측면으로 작용했다.
휘영은 성격이 급했고 뜻에 안 맞는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볼 것 없다 싶은 의견문을 구기고 찢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성질이 뒤틀리면 손에 잡히는 것을 아무거나 집어 던져 탁자에 벼루와 문진을 못 둘 정도였다.
회의 중에 이야기가 헛돈다 싶으면 쓱쓱 손짓해서 논제를 바꿔 버렸다.
하유관 관인들이야 의미를 알지만 시현은 올라오는 글의 내용이 갑자기 바뀔 때마다 영문을 몰라 곤혹했다.
일의 내용으로 가면 횡포가 더했다.
종일 고집을 밀어붙이다가도 다음날이면 불쑥 일을 뒤집기가 일쑤였다.
그는 자신의 명철한 직관을 믿고 일을 했지만 그 직관의 내용을 남에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가 하라면 하는 거였고 왜 하는지 모르면 그건 그 사람이 멍청한 거였다.
어떻게 하는지 모르면 당상관으로 있을 가치가 없었다.
하유관의 당상 회의란 만인의 소리 없는 고통의 다른 말이었다.
그래도 시현은 잘 적응했다.
휘영을 만나는 데 대해서는 충분히 각오를 다지고 온 터였다.
예전부터 남운관에서 조씨 휘무의 이야기가 나오면 아버지는 왼쪽으로, 어머니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하유관의 선진적인 공문서 제도를 남운관에 도입하고 싶어 했다.
보고는 물론 모든 공무를 문서로 처리해야 하는 하유관에서는 자연히 공문서를 다루는 기술과 제도가 엄청나게 발전했다.
서식 한 줄, 제도 한 끝마다, 강박적인 총치의 입맛에 맞춰 보고서 올리느라 갈려나간 하유관 관인들의 영혼이 담겨 있었다.
문명의 진보라 부르기에 걸맞았다.
다만 휘영은 문명 진보의 결실을 공짜로 나눠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현은 어릴 때 일을 잘 모르지만 십여 년간 많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항상 온후하고 침착하며 좀처럼 적을 만들지 않고 정치를 하는 사람이었다.
누구에게 감정적이 되는 일이 거의 없었고 특히 집에 와서는 성내거나 언성 높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자기가 낼 화를 전부 결혼 예물로 어머니에게 보내버리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그런 아버지도 조씨 휘무를 입에 올릴 때면 눈동자가 흔들렸다.
문서 관리 배워오라고 보냈다가 그대로 하유관에 빼앗긴 인재들 이야기가 나오면 시현에게 표정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렸다.
어머니는 조씨 휘무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말이 길어지면 폭발하니까 사람들은 되도록 어머니 앞에서 조씨 휘무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았다.
시현은 폭발하는 걸 몇 번 봤다.
이처럼 다방면에서 각오했기 때문에 생각 못 한 상황이 있어도 대체로 괜찮았다.
아… 그래도 녹렴과의 5년 흥정 일을 안 휘영이 당에서 펄쩍 뛰어내려 관인의 뺨을 치러 달려갔을 때는 시현도 정말 놀랐다.
예순이 넘었는데 움직임이 비호같았다.
학문에서 경지를 이루려면 무엇보다 몸이 건강해야 한다는 어머니 말씀이 틀린 데가 없었다.
독대 때 지씨옥을 써서 땅을 엎고 전선을 밀어내자 제안했다가 성난 노인이 그 큰 탁자를 뒤집어버렸을 때도 무서웠다.
이대로는 멱살을 잡힐 것 같아서 시현이 먼저 문으로 도망가서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전각이 다 무너지는 소리를 냈으니 싸웠다는 말이 밖으로 안 날 도리가 없다.
독대 중에 오고 간 필담문을 철통같이 보안한들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시현은 자신이 꽤 의연하게 대처했다고 생각했다.
류사예를 한번 만나두면 이후로 매사를 받아들이기가 쉬워진다는 단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람이 이럴 수도 있지. 음.
휘영 같은 사람이 ‘시문은 모든 걸 뜻대로 하려는 사람이지만 자기는 그렇지 않고, 나는 거스르는 것을 거스르게 두고 정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그럴 수 있다. 약간 놀랍기는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번에는 휘영의 직관에서 큰 도움을 얻었다.
시현은 모두 다 배움으로 여길 셈이었다.
시현은 남운관을 떠나온 이후 자신이 모든 면에서 발전했다고 생각했다.
다룰 법력을 잃었을 뿐 내면은 더 단단해졌다.
생각하는 것도 마음으로 느끼는 것도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도 예전보다 나아졌다.
그는 전이나 지금이나 스스로를 믿었다.
망쳐버린 일도 못 해낸 일도 많았지만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이 있었다.
모든 것을 다스릴 수는 없어도 그는 저 자신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었다.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 그의 닿지 않는 모든 목표를 향해서도.
장지문 너머에서 기척 하나가 이쪽의 기색을 살피는 것처럼 기웃거렸다.
맑고 다정한, 그가 잘 아는 기운이었다.
시현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향해 말했다.
“호란. 단에게 지도를 가지고 오라 하거라. 앞길을 잡아야겠다.”
16. 돌의 혼
수레 앞자리에 앉은 단은 눈앞에 든 별시계의 고도자를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신시도 되지 않았는데 오늘치로 생각했던 길을 거의 다 왔다. 단은 경로를 추가해서 오늘 안에 다음 읍성까지 가버리자고 마음을 먹었다.
생각보다 여정의 진행이 훨씬 빨랐다.
처음 계획을 완전히 다시 짜게 됐지만 일정이 당겨지는 건 나쁠 게 없었다.
“얼마나 왔어? 이대로 가면 돼?”
지도를 들여다보는 단에게 옆에 앉은 호란이 소곤소곤 물었다.
별것도 아닌 이야길 일부러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게 뭘 기대하는지 뻔했다.
하지만 바란다고 맞춰주면 불편해지는 건 단 쪽이었다.
단은 그냥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샘터에 안 들르고 바로 읍으로 갈 겁니다. 길 난 대로 죽 가시면 됩니다.”
단이 존대로 말하자 호란은 약간 실망한 얼굴을 했지만 곧 앞을 향해 소리쳤다.
“계속 간대! 누구 내가 차례 바꿔줄까?”
“아니, 안 바꿔줄 건데! 너 뛰고 싶으면 그냥 내려서 뛰어!”
수레를 끌고 앞에서 달음질치고 있는 짧은 머리의 하늘인 여자가 기운차게 소리쳤다.
같이 발을 맞춘 몫꾼들이 웃음소리를 냈다.
지금 일행은 다 해서 스물한 명이나 되는 큰 무리였다.
하늘인 몫꾼 열다섯 명, 반민 일꾼 셋이 늘어나고 수레도 짐까지 세 대가 되었다.
모두 하유관의 총치총령 조씨 휘무가 붙여준 사람과 물자였다.
하유관을 나선 첫날, 쉴 자리에 다다라 시현이 수레를 나오자 호위해온 하늘인 대열이 앞에 좍 늘어섰다.
더벅머리를 꽁지로 묶고 이마에 붉은 띠를 맨 중년 여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하늘인치고도 덩치가 어마어마했다.
키는 남자 하늘인들 사이에서도 머리 하나가 훌쩍 튀어나와 있고, 넓고 두터운 어깨는 산이 선 것 같았다.
하늘인은 남녀 안 가리고 체격 좋은 사람이 많기는 하다. 그래도 여자 덩치가 이렇게까지 큰 경우는 드물었다.
나이는 사십 대 후반으로 몫꾼의 전성기를 지난 축이었지만, 눈이 활기로 반짝이고 기세가 화산 같은 것이 젊은 몫꾼이나 매한가지였다.
그가 가슴 앞에서 기운차게 주먹을 마주치며 시현에게 허리를 꺾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서형이라 합니다. 위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유관에서는 별군 특동 적색대 대장이었으나 이제는 일개 몫꾼으로 시문 님의 사람입니다. 목숨 바쳐 호위하며 뜻을 따르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뒤에 선 열네 명의 몫꾼들이 허리를 굽히며 우렁차게 따라 인사했다.
반민 일꾼 세 사람도 무릎 꿇고 절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