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15
115화
* * *
호란은 인파를 정신없이 헤치며 앞으로 앞으로 나갔다.
빨리 쫓는다고 쫓았는데 어느새 상대의 종적을 놓쳤다. 사방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상대는 천천히 걷고 있었다. 호란이 쫓는 걸 눈치챈 것 같지도 않았다.
아직 근방에 있을 게 틀림없었다.
호란은 거리 끝까지 갔다가 상대를 마지막으로 본 곳까지 되밟으며 계속 주위를 살폈다.
지나쳤던 골목도 하나하나 확인했다.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쳤다.
녹렴은 분명히 죽었다. 회색 자갈돌이 되어 흩어진 걸 자기 눈으로 보았다.
그런데 그가 살아 있다면.
만약에 그게 돌 인간의 완전한 끝이 아니라면.
어쩌면.
정말 어쩌면.
가게들 뒤편으로 빠지는 어두운 샛길에서 찾던 이의 뒷모습을 발견한 호란은 곧바로 쫓아갔다.
상대의 팔을 붙잡아 돌려세우며 호란이 물었다.
“녹렴?”
잡아채인 팔은 저항 없이 휙 끌려왔다. 상대가 놀란 얼굴로 호란을 돌아보았다.
상대에겐 녹렴을 늘 휘감고 있던 명철하고 정돈된 분위기가 없었다.
기운이 없고 어딘가 멍해 있기까지 했다.
그래도 확실히 녹렴이었다.
지난번처럼 잘게 땋은 머리를 높이 틀고, 백저포 밑에는 금강이 입던 진청색 용 무늬 옷을 헐렁하게 걸치고 있었다.
“녹렴? 살아 있었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혹시….”
질문을 쏟아붓던 호란은 무엇을 깨닫고 말문이 막혔다.
상대의 얼굴은 녹렴이었지만 눈동자 색이 달랐다. 금색이 아니라 청흑색이었다.
상대의 눈에 슬픈 빛이 어렸다. 그가 말했다.
“아냐. 난 녹렴이 아냐.”
목소리도 달랐다. 석영처럼 성별을 알기 어려운 소리였다.
상대가 고개를 약간 떨구며 뇌까렸다.
“녹렴은… 없어. 이젠 살아 있지 않아. 이건 내 나름대로 추모 비슷한 걸 하려는 거였어. 약간이라도 녹렴이 여기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었어. 겉모습뿐이지만.”
호란이 잡은 손목이 천천히 굵어지면서 피부에서 검은빛이 빠져나갔다.
상대의 키와 골격과 용모가 변했다.
잘게 땋아 틀어 올렸던 머리칼이 풀려 늘어뜨려지고 앞머리가 짧아졌다.
새하얀 얼굴에 뚜렷한 비통을 드리운 채 청흑색 눈의 남자가 웃었다.
“난 금강이야.”
* * *
오거리에 선 시현은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착해 봤자 뭘 어떻게 해야 할진 하나도 몰랐다.
길은 다섯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어느 골목을 봐도 사람으로 북적일 뿐 온 방향조차 확신이 안 갔다.
호란의 기운이 멀어져간 방향은 기억했지만 그의 걸음으론 호란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단을 찾는 게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한 그는 오거리에 있는 가장 큰 가게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안경 쓰고 키 큰 남자 가는 것을 못 보았느냐.”
느닷없이 잘 차려입은 땅인이 말을 걸자 주인은 당황해서 굽신거렸다.
“예? 아니요. 여기는 장바닥이라 어르신네들은 잘 안 오시는데요.”
“아니다. 내가 찾는 사람은 반민이다.”
그렇게 말하면 지나간 반민은 또 너무 많을 거였다.
시현은 단의 특징을 좀 더 설명했다.
“백옥색 두루마기를 입었고, 머리칼 색은 금은사를 섞어 짠 것 같고, 눈 색은 금패 호박 같고….”
“잠깐 거기까지 하시죠.”
호란을 놓치고 되돌아온 단이 급하게 시현의 말을 가로막았다.
단이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대체 누구예요? 남이 들으면 사람이 아니라 무슨 전당포 전물궤가 나리님을 놔두고 도망간 줄 알겠습니다. 왜 하필 그런 데다 비교를 하시는 거예요?”
남들 눈이 많았지만 단은 시현에게 인상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주위 상인들이 좀 실망한 얼굴로 자기 눈을 들여다보려 하는 것도 제법 성질이 돋았다.
단이 짜증을 내자 시현은 당황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주위 물건 중에 가장 비슷한 것을.”
“보통 사람들은 주위에 그런 물건이 없어서 어떤 건지도 모르거든요….”
안 그럴래도 속에서 욕이 한바닥이 나왔다. 살 수가 없었다.
시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호란은 어디로 갔느냐.”
“호란 호위는 놓쳤어요….”
단도 초조한 얼굴을 했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면, 호란 호위가 녹렴을 봤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녹렴 같은 사람은 못 봤다.”
“저도 못 봤습니다. 녹렴은 분명 죽지 않았습니까?”
“그때 확실히 죽었다. 기운이 끊기고 모조리 스러졌다. 호란이 사람을 잘못 본 거라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정말 녹렴이 되살아났다면 호란 혼자 맞상대하게 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시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호란을 찾아보자. 근처에서 싸움이 일어난다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장거리는 난중에 맞은 명절로 들떠 북적일 뿐, 호란을 찾을 단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 * *
“난 금강이야.”
자신의 원래 목소리로 되돌아온 금강이 호란에게 서글픈 듯 말했다.
호란은 일순 고민했다.
금강은 전혀 전의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호란의 범위 안에 있었고 손목을 붙잡혀 있었다.
이대로 공격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발밑에서 강렬한 살기가 느껴졌다.
호란은 곧바로 금강을 놓고 뒤로 뛰어 물러났다.
땅바닥에서 금색 모래 줄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강렬한 기운과 살기를 띤 모래가 금강을 보호하려는 듯 그의 발치를 낮게 휘돌아 감쌌다.
“싸울 거야?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데.”
금강이 마음 상한 듯이 말했다.
“난 싸울 기분이 전혀 아니고, 모새는 한번 피를 보면 아예 판을 엎거든. 서로에게 좋은 결과가 안 될 거야.”
호란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물었다.
“그 모래, 그게 모새야? 하유관에 널 구하러 왔던 것도 그거야?”
“그래. 너하고 인사할 맘은 없대. 네가 내게 살기를 피워서 화가 났어.”
모래 줄기는 지금도 금강의 발밑에서 무럭무럭 솟고 있었다.
얇은 벽을 만들며 솟아 휘도는 모래의 굴곡면에 언뜻언뜻 푸른 기운이 비쳤다.
호란은 한 발 더 물러섰다. 섣불리 금강이 혼자라 여긴 건 명백히 자기의 패착이었다.
다른 돌 인간이 금강과 편을 맺으면 얼마나 강한 힘을 낼지 알 수 없었다.
금강은 사람으로 가득한 장거리를 건너다보며 핀잔조로 말했다.
“명절이잖아. 분위기 신경 써야지.”
맞는 말이라도 돌 인간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라서 호란은 약이 올랐다.
호란의 태세가 풀린 걸 눈치챘는지 금강의 주위를 돌던 모래 줄기에서 살기가 사라졌다.
모래들이 바닥으로 천천히 가라앉으며 사라졌다.
금강이 호란을 보았다.
“싸울 생각 이제 없어졌어? 그럼 이왕 만난 거 서로 이야기 상대라도 하지 않을래? 내가 지금 좀 쓸쓸하거든.”
“너하고 무슨 얘길 해?”
호란은 적대적인 음성을 냈다. 하지만 금강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내가 녹렴인 줄 알고 말을 걸었을 때, 넌 싸우러 온 게 아니었잖아. 녹렴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거 아니야?
나도 녹렴 이야기가 하고 싶어. 너는 녹렴을 알잖아. 모들은 지금 없고, 모새는 나랑 얘기하는 걸 귀찮아하고…. 얘는 언어 기반으로 사고하지 않아서 내가 꺼내는 화제에 관심이 별로 없어.”
호란은 결정을 못 하고 망설였다.
이대로 그를 보내주기도 찜찜했지만 금강은 적이었다.
호란에겐 단이나 시현처럼 적과 대화해서 정보를 얻는 재주가 없었다.
그런 걸 하고 싶지도 않았다.
죽여야 할 상대와 말을 섞는 건 언제나 꺼려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금강은 호란의 침묵을 동의로 해석한 것 같았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서서 얘기하기는 좀 그렇다. 어디 들어가서 뭐 먹을래?”
호란은 약간 놀랐다.
“네가 뭘 먹어? 사부… 석영은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먹을 수는 있지. 소화시키는 게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 타 버리는 거지만.”
금강이 장거리 쪽으로 먼저 몇 걸음 걸으며 말했다.
“가자. 같이 음식을 먹는 건 사교적인 의미가 있잖아.”
호란은 그다지 금강과 사교적인 의미가 있는 활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금강은 이렇게 덧붙였다.
“근데 나 너희가 요새 쓰는 화폐는 없어. 계산은 네가 좀 해줘.”
돈은 있다. 하지만 단이 작은 전낭을 끈으로 달아 주면서 신신당부한 것이 어디 가서 호구 되지 말라는 것이었다.
돌 인간에게 한턱을 내는 일은 명백하게 호구 되는 일에 들어갔다.
호란은 금강의 손가락에 있는 비싸 보이는 가락지를 가리키며 쌀쌀맞게 말했다.
“내가 왜? 먹고 싶어 하는 건 너잖아. 그 반지라도 바꿔서 먹어.”
“너희가 기껏 노력해서 화폐경제를 이룩했는데, 이제 와서 물물교환은 좀 아니지 않냐? 그리고.”
금강이 손가락을 들어 반지를 잘 보이게 했다.
굵고 매끄러운 백옥이 두 번 감긴 용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고 비늘 하나하나에 가는 금맥이 먹여져 있었다.
“이거 너희 왕가의 계승권자 증표야. 잘못 건네주면 이 동네 상인들한테 상상도 못 하게 폐가 돼.”
호란이 말이 막혀 반지를 바라보고 있자 금강이 천진하게 웃었다.
“예쁘지?”
호란은 이상한 패배감을 느끼면서 전낭을 꺼내 열었다.
그가 안의 동전들을 금강에게 보여주면서 물었다.
“혹시 이게 얼만지 알아?”
금강이 다가와서 호란과 머리를 맞대고 전낭 속을 들여다보았다.
“나 요새 물가 하나도 모르는데. 그래도 너희들 아직 지폐 안 쓰니까, 구리 섞인 동전이면 가치가 꽤 높을걸. 방 있는 가게 갈 수 있겠다.”
그건 지나친 호구의 영역이었다.
호란은 잠자코 금강의 팔을 잡아끌고 장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맨 처음 보인 떡볶이 노점으로 데려갔다.
사람들과 떨어진 맨 구석에 금강을 앉힌 호란은 손에다 돈을 쏟아 주인에게 보여주었다.
“두 사람이 먹으려면 돈 얼마나 주면 돼?”
노점 주인이 세상에 없는 호구를 보는 눈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그래도 상대가 하늘인이라 벗겨먹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주인은 호란에게 동전을 다 집어넣게 하고 한 개만 가져간 다음 접시 여럿에다 수북이 밀떡볶이와 당면순대를 내어왔다.
싸고 흔한 음식이었지만 금강은 좋아했다. 특히 떡볶이를 맘에 들어 했다.
“이건 처음 먹어보는 거야. 매운 맛이네.”
“맛을 느껴?”
“응. 느끼게 되는 데 오래 걸렸지.”
금강이 떡가락 하나를 꼬치로 찍어 들어 진지하게 들여다보며 말했다.
“달다, 짜다, 맵다, 쓰다 이런 건 다 느끼게 됐는데 맛있다 맛없다는 아직 모르겠어. 이번 시대 안에는 알기 어려울지도.”
“왜 느끼고 싶은 거야? 너네는 먹을 필요가 없지 않아?”
“알면 좋잖아. 내가 ‘아름답다’가 뭔지 이해했을 때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거든. 그러니까 ‘맛있다’도 알게 되면 굉장할 거야. 틀림없어.”
금강이 꿈꾸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에는 살아 있는 것을 만질 때의 석영을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었다.
호란은 기분이 무척 이상해졌다. 그가 물었다.
“너희는… 대체 정체가 뭐야? 언제 어떻게 생겨난 거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