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21
121화
* * *
서형이 기분 좋게 말했다.
“안 돌아가려고 나온 거라고. 내가 분명 시문 님 호위대 지원할 때 말했을 텐데? 니네들 꼴 보기 싫어서 지원하는 거니까 따라오지 말라고.
니놈들도 니놈들이고, 그놈의 하유관 꼰대만 그득하고 아주 지겨워서 죽을 뻔했다.”
“지겹기는. 대장 고작 4년 반쯤 전에 오지 않았어?”
해영이 말했다. 서형은 정색을 했다.
“4년 반이면 엄청 오래 있은 거지! 원래 나 한 동네서 2년, 끽해야 3년 안 넘긴다. 하유관 정도면 내 인생에서 세 번째로 길게 산 동네라고.”
강호가 불만스러운 듯이 말했다.
“무리 옮겨다니는 게 뭐 자랑이라고.”
“자랑은 아니지만, 안 될 건 또 뭐야? 어디 가서든 내 몫 하고 살면 되지.”
서형이 씩 웃었다. 그는 호란 쪽을 보더니 설명하듯 말했다.
“내가 장소나 사람한테 빨리 질려. 남자한테도 빨리 질리고. 좀 익었다 싶으면 자리 바꿔주는 게 체질이야. 하유관에서는 좀 오래 있었지. 귀찮게 대장이니 뭐니 역할이 붙는 바람에.
그래도 이건 방랑족 같은 거하고는 다르거든. 난 어디 가든 터 일군 무리에 제대로 속해서 몫을 한다고.”
“응. 어떤 건지 알겠어.”
호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떠돌아다니기 좋아하는 몫꾼이 가끔 있었다. 호란의 아빠도 그런 체질이었다고 들었다.
보통 하늘인들은 무리를 옮겨다니는 몫꾼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건 몫이 고만고만할 때 이야기다.
서형 같은 몫꾼이라면 어디를 가나 진심으로 환영받을 것이다.
해영이 물었다.
“어디로 가게?”
“어디든! 안 살아본 데면 아무 데나 좋지.”
“너무 계획이 없는 거 아니야? 하유관엔 안 남더라도 이제는 어디 한 군데 신중하게 골라서 자리 잡을 생각을 해야지. 정착한 무리가 없으면 더 나이 든 다음에 힘들어지잖아.”
해영이 말하는데 몫꾼 한 사람이 농담조로 끼어들었다.
“대장은 여기저기 애들을 낳아 놔서 괜찮아. 젊은 애인도 잔뜩 있고. 늙어도 그중에 누구 하나가 책임져줄 거야.”
“무슨 소리야? 나이 들어서 힘 못 쓰면 후딱 뒈져야지. 뭘 자식새끼 신세까지 져 가며 구질구질하게 살아?”
서형은 가슴을 쭉 펴며 호탕하게 말했다.
그 자신만만한 모습을 바라보던 호란이 문득 물었다.
“서형이 여기저기를 많이 돌아다녔으면, 남방에도 온 적 있어?”
“한두 번? 왜?”
“그게. 이상하게 서형이 낯이 익어서.”
호란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번에 처음 본 줄 알았는데. 지낼수록 자꾸 서형을 전에 본 것 같은 생각이 든단 말이야. 혹시 내가 어릴 때 봤나 싶어서.”
“음. 예전에 치풍관에서 석 달쯤 살았던 적 있다. 치풍관 속읍에도 들렀던 적 있고.”
“그럼 아니겠다. 난 남운관에서 시문 님 만나기 전까지는 남방 끝터에만 살았거든.”
“끝터면 확실히 아니야. 그쪽에는 가본 적 없어. 남운관도 간 적 없고.”
몫꾼들이 수다 떠는 사이 일꾼들이 상차림을 마쳤다.
다들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먹는 동안에도 몫꾼들은 왁자지껄 떠드는 걸 그치지 않았다.
통금이 해제되었는지 바깥 거리로부터도 슬슬 사람의 소음이 늘기 시작했다.
호란은 된장국을 몇 술 뜨다 말고 보름을 하루 남긴 달을 올려다보았다.
이 밝은 달 아래서, 유수읍성 어딘가에서는 초상 치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시현은 분명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결정을 했다.
금강과 모새가 저들이 맘먹은 때에 태세를 갖춰 공격해오게 두었다면 훨씬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읍성의 몫꾼들이 몫을 하는 과정에서 희생을 감수하는 것도 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역시 마음이 무거웠다.
호란은 도로 국그릇에 숟갈을 담갔다.
그리고 명절 분위기를 신경 쓰기 위해 공격까지 7일을 기다리려 한 금강에 대해 얼핏 다시 생각했다.
그의 어딘가에 흉내 아닌 마음씀이 있었을지, 그것을 상냥함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를 생각했다.
17. 이름 끝 자
한가위 당일, 새벽부터 숙소 대문 앞이 시끄러웠다.
유수읍성의 치읍감과 관리들이 명절음식과 하례품을 산 같이 보내오는데 몫꾼을 백 명도 더 먹이고 남을 양이었다.
시현이 남은 보고를 받을 겸 관아의 조례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앞마당은 물론 중문 안까지 색색 보에 싸인 짐꾸러미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모양을 보고 시현이 이마를 짚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쉬게 하려고 머문 것인데, 너희 일만 늘어서 어찌하느냐.”
“하하하.”
단은 웃기만 했다. 손은 쉴 틈 없이 목록을 적고 꾸러미에 숫자 표시를 하고 있었다.
호란이 느끼기에 단은 첫 번째 하례품이 대문을 넘었을 때부터 빡이 치기 시작했다.
유수읍성에서 행세하는 분들이 보낸 종자들과 몫꾼들을 상대하느라 온강서 받은 새 옷을 차려입어야 했던 것도 불쾌감의 한 원인 같았다.
시현이 손을 저었다.
“기록에 많이 신경 쓰지 말거라. 보낸 이의 성명과 직위만 적고 세세한 내용은 하나도 남길 필요가 없다.
너희가 먹거나 쓰고픈 것이 있으면 그것만 놓아두고, 전부 피난민촌에 나눠주도록 하자. 음식 나눠주는 것은 해영이 대열을 이끌고 가서 하도록 해라.
호란과 서형, 그리고 두 명 더는 색조 없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라. 네 사람은 나와 함께 전사자 장례에 갈 것이다.”
단이 적는 손을 멈추지 않으며 물었다.
“장례 위문품을 따로 꾸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이것들은 하례품이니 유가족에게 보내는 것은 맞지 않다. 그쪽은 치읍감에게 안배하라 할 것이다.”
“술과 귀품, 금품은 어찌합니까?”
“명절 치레에 금품이 왜 있느냐….”
시현이 또 한 번 이마를 짚었다. 그가 약간 화난 기색으로 말했다.
“돈과 환금 되는 물건은 모두 모아 봉해두어라. 그것은 전사자 유가족의 위문금으로 할 것이다. 술은… 옆집이나 어디 잔치하는 데라도 나눠주어라.”
“금액이 조금 과해 보이는 것이 있는데 따로 살펴보시겠습니까? 영 처치곤란하거나, 경우 안 맞는 물건은 차라리 되돌려보내는 게 속 편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다. 나올 만해서 나온 물건을 넉넉한 사람들의 곳간에 돌려보낼 필요가 있겠느냐. 차라리 길에 버려 누가 주워가게 하는 쪽이 더 세상에 도움 될 것이다.”
시현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흠. 이건 또 들어본 적 없는 발상인데. 뭘 받아도 탈 날 염려가 없는 사람은 저런 식으로도 생각이 도는구나.
단은 써놓은 목록을 훑으며 생각했다.
하긴 단에게나 과한 금액이지 시현이 보기엔 물 한 방울 비슷할지도 모른다.
거기다 대부분의 음식이나 선물은, 시현과 휘하의 몫꾼들이 읍성을 지켜준 데 대한 사례의 의미를 크게 넘지 않았다.
다만 그걸 너도 나도 하니까 일 처리 하는 입장에서 골치일 뿐이었다.
과하게 한 놈들은, 흔히 있는 허세병이겠지. 눈치를 너무 봤거나.
시현은 곧 상례에 맞게 옷을 갈아입으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음식 보따리 주위를 맴돌고 있던 몫꾼들이 한꺼번에 단의 주위로 몰려왔다.
“우리 먹을 거 고른다? 아무거나 골라도 되지?”
“저거 갈비찜 큰 거 우리가 먹어도 돼? 진짜로?”
“술 좀 우리 걸로 남겨놔도 돼?”
“송편 지금 먹어도 돼?”
“잠깐만요. 드셔도 되고 가져가셔도 되는데 목록에 적고 가져가십쇼.”
단이 목록장을 넘기며 말했다. 서형이 물었다.
“시문 님이 이런 거 안 써놔도 된다고 하셨잖아?”
“그래도 적을 건 적어놔야 저희가 일 끝난 걸 압니다. 부탁드립니다.”
몫꾼들은 잠깐 궁시렁거렸지만 곧 찍어놓은 석작이니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단 앞에 줄을 섰다.
윤이 숫자 달린 것을 찾아서 불러주고 단이 목록에 하나하나 표시를 했다.
차은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봐. 사실은 반민들이 제일 실세라니까.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다 얘들 허락 받아야 되고.”
단은 얼른 웃음을 지으며 넉살을 부렸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요. 저희는 그저 뒤치다꺼리나 하는 거지요. 예, 그것 가져가셔도 됩니다. 한번 내 가신 건 구휼품이랑 도로 섞이지 않게 해주세요.”
호란이 시현과 함께 장례에 다녀오고, 피난민들에게 2차로 음식 나눠주는 데에 따라갔다 온 뒤에도 단과 일꾼들은 계속 부산했다.
점심때가 지나면서 선물 들어오는 건 끊어졌지만 품목별로 일일이 처리하고 정리할 것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몫꾼들이 음식 먹고 어지른 것도 정리는 일꾼들 몫이었다.
저녁에는 또 저녁상이 나가야 하고, 내일 새벽 출발이니 떠날 채비도 해야 한다.
이대로는 일꾼들이 쉴 시간이 하나도 안 날 거 같았다.
호란은 슬슬 뒤꼍을 오가며 잔손을 거들기 시작했다.
어제는 못 돕게 했었던 일꾼들도 오늘은 정말 바쁜지 호란이 일하는 걸 내버려두었다.
중간에 적색대 사람들이 말리거나 붙들면서 큰몫꾼이 왜 그런 일을 하냐고 했지만 그냥 다 무시했다.
호란이 대단하게 도운 것은 없었겠지만 오후 느지막해선 일꾼들도 한숨 돌릴 짬이 났다.
호란은 윤이 송편을 담아준 함지를 들고 단을 찾아나섰다.
단은 몫꾼들이 잘 안 오는 중문 안에 있었다.
시현이 머무는 정당과도 거리를 두고, 담벼락 그늘에 주저앉아 목록을 검토하고 있었다.
복장이 평소 입던 두루마기로 되돌아와 있었다.
호란이 곁에 가서 물었다.
“아직도 할일 많아?”
“와씨 깜짝이야! 소리 없이 다가오지 마!”
단은 불씨라도 밟은 것처럼 펄쩍 뛰었다.
놀란 김이라선지 오랜만에 단이 평소처럼 말해줘서 호란은 괜히 기뻤다.
호란은 단의 옆에 같이 앉으며 떡 함지와 물병을 내밀었다.
“좀 쉬어. 다른 일꾼들도 지금은 쉬고 있어. 여기 쌀떡.”
“이쪽도 대충 끝났어. 마지막으로 확인 한 번 한 거야.”
단은 깨와 설탕이 든 송편을 하나 집어먹고 잠시 행복한 얼굴이 되었지만 곧바로 인상을 썼다.
“사람이 진짜 얄팍해. 왜 이런 걸로 노동을 보상받은 기분이 되는 걸까? 나 먹으라고 들어온 것도 아닌데.”
호란이 놀라서 물었다.
“왜? 다 같이 먹으라고 보낸 건데, 당연히 단도 먹어야지.”
“네 그 사고방식도. 부러운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
단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더니 잠시 떡 집어먹는 데 집중했다.
조금 있다가 호란이 말을 꺼냈다.
“있지, 난 자꾸 서형을 어디서 본 거 같은 생각이 든다? 이상하게 낯이 익단 말야.”
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호란은 상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전에 만난 적 없는 건 확실한 거 같아. 근데 보면 볼수록 어쩐지 신경 쓰이는 게 있어. 대체 왤까? 조금만 더 생각하면 뭐가 생각날 것도 같은데….”
호란은 가벼운 화제 삼아 말한 거였다. 그런데 단의 미간에 주름이 섰다.
“생각이 날 것 같냐? 그냥 생각 안 나면 안 될까?”
“응?”
단이 거의 짜증에 가깝게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생각 안 나면 안 나는 대로 그냥 있자. 괜한 거 들쑤시지 말고. 나는 진짜로, 사이에 끼기 싫거든….”
호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진짜 우리 아는 사람이었어? 전에 만난 거야? 언제? 어디서?”
“모르는 사람 맞아. 그러니까 앞으로도 모르는 사람으로 있자는 거고. 네가 서형한테 괜히 이상한 소리만 안 하면 돼.”
단은 말하고서 호란을 외면했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호란은 들어 넘길 수가 없었다. 그가 정색이 되어 물었다.
“단. 단이 적색대 사람들 피해다니는 거, 하늘인이 불편해서가 아닌 거야? 단이 서형하고 뭐가 있어서였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