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 * *
“단. 단이 적색대 사람들 피해다니는 거, 하늘인이 불편해서가 아닌 거야? 단이 서형하고 뭐가 있어서였어?”
“별거는 없어. 네가 신경 쓸 일 아냐.”
단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호란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있잖아, 저 사람들도 단이 자기들 피하는 거 알아. 그리고 좀… 기분 나빠하는 사람도 있어.”
하유관에서 단은 한번 총치부 전체에 소문거리가 됐었다. 소문은 당연히 총령부 쪽으로도 새었다.
적색대 몫꾼들은 하나같이 소문 이야길 좋아해서 처음부터 단한테 편견을 갖고 있었다.
단이 피하는 걸 알고는 윗전 총애를 믿고 젠체한다고 생각하는 몫꾼들이 여럿 있었다.
세상에 자길 꺼리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적색대 사람들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호란은 그게 많이 걱정스러웠다.
상황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앞으로 호란은 선봉에 설 일이 많을 것이다.
전투 중에 후열에서 단과 다른 일꾼들을 보호하는 역할은 적색대 사람들이 맡을 확률이 높았다.
서로 간에 불편한 감정이 있으면 안 좋았다.
자칫 단을 사이에 두고 몫꾼들과 일꾼들 사이에 층이 지면 그건 더 안 좋았다.
호란이 말했다.
“단,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무리 동료한테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묻어두기만 하는 건 안 좋아.”
단이 한숨을 쉬었다.
“그거는 너네들 방식이지. 우리는 무조건 묻어야 돼. 서형은 나한테 동료가 아니라 윗대가리 비슷한 거고. 뭐 있으면 나만 불편해지는데.”
“어차피 지금도 불편하잖아. 아니면 내가 서형한테 뭔가 말해줄까?”
단이 바로 얼굴을 굳혔다.
“아니아니, 이건 네가 낄 거 아니야. 진짜 네가 낄 일 아니야.”
“뭔데 그래, 정말로….”
단은 전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호란은 할 말을 정리하고서 신중한 투로 말했다.
“단. 몫꾼들이 속을 묻어두지 말라고 하는 건…. 우리라고, 문제를 끄집어낼 때 불편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우리도 싸움 나는 거 되게 무서워해. 웬만한 건 다 참으라고 그러고.
근데 참으면 지나가는 일이 있고 결국에는 한번 짚어야 되는 일이 있잖아. 만약에 짚어야 하는 거면, 그건 미루지 말고 빨리 말해야 돼. 왜냐하면.”
호란은 그 뒤에 올 말을 굳이 하고 싶지 않아서 단을 쳐다보았다.
단은 계속 호란을 외면한 채였다.
호란은 할 수 없이 이어서 말했다.
“몫꾼들은, 우리는 전부 군인이잖아. 바로 내일 못 돌아오게 될 수도 있어. 그래도 상관 없는 일이면 단 말대로 묻는 게 맞아. 근데 상관 있는 일이면 당장이라도 말해야 해. 어느 쪽인지는 단만 알겠지만….”
“아 씨.”
단이 성질을 내며 두 손에 머리를 묻어서 호란은 깜짝 놀랐다.
단이 수그린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시발.”
호란은 어쩔 줄 모르고 단이 고민하는 걸 바라보기만 했다.
단이 가진 건 호란의 생각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 모양이었다.
단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들고 물었다.
“지금 서형 숙소에 있어?”
“아니. 놀러 나갔을걸. 늦게 나갔으니까 저녁 먹을 때나 돌아올 거야.”
“…시발. 술 먹고 오지 말아야 되는데.”
단이 투덜거리더니 호란을 보았다.
“네 말이 맞는 거 같아. 이래도 저래도 불편할 거 말하고 속이라도 시원해지는 게 낫겠다. 오늘같이 쉬는 날 말해버려야지.”
“응.”
호란은 반쯤은 안심하고 반쯤은 더 걱정하며 대답했다.
그 표정을 보고서 단이 웃었다.
“너한테는 본인한테 말하고 난 다음에 말해줄게. 좋은 얘기는 아닌데 네가 그렇게 걱정할 일도 아니야. 남 듣기 구질구질해서 그렇지.”
“으응.”
“난 방에서 좀 쉴게. 한 시진도 안 있어서 또 저녁상 내야 돼. 어휴 징그러워.”
단이 마지막 송편을 입에 물고 일어서서 옷을 털었다.
호란은 미안한 기분이 되어서 말했다.
“한가위인데 어째 단이랑 일꾼들은 더 힘든 거 같아.”
“그래도 명절 같은 땐 할일 없어서 멍하니 있는 거보단 정신 없고 바쁜 게 나아. 갈게. 혹시 서형 일찍 들어오면 말 좀 해주라.”
“응!”
호란은 남은 오후 동안 마당에서 몫꾼들과 수다를 떨거나 편을 갈라 사방제기를 차면서 지냈다.
가끔 대문 밖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서형은 올 모습이 없었다.
서형이 돌아온 건 저물녘이 가까워 일꾼들이 저녁상을 차리기 시작한 다음이었다.
여럿이 우르르 어울려 돌아온 서형은 그대로 무리와 상 앞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계속했다.
호란이 단을 쳐다보자 마당에 등불을 켜고 있던 단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 없는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서형은 저녁식사가 끝난 다음에도 상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형만이 아니라 적색대 전부가 상을 둘러싸고 떠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나중에는 한 사람씩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단은 오며가며 몫꾼들이 흩어지길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서형 앞에 술잔이 가는 걸 보고 안 되겠다 싶어진 모양이었다.
그가 몫꾼들이 둘러앉은 자리를 빙 돌아 서형에게 다가갔다.
단이 허리를 숙이고 낮게 말했다.
“저, 머리 어른. 잠시만 한쪽에서 말씀 나눠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서형은 좀 놀란 얼굴이 되었다.
“웬일이야? 나만 봐도 세 장 밖으로 피해갈 땐 언제고. 혹시 이게 그거야? 밀어서 안 되면 당기는 거야?”
서형은 말하고 크게 웃었다. 주위의 몫꾼들도 몇몇 웃었다.
단은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가만히 기다렸다. 서형이 쾌활하게 물었다.
“무슨 얘긴데?”
“저, 여기서는 조금….”
단이 난처한 기색을 보이자 서형은 오히려 재미있어했다.
“뭐야? 너랑 나랑 둘이서만 할 얘기가 뭐가 있는데. 진짜 나한테 반했냐? 고백이라도 하게?”
결국 단은 미세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초조한 속을 미처 못 숨기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단은 정중하게 다시 말했다.
“사적으로 드려야 할 말씀이라 그렇습니다. 잠시만 부탁드립니다.”
서형이 단을 빤하게 보았다.
“그래? 시문 님 심부름도 아니고, 은밀한 고백도 아닌데….”
그가 턱을 치키며 슬쩍 웃었다.
“그런데 사적으로 나를 오라가라 할 수 있는 거야? 네가?”
단이 멈칫했다. 호란은 더 놀랐다.
호란은 서형의 이런 음성을 처음 들었다.
눈치 채고 나니 적색대 모두가 똑같은 표정으로 단을 보고 있었다.
호란은 그제서 깨달았다.
대열 몫꾼들은 툭하면 서형을 놀리고 웃음거리로 만들었지만 그건 무리로 인정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다.
이 사람들은 저들 기준에 자격 없는 사람이 자기들의 대장을 쉽게 대하는 걸 내버려둘 무리가 결코 아니었다.
일순도 안 지나 서형이 분위기를 뒤집었다. 그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농을 던졌다.
“고백할 거면 빨리 말해. 고백이면 내가 봐준다. 책임은 못 져 줘도.”
몫꾼들이 한꺼번에 웃었다. 단이 머리를 숙였다.
“제가 실수를… 실례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할 말 뭔데?”
서형이 웃으면서 물었다.
호란은 뭔가 한 마디라도 끼어들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서형은 웃고 있었지만 선택의 여지를 주는 말투가 아니었다.
적색대의 분위기도 바닥에서는 변하지 않았다.
이들은 단이 땅인 상전의 위세를 업고 자기들을 우습게 본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호란이 잘못 옹호하면 오해를 더 굳히고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었다.
단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포기한 듯이 입을 열었다.
“어른께선 예전에 호대마을에서 사신 적 있지 않으십니까?”
“어? 맞아! 너도 거기 살았었냐?”
서형이 눈을 반짝였다.
그는 언제 목소리를 깔고 단에게 으르댔었냐는 듯이 얼굴에 화색을 피웠다.
“야, 진작에 말하지! 기억은 안 나지만 반갑다. 이리 앉아! 앉아서 같이 얘기해.”
그가 제 옆에 자리를 비우며 단을 끌어당길 듯 손을 뻗었다.
단은 반 발 물러나 잡히는 걸 피했다.
“아뇨. 저는 거기 사람이 아닙니다. 전에 서형 어른을 뵌 적도 없고요. 혹시 해서 여쭤본 겁니다.”
“뭐란 거야, 그럼 날 어떻게 알구?”
단이 얕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진심으로 내키지 않아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조금. 길형이를 아는 사람인데요.”
“길형이? 네가 길형이를 알아?”
서형은 더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그는 다시 앉으라 손짓하려 했지만 단이 더 빨리 말했다.
“길형이 아버지… 최민은 죽었습니다.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뭐?”
서형의 눈이 커졌다. 단이 딱딱하게 말했다.
“6년… 거의 7년 전쯤에 죽었답니다. 그건 알고 계셔야 할 거 같아서요. 그것뿐입니다. 이만 실례할게요.”
“야, 이놈아! 어딜 가!”
서형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상을 엎을 듯한 서슬로 뛰쳐나와 단의 팔을 붙들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민형이가 죽어? 민형이가 왜 죽어?”
“저도 최민을 직접 아는 건 아닙니다. 길형이한테 그렇게만 들었어요. 병으로 죽었다고.”
“아니 왜, 아니…. 그 건강하던 사람이….”
서형의 큰 몸이 떨리고 눈에 눈물이 괴었다. 그가 울먹이며 말했다.
“얘기 좀 해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저도 들은 것뿐이라 더 아는 게 없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서형은 단을 거의 억지로 끌어서 자리에 앉혔다.
서형의 옆에 앉은 우대가 물었다.
“대장, 무슨 일이야? 최민인지 민형인지가 누구야?”
“내가 예전에 데리고 살던 반민 남자야. 착한 사람이었지. 사이에 애도 하나 있었어.”
“아아, 저런….”
호란도 이쯤해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형이 최길의 어머니였다.
다시 보니 왜 몰라봤지 싶을 정도로 꼭 닮았다.
얼굴형도, 입매도, 산더미 같은 체격도.
어깨를 떡 젖히고 서는 태에 웃는 소리까지 똑같았다.
서형은 단을 붙들고 이것저것 물었지만 단은 그리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남자는 헤어진 뒤 일 년을 못 채우고 죽었고 아들은 상단 호위로 떠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서형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불쌍한 사람. 같이 살 때도 내가 늘상 속만 썩였는데. 더 잘해줬어야 했는데. 사람이 그렇게 착했는데….”
주위가 그를 위로했다. 우대가 서형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단은 착잡한 얼굴을 하고 옆에 앉아 있었다.
몫꾼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대장, 반민하고 살았던 거야? 전혀 몰랐네.”
“왜 하유관에 안 데려왔어? 반민하고 애를 낳았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그게 되겠어? 애 배고 낳고 키 다 클 때까지만 쳐도 거진 이십 년을 같이 살아야 되는데.”
“그래도. 애도 반쪽짜리라 살기 힘들 텐데. 불쌍하게스리….”
수군대는 말을 들은 서형이 눈을 부릅떴다.
“길형이는 반쪽짜리 아니다! 걔는 마지막 봤을 때 이미 두 몫짜리는 됐어. 나를 닮아가지고.”
“하긴, 대장 자식이면….”
몫꾼들이 수긍했다. 서형이 덧붙였다.
“같이 산 건 칠팔 년 정도지만, 애가 몫 할 때까지는 오며가며 계속 들여다봤어. 돈이랑 곡식 가마니도 가져다주고. 애 싸움도 가르치고.”
서형이 그 말을 하자 비난하는 말이 훅 수그러들었다.
“몫 할 때까지 먹거리 대줬으면, 그래도 할 건 다 했네.”
“팔 년이면 오래 살았다. 대장 아니라도 오래 산 거지 그건.”
“남자가 죽은 건 안됐지만 그거야 자기 팔자고.”
분위기가 바뀌는 중에 해영이 불쑥 말했다.
“근데 그 반민, 혹시 대장이랑 헤어져서 상심해서 병 난 거 아니야?”
서형이 움찔했다. 강호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에이, 설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