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23
123화
* * *
다른 몫꾼이 말했다.
“아냐. 반민들이 좀 그래. 한번 맘 준 사람을 잘 못 잊더라고.”
“그래도, 어떻게 한 사람을 평생 좋아해? 그것도 반민하고면, 평생은 못 살지….”
“근데 애는 참 불쌍하게 됐다. 무리도 없고, 반민 마을에 혼자 뚝 떨어져서.”
호란은 불편해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자꾸 단만 건너다보았다.
호란은 길이 자기를 싫어하는 걸 알고 있었다.
호란도 길을 좋아하진 않았다. 단의 친구니까 좋게좋게 지내기는 했지만 대하기 불편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대의 어려운 가족사를 갑자기 알게 된 것도 난처했고, 길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안줏거리 만난 듯 한마디씩 하는 걸 듣고 있기도 불편했다.
자기가 이렇게 불편한데 단은 기분이 어떨지 상상이 안 갔다.
건너편에 앉은 단은 평소 남 대할 때 하는 웃음조차 짓지 않았다.
그는 틈을 타서 빈 그릇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자리를 뜨려 했다.
“자꾸 어딜 가려고 그래. 그런 건 남들 시키고 앉아 있어. 길형이 얘기 좀 더 하자.”
서형이 또 단의 팔을 휙 끌어당겼다. 호란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호란에게 모였다.
“보내줘. 더 할 얘기 없다잖아.”
호란이 말하자 서형은 곧바로 손을 놓았다.
그가 미안한 듯이 호란에게 사과했다.
“어, 미안. 역시, 둘이 좋은 사이였냐? 모르고 그랬지.”
이런 오해를 받는 건 두 번째였다. 저번에 단은 화를 냈었다. 지금은 호란도 화가 났다.
단은 그릇들을 정리해서 말없이 뒤꼍 쪽으로 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며 해영이 중얼거렸다.
“아, 그놈 참. 키 크고 반반하다고 저래 재나? 호란 너도 고생 좀 하겠다.”
“단하고 나는 그런 거 아니야.”
호란은 힘주어서 말했지만 몫꾼들은 진지하게 듣는 것 같지 않았다.
“뭘, 그동안 보니까 기회만 나면 둘이서 소곤거리면서 서로 좋아 죽던데. 뺄 거 없어. 흉도 아니고.”
말한 것은 서형이었다. 그는 아직 눈물 기가 남은 눈을 하고서도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애만 안 생기면 반민이 연애하기는 좋아. 네네 하고 살가운 맛이 있어가지고. 바람피운다고 삐지는 것만 좀 달래주면 돼.”
호란은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화가 치밀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놓고 성을 낼 수도 없었다.
서형은 대열의 머리였고 이미 술이 들어가 있었다.
자기가 무리에서 헛싸움을 일으키면 앞으로의 여행에도 시현에게도 불편이 생겼다.
호란은 일어선 김에 그냥 자리를 빠져나와버렸다.
무리는 다시 길과 그 부친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호란은 터덜터덜 부엌 뒤꼍으로 갔다. 단과 일꾼들이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호란은 구석에서 얼쩡거리며 단이 일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윤과 철은 호란을 보더니 남은 음식을 챙겨서 저들끼리 자리를 피해 주었다.
하지만 단은 호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밥 먹을 생각도 안 나는지 그냥 뒷마당의 작은 평상에 걸터앉아버렸다.
호란은 눈치를 보며 다가가 곁에 앉았다.
“저, 서형이 최길 어머니였구나. 내가 왜 몰랐지, 진짜 닮았네….”
“하, 더러워서 진짜.”
단은 혼자 중얼거리더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상단 시절에 개같은 하늘인 새끼들 때문에 못 당할 꼴을 너무 많이 당해서. 세상에 하늘인이란 하늘인은 다 뒤졌으면 좋겠다고 매일같이 소원을 빌고 다녔거든.”
“어….”
호란이 어깨를 처뜨렸다. 자기는 빼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지금 그 말을 하면 혼날 것 같았다.
“그런데 너랑 지내면서 마음이 좀 풀리더라고. 상단 바닥이라서 뭐 같은 새끼들을 유독 많이 만난 거지, 하늘인이 전부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아, 그랬어?”
호란은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헤헤 멋쩍게 웃었다.
단이 뒤이어 말했다.
“근데 다시 보니까 역시 전부 그런 게 맞아! 전부 다 개새끼들이야! 모조리 숨 쉬지 말고 뒤졌으면!”
“다안….”
호란이 투정하듯이 목소리를 끌자 단이 질색하는 얼굴로 보았다.
“뭐? 너도 똑같아! 사람을 맘대로 팽개쳤다 주웠다 무슨 때운 남비 취급하고!”
“내, 내가 언제?”
“거 봐. 너한테는 그게 아무 일도 아니었지? 그러면서 지는 뭐 나은 줄 안다는 게 더 악질이라고.”
“악질….”
호란은 충격을 받아 입을 뻐끔거렸다. 단은 고개를 돌리고 더 말하지 않았다.
호란은 좀 있다가 겨우 말했다.
“나는, 나는 저렇지는 않잖아?”
단은 대답을 안 했고 호란은 자신이 없어졌다.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그가 항의했다.
“정말로 내가 똑같으면, 단은 왜 나하고 친구한 거야?”
“하하하. 난 친구 사귈 때 인성을 안 보거든.”
호란은 딸꾹질을 했다. 설득력이 엄청났다.
호란이 아는 단의 친구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은 세상에 전무후무한 헛싸움꾼이고, 한 사람은 1위 망종이고… 한 사람은 호란 저였다….
울상이 된 호란은 열심히 물었다.
“내가… 내 인성이 그 정도야? 내가 최길 정도야?”
“무슨 의민데 그거? 길이가 들으면 엄청 좋아하겠네.”
진짜로 좋아할 것이다. 누구 한 사람 머리 터질 때까지 싸울 수 있으니까.
정말로 최길이 여기 없기가 천만다행이었다.
어머니 일도 일이고, 적색대 사람들은 잊을 만하면 반민을 무시하는 말을 흘렸다.
약바위골 어른들처럼 대놓고 욕하거나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아래로 보는 것은 숨기지 않았다.
오늘만 해도 저 사람들이 단을 대하는 거나 길을 두고 말하는 걸 최길이 봤으면 이미 사방에 피칠갑을 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고서 호란은 깨달았다.
길이라면 절대 안 참았을 일들을, 호란은 화가 났으면서 왜 가만히 있었을까.
몫꾼은 헛싸움을 안 하니까? 그게 무리를 위한 거라서?
하지만 단도 같은 무리였다.
호란이 참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하나하나 합당한 이유들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 중 한 가지도 단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무심결에 사과가 나왔다.
“단, 미안해.”
“왜 네가 미안해?”
단은 화를 버럭 내더니 일꾼들이 간 쪽으로 가버렸다.
호란은 어깨를 떨어뜨렸다.
* * *
단은 사람을 피해 주채로 갔다.
시현이 있는 침소 쪽을 피해 건물 반대측의 대청에 털썩 주저앉았다.
중문 밖에서 몫꾼들이 시끌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처음부터 확실하다 생각은 했지만 역시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었다.
언젠가 길을 다시 만날 때 어떻게 얼굴을 봐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길은, 아니란 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가끔 어머니가 영영 떠나버린 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곤 했다.
또 가끔은, 어머니는 틀림없이 난봉질이나 하면서 떠돌아다니다가 비참하게 죽었을 거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근데 어떻게 말하냐고 길이한테.
역시 사정 그런 건 개뿔도 없었고, 관성도시 별동대 대장 돼서 혼자 잘 먹고 잘 살고 있더라고.
얘기 듣고는 너네 아버지 불쌍하다고 울면서 꼴값을 하더라고.
그러면서 인간은 그대로라서, 그 나이 처먹고 나한테 집적대더라고, 길이한테 어떻게 말하냐고 진짜로.
인생에서 문 닫고 탈출하고 싶었다.
살아봐야 개떡같은 일밖에 안 생기는데, 저나 길이나 뭐하러 이렇게 아둥바둥하는지.
너무 애쓰지 말라고 사예가 간혹 하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단은 그 말에 귀 기울인 적이 없었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았다.
역시 류사예랑 길이 따라서 광산촌이나 갈걸.
괜히 되도 않을 생각 했다가 그지같은 꼴은 혼자 다 보고.
단은 녹초가 되어서 대청에 드러누웠다. 하여간에 자기는 지 팔자 꼬는 것 말고는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 * *
호란은 그날 이후 단과 적색대의 사이가 더 불편해질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유수읍성을 나온 후로도, 서형과 다른 몫꾼들은 단의 길 안내에 이전과 똑같이 따랐다.
앞에서 표정을 바꾸지도 뒤에서 무슨 말을 하지도 않았다.
함께 여행하는 데 불편이 없을 만큼만 적당하게 거리를 두어 주었다.
단이 서형을 꺼리던 데에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걸 알고 오해가 풀린 것 같은 분위기마저 있었다.
속으로야 단이 마음에 안 들지 모르지만 다들 몫 하는 데 아무 유감을 섞지 않았다.
자기들은 집단인데도 여럿이서 한 사람을 배척하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분명 적색대 사람들은 좋은 몫꾼들이었다.
한두 사람만이 아니라 무리 전체가 몫꾼의 미덕과 긍지를 빠짐없이 갖추고 있었다. 그건 정말로 굉장한 일이었다.
하지만 호란은 한가윗날 밤의 일을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안 좋았다.
좋은 몫꾼이 되는 것만도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세상엔 좋은 몫꾼 노릇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일이 또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생각조차 못 해본 일이었다.
걱정할 일은 호란의 마음속이나 무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수읍성을 나온 이후 거석과의 조우가 더 숱해졌다.
게다가 번번이 무리를 짓고 있었다.
처치하는 거야 문제가 아니었다. 수가 적을 때는 몫꾼들이, 많을 때는 시현이 쓸어버렸다.
하지만 숫자와 조우 빈도가 심상치 않았다.
셋째 날 오후, 결국 시현이 행렬을 멈추고 단에게 지도를 가져오게 했다.
높고 좁은 탁자를 가운데에 세워 두고 몇 사람이 모였다.
직전에 황야 한가운데에서 열여섯 개나 되는 거석 무리를 마주쳐 깨어버린 후였다.
“심하지 않으냐. 내가 남방에서도 이런 보고는 거의 받은 일이 없다.”
시현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단이 지도를 탁자 위에 펼치며 말했다.
“같은 중부라도, 앞에 있는 천천곡을 포함해서 유수읍성 위쪽으로는 아래쪽보다 거석이 더 많기는 합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이건 지나칩니다. 아무리 변고 후에 거석이 늘었다고 해도요.
무엇보다도 놈들이 다 무리를 지은 게…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해영이 지도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단은 지도 위에 거석을 만난 자리와 갯수를 모두 표기해두었다. 붉은 표시는 유수읍성을 나온 이후 비정상적으로 늘어 있었다.
해영이 말했다.
“보통 거석이 무리짓는 것은 마을이나 성에 쳐들어갈 때지요. 문제는 이것들이 마땅한 표적이 없는 데서도 그러고 다닌다는 것인데….”
“마땅한 표적이 없다기보다. 우리를 표적으로 한 것 같지 않았느냐?”
시현이 말하자 무리의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서형이 말했다.
“변고 후에 알게 된 것인데 거석은 마력석 지니신 땅님을 알아보고 노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마력석을 잔뜩 갖고 있으니 놈들이 덤벼오는 건 이상하지 않은데, 그래도 미리 무리 짓고 있는 건 이상하네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단이 말했다. 호란이 걱정하며 말했다.
“혹시 모새나 금강이 뭔가 하고 있는 걸까요? 걔들이 일부러 우리한테 거석을 보내는 걸 수도….”
시현이 턱을 짚었다.
“가능성은 있다. 석영도,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부상을 입었을 때 비슷한 전략을 취한 일이 있었지.
다만 의도를 모르겠구나. 이전이었다면 그들이 우리 마력석을 소진시키려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아니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