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25
125화
* * *
“혹시 길형이 말이야? 너도 길형이 알아?”
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만난 적은 있어. 하유관 오기 전에, 상단하고 동행할 때 잠시 함께 다녔어.”
“아.”
상단이란 말에 서형의 얼굴이 약간 흐려졌다.
몫을 고지식하게 따지는 사람들은 상단 호위를 몫꾼으로 치지 않았다.
돈을 받고 싸우는 것도 돈과 계약에 따라 무리를 바꾸는 것도 전통적인 관점에선 몫꾼이 하는 일이 아니었다.
호란도 여행을 해봤으니 세상에 상단이 필요하고 상단에 호위가 필요한 걸 알게 되었지, 예전 같으면 상단을 옮겨다니며 일하는 하늘인 호위들을 제 무리 없는 사람이라 여겼을 것이다.
“뭐, 상단 호위꾼이라고 다 헛몫꾼이나 무뢰배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서형이 괜히 혼자 말했다. 호란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최길이 헛몫꾼은 절대 아닌데 독자적인 무뢰한이기는 했다.
서형이 물었다.
“보니까 어때, 걔 할 몫 하는 놈이지?”
“응. 보통 몫이 아니야.”
호란은 긍정하고서 조금 망설이다 덧붙였다.
“그런데 다른 하늘인들하고 잘 지내지는 못해.”
호란은 할 수 있는 최대한 순화해서 말했다.
하지만 서형은 바로 말뜻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가 복잡한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그러겠지, 아무래도 겉보기가 다르니까. 그래도 길형이가 지금쯤이면 보통 몫이 아닐 건데. 어디서 다른 몫꾼들한테 무시당하고 다니지는 않을걸?”
“응. 그건 아냐.”
호란은 바로 답했다. 최길이 무시당하고 다니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서형은 다 아는 것처럼 씨익 웃었다.
“내가 애한테 매번 그랬어. 반민 피 섞였다고 깔보는 놈들 있으면 두 번 말 섞지 말고 다 날려버리라고. 그놈도 타고난 성깔이 있어서 그거 하나는 잘했을 거야.”
아무렴 잘하고 있었다. 실은 누가 깔보기도 전에 선제적으로 싸움을 걸어서 다 날려버리고 있었다.
옆자리의 해영이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대장. 자식한테 헛싸움을 가르친 거야?”
“그게 왜 헛싸움이야? 제 몫 제가 지키는 거지! 겉모습이나 출신만 보고 사람 무시하는 놈들은 좀 혼쭐 나도 싸!”
서형이 당당하게 말했다.
듣고 있던 우대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절반은 반민인데 하늘인하고 싸움이 될까?”
호란은 최길이 지금 이 자리에 없는데도 이상하게 긴장했다.
우대가 방금 말을 하자마자 길에게 한 대 맞고 날아가는 모양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영이 말했다.
“절반이라도 대장의 절반이잖아. 그럼 너한테는 이기지.”
몫꾼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호란 혼자만 못 웃었다.
다들 웃지 좀 말지. 저 사람들 전부 남의 얘기인 줄 알고 있었다.
길이 여기 있었으면 첫날부터 다 줄줄이 날려갔을 사람들이.
물론 적색대도 다들 강했다. 강했지만 그전에 최길이 너무 난 싸움꾼이었다.
잠시지만 길하고 한편으로 싸우면서, 길의 주먹 한 방을 버틴 하늘인을 호란은 한 명도 못 보았다.
호란도 정타로 맞으면 버틸 자신이 없었다.
호란이 보기에 적색대 중에서 길하고 붙어서 끝까지 상대가 될 사람은 서형뿐이었다.
강호도 좀 되려나? 그래도 길이 이길 것 같았다.
길은 누가 눈금자로 딱딱 재어 주는 것처럼 정확하고 빠르게 사람을 쳤다.
힘에도 동작에도 마음씀에도 낭비가 없었다.
호란은 길이 싸우는 걸 보고서 돌 치는 것과 사람 치는 게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거석하고 싸우느라 일격을 길고 무겁게 뻗는 습관이 있던 걸 고쳤고 그 후에 실제로 사람 상대 싸움이 훨씬 늘었다.
사람 치는 일에 교본이 있다면 그게 바로 최길이었다.
그리고 그 교본을 세상에 내놓은 사람이 지금 호란의 눈앞에 있었다.
호란은 서형을 존경해야 하는 건지 아닌 건지 좀 헷갈렸다.
서형이 문득 떠올린 듯이 말했다.
“맞다. 걔 이제 길형이 아니겠지. 이름 바꿨을 거 아니야, 제 몫 하는 몫꾼이니까.”
호란은 멈칫했다.
어린 하늘인이 제 이름에 부모나 보호자의 이름 끝 자를 넣는 것은 슬하에서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였다.
몫을 갖고 보호자에게서 독립하면 자기가 직접 이름 끝 자를 새로 지었다.
호란도 어릴 때는 엄마의 이름 끝 자를 써서 호경이라고 불렸다.
몫을 인정받은 뒤 사부하고 같이 고민해서 이름을 호란으로 바꾸었다.
호란이 동생을 책임지게 되면서, 동생도 하경이에서 하란이가 되었다.
어릴 때 길형이라고 불렸을 최길은 이제 어머니의 이름 끝 자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의 이름 끝 자를 만들어 갖지도 않았다.
그는 대신 아버지의 성을 쓰고 있었다.
그건 그가 자신을 몫꾼으로도 하늘인으로도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일 터였다.
서형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호란에게 물었다.
“이름 끝 자, 뭐라고 붙였어? 나중에 만나면 제 이름으로 불러줘야지.”
호란은 곧바로는 말을 못 했다.
자기 대답을 서형이 안 좋아할 것은 너무나 명백했다.
하지만 숨길 일도 아니었다. 호란은 사실대로 말했다.
“안 붙였어.”
“뭐?”
“그냥 길이란 이름을 써.”
서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주변의 몫꾼들도 놀란 얼굴이었다.
“한 글자 이름을 쓴다고? 반민처럼?”
우대가 생각 없이 말했다가 금방 서형의 눈치를 보고 입을 꽉 다물었다.
서형이 으르렁대듯이 말했다.
“걔가 왜? 걔 같은 몫꾼이 왜?”
“난 그냥 본 대로 말하는 거야. 길은… 그냥 자기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 같았어.”
“그게 말이 돼? 반쪽짜리라도 이름은 다 두 자 쓰는데!”
“그건….”
호란은 꺼낸 말을 끝까지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판단이 아닌 사실만 전해지길 바라면서 서형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길은 성을 붙여서 최길이란 이름을 써. 길은 자기가 반민이라고 말하고 다녀.”
서형의 짙은 색 얼굴에 확 검붉은 기가 돌았다.
그가 자존심이 단단히 상한 듯이 소리쳤다.
“말도 안 돼. 걔가 몫꾼이 아닐 리가 없어. 내 자식 중에 큰몫꾼 아닌 애 하나도 없어!”
“길은… 길도 강해. 정말 강해.”
호란이 말했다.
“난 길이 싸우는 걸 봐서 알아. 길은 어깨치기 한 방에 금강이 세운 대장석을 그대로 젖혔어. 사람 상대로는 당연히, 누구한테도 안 지고.”
“그렇지? 역시.”
서형은 얼굴이 밝아지려고 했다. 하지만 호란의 다음 말에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몫꾼 소리는 듣기 싫어했어.”
서형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호란도 이제야 어렴풋이 깨닫게 된 거지만, 길이 몫꾼을 자칭하지 않는 건 힘의 크기나 몫의 크기 문제가 아니었다.
“…….”
서형은 목과 턱을 딱딱하게 굳혔다.
분노가 기세가 되어 등과 어깨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주위의 몫꾼들이 아무도 말을 못 걸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 안에 밥을 퍼 넣기 시작했다.
그릇이 다 비자 서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누구를 찾듯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여각 뒷문 쪽으로 갔다. 뒤꼍은 수레를 세워 둔 곳이었다.
호란은 바로 따라가서 서형을 막아섰다.
그가 서형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이 문제로 단을 난처하게 하지 마. 나하고 헛싸움 날 거야.”
서형이 호란과 눈을 마주쳤다.
그가 다물었던 입을 열고 숨을 뱉었다. 몸에서 솟구치던 분기가 수그러들었다.
“…알았어.”
서형은 군말 붙이지 않고 물러섰다.
그는 감정적이 되어 있었지만 호란과 충돌할 일 하지 않을 일은 구분하는 것 같았다.
자칫 또 사귀냐 어쩌냐 하는 소리를 들을까 봐 호란이 덧붙였다.
“단은 내 친구야.”
몸을 돌리려던 서형은 알쏭달쏭한 얼굴이 되었다.
“친구부터 시작하는 방식이야?”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앞으로도 안 그럴 거고. 단하고 나하고는 그냥 친구야.”
“몫꾼하고 반민하고 어떻게 친구가 돼?”
서형의 물음에 호란은 멈칫했다.
전 같았으면 단도 몫이 정말 큰 사람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째선지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호란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냥 친구야. 내가 단이랑 친하면 뭐 안 될 거 있어?”
“아니, 친하게 지내는 거야 뭐 그럴 수 있는데…. 그만큼 잘 빠진 애 흔치 않고.”
또 얘기가 이쪽으로 되돌아갔다. 호란은 짜증내는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단하고 나는 그런 거 아니라니까!”
“넌 진짜 걔한테 아무 흑심 없다고?”
“없어.”
서형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사귈 거 아니면, 반민한테 잘해줘서 뭐해?”
호란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얼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서형이 길의 아버지를 사랑했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는지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온강의 관리인 노파가 단과 호란의 사이를 쉽게 오해했는지, 그때 왜 단이 화를 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말을 들으면서도 자기한테 보이는 세상과 단이 보는 세상은 전혀 달랐다.
호란의 감정이 불편해진 걸 알고 서형이 말했다.
“그 얘긴 됐고. 내가 길형이 때문에 속상한 거지 호란 너나 그 길잡이 놈한테 화난 게 아냐. 알지?”
“응.”
“싫어하는 거 알았으니까, 앞으로는 너네 둘 다 불편하게 안 할 거야. 대열 딴 놈들도 허튼 소리 못 하게 할게. 길형이는, 이번 몫 끝나고 내가 찾아보면 되지.”
“응.”
서형이 얼굴을 풀며 가볍게 물었다.
“털었어?”
“응. 털었어.”
사실은 아직 마음이 불편했지만 호란은 그냥 대답했다.
호란이 서형이나 다른 하늘인들의 생각을 바꿀 순 없었다. 사실은 호란 자신도 뭐가 옳은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서형은 자기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을 보인 거였다.
비록 호란에 대한 존중일 뿐 단에 대한 존중은 아니었지만.
서형이 주먹을 들어 인사하길래 호란도 마주 주먹을 들어보였다.
서형은 뒤끝 없는 얼굴로 쓱 웃더니 여각 2층으로 올라갔다.
호란은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맞게 행동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부 닮은 돌 인간이 공격해올 것만도 큰일인데, 신경 쓸 게 너무 많았다.
세상을 알면 알수록 더 복잡하고 어려운 게 늘어나는 것 같았다.
18. 몫꾼
볕이 강했지만 더위는 조금 수그러졌다.
밤 사이 비가 온 덕에 바람이 습기를 싣고 있었다.
천천곡에 들어오고 사흘, 여정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한 번 무늬 없는 거석 떼를 마주쳤지만 어렵지 않게 물리쳤다. 오는 동안 들른 마을도 모두 무사했다.
다만 오늘 지나는 암석 지대는 협곡 사이로 외길이 뻗은 곳이라 더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단이 경고했다.
대열은 수레를 둘러싸고 호위 대형으로 걷고 있었다.
무늬 없는 거석이 나타난 이래, 시현은 항상 자신이 탄 수레를 일행의 선두에 두었다.
삼면의 벽과 천장을 걷어 주위가 보이게 해 두고 항시 마력석 대련을 멘 채로 지냈다.
이동 중에 습격이 있으면 바로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호란은 맨 앞 수레에 붙어 걸으며 수레 위의 소년을 살짝 곁눈질했다.
볕에 살짝 바랜 붉은 머리칼이 골짜기 바람에 흩날렸다.
시현은 무표정해 보였지만 이제 호란은 그 얼굴을 잘 알았다.
눈을 가늘게 뜬 것은 쨍한 햇볕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그는 다른 이들에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시현이 호란을 보았다.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호란, 느껴지느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