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30
130화
* * *
시현이 조금 움직였다. 그가 막힌 소리로 뭔가를 웅얼거렸다.
단은 옆에서 걷고 있는 준에게 말했다.
“천, 나리님 입에서 천 빼 드려요.”
준이 서둘러 피투성이 천조각을 제거했다.
시현이 가는 신음을 냈다.
그가 단의 어깨에서 머리를 못 쳐든 채 말했다.
“신이명이, 그쳤다….”
“다행입니다. 호란 호위가 모새를 해치웠을지도요.”
단은 말하면서 계속 걸었다.
입 안이 다 부어 둔탁해진 발음으로 시현이 더듬거렸다.
“돌아… 돌아가자.”
“안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호란이…. 서형은….”
“다들 나리님을 위해 싸우러 간 겁니다. 그러니까 피하셔야 합니다.”
시현의 양손이 단의 두루마기 앞섶을 잡아끌듯 거머쥐었다.
하지만 끌어당기는 손에는 힘이 거의 없었다.
단은 상관하지 않고 걸음만 내디뎠다.
시현이 목소리를 키우려고 애쓰며 말했다.
“돌아가야…. 단, 가자. 그래도 내가 할 일이 있을 거다….”
“나리님이 하실 일은 어서 안전한 곳에 가서 몸을 회복하시는 겁니다.”
“돌아가라면 가거라! 너는, 너라면 내가 죽어도 상관 안 하지 않느냐!”
시현이 이마를 쳐들며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다시 머리가 휘청 하고 단의 어깨에 떨어졌다.
단은 작게 실소를 흘렸다.
“애처럼 굴지 마세요. 남는 힘 있으시면 저나 잘 붙드세요. 몸에 맥을 다 놓으셔서 업기 힘들어 죽겠네.”
시현이 겪은 증상이 신이명이라면, 그것도 아주 강력한 신이명이라면 이명이 끊긴 지금 어지럼과 울렁증이 엄청날 거였다.
단은 가는 동안 시현이 자기 등에 토하지 않기만 빌었다.
앞길에 나무와 풀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돌밭과 구분이 안 가던 경사면에 점점 사람 발길 닿은 흔적이 확실해졌다.
간혹 외바퀴수레 자국도 보였다.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게 확실했다.
흔적을 따라가면 길이 나오고, 길을 따라가면 마을이 나올 터였다.
가파른 경사를 오르면서 단은 숨을 씨근거렸다.
아직 덜 컸다고는 해도 사람 하나를 업고 얼마를 걸었는지 모른다.
중간에 다른 일꾼들이 바꿔 업어주기도 했지만 다들 작고 마른 사람들이라 오래 못 가서 발걸음이 느려지고 비틀거렸다.
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시현이 괴로워했기 때문에 결국은 단이 혼자 업고 계속 같은 보폭으로 걸었다.
슬슬 입에서 단내가 났다. 온몸이 땀으로 질척거렸다.
발밑에 길 난 모습이 뚜렷해진 걸 보고 준이 희망에 차서 물었다.
“이대로 길을 따라가면 마을이 있을까요?”
“아마… 아마요.”
단이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그럼 제가 먼저 뛰어가서 사람 불러올게요!”
준은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경사를 뛰어 올라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단은 멍하니 생각했다.
아. 느리다. 호란이가 나더러 맨날 느리다 느리다 하는 게 저거구나.
꼭 준이 느린 탓만도 아닌 게 더 가 보니 마을까지 남은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길이 완전히 꼴을 갖추고 다른 샛길과 합쳐져 넓어졌을 무렵에야 반대편에 사람 모습이 보였다.
하늘인 몫꾼 하나가 훅 한걸음에 다가와 단의 등에서 시현을 데려갔다.
그제서 다리가 지진 난 것처럼 떨렸다.
단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윤과 철이 단을 양쪽에서 부축해서 마을로 데려가야 했다.
* * *
모새가 스러진 뒤 호란은 캄캄한 동굴 안에서 한참을 헤맸다.
바위벽의 금빛이 빠져나가자 주위는 완전히 새카매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손으로 더듬어 길을 찾아야 했다.
부서진 민짜 거석들이 사방에 쌓여 있어서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벽인지도 잘 알 수 없었다.
어둠 속을 더듬고 또 더듬다 누군가의 시신이 손끝에 걸렸을 때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황급히 얼굴과 몸을 더듬어 보니 하늘인 복색에 머리칼이 긴 여자였다. 아마 해영일 것이다.
시신이 시현이나 단이 아닌 데 호란은 마음 깊이 안심했고, 그 사실에 미어지는 죄책감을 느꼈다.
시신의 허리춤에는 부시쌈지가 있었다.
호란은 부시를 쳐서 잠깐씩의 불꽃으로 주변을 살피며 나아갔다.
그렇게 좀 가다 보니 돌무더기 사이에 눈에 익은 물건들이 보였다. 단의 걸낭들이었다. 저 중 하나에 밀랍초가 있을 거였다.
불을 켜고 짐을 챙겨 든 후에도 한참을 헤매고서 호란은 결국 실 같은 바깥 빛을 찾아냈다.
빛을 따라가자 가늘게 입구가 보였다. 부서진 민짜 거석들이 동굴 입구까지의 길을 막고 있었다.
입구를 중심으로 사투가 있었는지 몫꾼들의 시신이 여럿이었다.
호란은 시신이 깔리지 않게 조심하며 거석 파편을 치우고 입구 쪽으로 나아갔다.
입구 앞 마지막 돌을 끌어냈는데도 안으로 빛이 충분히 들질 않았다.
빛을 막고 있는 것은 돌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피와 흙먼지로 뒤덮인 서형의 거구가 동굴 입구를 막아서는 형태로 서 있었다.
짓이겨진 한 팔은 늘어지고, 두 무릎도 반쯤 꺾이고, 팔 하나로 입구 위쪽을 붙잡아 억지로 버틴 채였다.
서형의 눈에는 이미 빛이 거의 없었다.
그가 호란을 알아보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불빛과 사람의 기척이 제게 다가오자 서형이 우물우물 말했다.
“길형이, 길형이한테, 내가, 미안하다고, 미, 안.”
그리고 서형의 눈동자가 뒤로 넘어갔다. 큰 덩치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호란은 맥을 확인하지 않고도 서형이 죽은 걸 알았다.
그는 마치 그 말을 하기 위해 숨을 붙이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호란은 서형의 시신을 동굴 밖으로 옮겼다. 뜨인 눈을 감기고 반듯하게 눕혔다.
동굴 밖에도 부서진 거석 몇 구와 진이 다해 숨을 거둔 몫꾼 셋이 더 있었다.
호란은 몇 발 물러나 서형과 몫꾼들의 시신에 큰절을 했다.
새카만 어둠 속에 열 구 넘는 시신을 삼킨 동굴 쪽으로도 한 번 절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본 시신은 모두 몫꾼들의 것뿐이었다.
이들은 지키는 몫을 다했다.
남은 무리를 찾으러 가려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는데, 다행히 골짜기를 조금 달리자마자 상황을 살피러 온 근처 마을 몫꾼들과 마주쳤다.
단과 일꾼들이 시현을 업고 마을에 도착했고 시현은 의원의 치료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에 호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안전이 확보된 것을 안 호란은 마을 몫꾼들과 함께 동굴로 돌아갔다.
서형과 열네 몫꾼의 시신을 수습한 뒤,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호란은 곧바로 의료소로 뛰어 들어갔다.
시현은 침상에서 눈을 감고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의식도 있는 듯 마는 듯했다.
의원이 계속 옆에 붙어 있는데도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아서 호란은 속이 타들어 갔다.
세 일꾼들이 호란을 붙들고 울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소연했다.
호란도 마음이 울컥했다.
“단은?”
호란이 묻자 준이 대답했다.
“옆방에 누워 있어요. 아마 잘 거예요. 단이 고생 많이 했어요.”
호란은 툇마루로 나갔다. 마침 단이 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건너오려던 중이었다.
“단!”
“아, 무사했구나.”
단이 맥이 탁 풀린 얼굴로 웃었다.
단은 서 있기도 힘든지 털썩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그가 물었다.
“모새는?”
“해치웠어.”
호란의 단답에 단이 푹 웃었다.
“대단하다니까. 상상을 못 하겠어.”
호란은 조금 침묵했다가 말했다.
“서형하고 적색대가 모두 죽었어.”
“어.”
“서형은 내가 갈 때까지 살아 있었어. 마지막에 최길한테 미안하댔어.”
“지랄은. 난 그 말 절대 안 전해줄 거야.”
단은 씹어 뱉듯이 말했다.
호란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마음속 감정을 뭐라 말로 할 수가 없었다.
“시문 님도, 단도, 다른 애들도. 서형하고 대열 몫꾼들이 몫을 한 덕분에 산 거야. 서형은 좋은 몫꾼이었어.”
“쓰레기 같은 어머니였어.”
“맞아. 그래도 좋은 몫꾼이었어….”
서형은 대열에서 싸울 때는 존경스러운 사람이었다.
자기 몫이 뭔지를 분명히 알고 그 몫을 했다.
그런데 왜 제 가족에게는 그렇게 했을까.
왜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는 할 몫 다 했다고 생각하고 살았을까.
저만한 몫꾼이, 남의 인생을 망치면서 그게 잘못인 줄도 모르게 된 것은 어째서일까.
하늘인은 원래 그렇고 반민은 원래 그렇다고? 원래 안 맞는다고?
그럼 그 둘이 서로 정을 준 게 잘못이 되나?
최길은 잘못 태어난 사람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서형은 대체 어쩌다가, 자기가 내키는 대로 하는 행동이 다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호란으로선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얼굴을 문지르고 단에게 물었다.
“시문 님은, 괜찮으시겠지? 나으시겠지?”
단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가 호란을 안 보고 말했다.
“괜찮겠지. 이제 곧 땅인 의법사가 올 거라니까.”
시현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의식이 거의 없었다.
단이 상황을 설명했지만, 마을의 반민 의원은 마력하고 관련된 땅님 병은 자기가 못 본다고 난색을 표했다.
그래도 당장 급한 대증 처치는 해주었는데 별로 효과가 없었다.
시현은 가끔 눈을 떴지만 초점을 잡지 못했고 말도 하지 못했다.
저물 때쯤엔 열이 나기 시작했고 금세 고열이 되었다.
새카만 밤이 되어서야 마을 몫꾼이 근방 소읍의 하나뿐인 땅인 의법사를 수레에 태워 데려왔다.
그래도 심하게 아픈 땅인이 있다는 말에 바로 와준 것이었다.
“우리 나리님 좀 도와주십쇼. 필요하시면 마력석도 있습니다.”
“부탁드려요. 부탁드립니다, 땅님 나으리…!”
단과 호란의 말을 들으면서 의법사는 침상에 누운 소년을 슬쩍 재어보았다.
환자는 아직 소년이고 의식조차 없었지만 곁에서 돌보는 종자들이 모두 어렵고 극진하게 대했다.
몸에 걸친 적삼은 보통은 구경하기도 힘든 최상등의 항라였다.
이 시국에 호위에 종자를 여럿 달고 마력석을 갖고 여행하는 것만 보아도 보통 사람이 아닐 터였다.
의법사는 잔뜩 신중해져서 물었다.
“발열 말고 다른 증상은 어떤가? 기맥이 어지러운 게, 그냥 열병이 아니겠는데.”
단이 대답했다.
“잠시 의식 있을 때 신이명이 있다고 하셨어요.”
“신이명? 그건, 애기들 병이잖아….”
의법사가 의아해했다.
신이명은 타고나길 기운에 민감한 아이들이 법력의 움직임에 과하게 반응해서 앓는 병이었다.
신생아 때 많이 발증하고 크면서 점점 좋아진다.
주로 발열과 구토가 심하고 이명과 어지럼증으로 맥을 못 추었다.
하지만 신생아가 이명을 호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발열과 구토는 신이명이 아니라도 아기들이 많이 겪는 것이라 제때 진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맞는 처치를 못 받아서 죽는 경우도 많았다.
영유아 때를 무사히 넘긴다 해도 안심할 수 없었다.
아직 어릴 때 기운 읽는 훈련을 과하게 시키다가 발증하기도 했다.
신이명을 앓는다는 것은 이미 기운 읽기에 재능이 꽃피고 있다는 뜻이라, 땅인들은 신이명으로 자식을 잃는 것을 가장 아깝고 애통하게 여겼다.
“그래도 신이명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맞을 겁니다. 어릴 때 앓아 보셨을 테니까….”
단이 말했다.
사실 단도 그렇다고 들은 적은 없었다.
남운관에서 반년 넘게 사는 동안 완씨 집안에 관한 온갖 시시콜콜하고 쓸데없는 소문을 다 들었지만 시문의 신이명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하지만 제 입으로 신이명이라고 말했을 때 시현은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만한 것이 열두 살에 정점의 격에 달한 마법사다.
타고난 체질로든 과잉 조기교육으로든 언제 한 번은 신이명의 쓴맛을 보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의법사가 한 번 더 시현의 손목과 관자놀이에 손을 짚어 맥을 읽었다. 그가 말했다.
“기맥 튀는 게 비슷하기는 하네. 아주 심한 신이명이라 치면 맞아들어가…. 그런데 어쩐다.”
의법사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신이명은 원래가 바로 듣는 약이 없어. 이렇게 심해지기 전에 빨리 진단해서 달래는 게 정석이라. 마력석이 있대도 의법술도 함부로 못 써. 법력에 반응해서 더칠 수 있거든. 남운관 경인이나 귀수관 사인처럼 귀신같은 실력이면 또 모를까….”
여기서 경인의 이름이 나오나.
단은 백여 년 만의 문이 명문대가 완씨 집안의 독자로 난 것이 우연이 아님을 깨달았다.
왜 문이 백 년에 한 번도 나기 어려운지도 알게 되었다.
같은 자질을 갖고 세상에 난 아이들 백 명 천 명이 뜻 모를 고열 속에서 죽거나 몸과 마음이 상하는 동안, 상위 중에서도 최상위 환경을 갖추고 태어난 한 명만이 모든 것을 손에 넣은 것이다.
단은 침상에 누운 그 한 명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하여간에 이 자식은… 알면 알수록 이쁜 구석이 없었다….
그래도 중증의 신이명이란 건 걱정할 일이었다.
영유아가 아니니 그리 쉽게 죽진 않겠지만 어쨌든 죽는 경우가 나오는 병이다.
그가 지금 이런 데서 이런 일로 죽으면 기분이 엄청 더러울 것이다.
직전에 그를 살리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내버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생각에 빠져 머리채를 만지작거리던 의법사가 결심한 듯 말했다.
“음. 그래. 사실 방법이 없지는 않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