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 * *
근심하던 호란은 물소리를 듣고 표정이 바뀌었다.
소리를 따라가니 산비탈 아래 땅이 편평해진 곳에 실개울이 흐르고 밤나무가 무리 지어 서 있었다.
나무 밑에도 가지에도 굵은 밤이 잔뜩이었다.
호란은 사형 얘기는 싹 잊고 신이 나서 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자루를 다 채운 뒤, 호란은 물을 마시러 갔다가 개울 저편 땅바닥에서 짓누른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흙이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깊이 패여 있었다.
이렇게 깊은 자국을 남기는 존재는 호란이 알기로 거석뿐이었다. 하지만 거석의 발자국이라기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호란은 심각해져서 온성을 불렀다.
“나으리. 이거…. 잠깐만 와 보세요. 이상한 자국이 있어요.”
“응? 뭐냐?”
다른 나무 아래서 집게로 밤을 집던 온의가 자루를 끌며 다가왔다.
“보세요. 이거…. 거석 발자국이라기엔 너무 작고요.”
흔적들은 모두 한 자가 못 되었다. 거석들은 다리가 굵어서 작은 놈이라도 발자국은 서너 자씩 했고, 자국 간격도 이것과 달랐다.
애초에 거석은 산길을 잘 못 올랐다. 거석이 여길 지나다녔으면 개울물을 놓아두었을 리도 없었다.
온성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거… 설마.”
“뭔지 아세요?”
“아니…. 짐작 가는 거는 있다만. 놈들이 예까지 나올 리는 없는데.”
온성은 급히 밤 자루를 여몄다.
“일단 돌아가자. 잘못하면 위험하겠다.”
“정말 거석이에요? 이런 자국은 처음….”
말하던 호란은 얼굴을 굳혔다. 지면에 무거운 것이 발을 딛는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진동은 빠르게 다가왔다. 수풀이 거칠게 버석거리더니 나무들 사이에서 회녹색 거체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물러서세요, 나리!”
호란은 온성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나타난 것은 거석이 틀림없었지만 모습은 이제까지 본 어느 놈과도 달랐다.
금 간 알처럼 생긴 구형의 몸체에 다리 네 개가 붙어 있고, 몸통 가운데에는 반투명한 원구가 외눈처럼 박혀 있었다.
한 장이 안 되는 키에 크기도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길쭉한 다리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호란을 발견한 놈이 웅 진동을 울렸다. 놈은 네 다리를 움직여 앞길의 나무를 쓰러뜨리며 달려왔다.
‘이놈도 기결이 안 읽혀!’
호란은 자세를 갖추면서 빠르게 놈을 살폈다.
네 다리 거석은 몸통도 다리도 두꺼운 석질로 감싸여 있었다.
나선무늬가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았고, 기운까지도 껍데기 안에 갇혀 있었다.
보통 거석처럼 기결에서 기운을 뿌렸다면 이렇게 접근하기 전에 호란이나 온성이 눈치챘을 것이다.
거석의 한 다리가 호란을 찍어버릴 듯 꽂혀왔다. 호란이 아예 피해버리면 놈은 그대로 호란을 지나쳐 온성을 공격할 터였다.
호란은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종이 한 장 차이로 거석의 발끝을 피했다. 그리고 회전한 기세를 담아 바닥에 찍힌 다리의 옆면에 무릎을 꽂았다.
쿵. 거석의 다리는 굵은 금이 갔지만 꺾어지지는 않았다.
이놈은 기결도 안 보이는 주제에, 몸체를 둘러싼 껍데기는 다른 거석보다 훨씬 더 딱딱했다.
놈은 다른 세 다리를 바꿔 딛으며 다시 호란에게 다리를 찍었다.
호란은 한 번 더 놈에게 붙을 듯한 거리로 몸을 피했다.
다만 이놈은 모새가 부렸던 민짜 거석과 달리 기운이 아예 안 읽히는 것은 아니었다.
바싹 접근하니 살기 어린 기세가 뚜렷이 느껴졌다.
몸체를 덮은 껍데기들 사이에 반 뼘 폭의 틈이 있었는데, 거기서 기운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몸체와 다리를 잇는 관절부는 드러난 곳이 훨씬 더 넓었다.
그것을 눈치챈 호란은 곧바로 몸을 솟구쳤다.
높이 차 올린 발이 관절부를 안쪽에서 가격했다.
캉 소리와 함께 관절부가 부러져나갔다. 떨어진 다리가 빙글빙글 돌며 바닥에 처박혔다.
호란이 착지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놈은 휘청였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다리 하나가 날아갔는데도 남은 세 다리로 중심을 잡고 있었다.
호란은 다른 다리도 날려버릴 생각으로 자세를 잡았다.
그때 멀찍이 피해 있던 온성이 외쳤다.
“호란아, 또 오는 것 같다!”
“네?”
처음 네 다리 거석이 나타난 쪽에서 우직우직 나무 꺾이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곧 똑같은 놈이 둘이나 더 모습을 보였다.
두 놈은 곧바로 온성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으앗, 온의 나리!”
기겁을 한 호란은 치던 놈을 내팽개치고 온성에게 달려갔다.
아슬아슬 놈들보다 먼저 온성에게 다다른 호란이 훌쩍 그를 안아 들었다. 곧바로 공격이 내리꽂혔다.
허둥지둥 피하며 호란이 소리쳤다.
“나리, 마력석! 마력석 없으세요?”
“이 녀석아, 누가 밤 주우러 가는 데 마력석을 가지고 와?”
온성이 핀잔했다. 그 와중에 밤 자루는 또 안 놓고 끌어안고 있었다.
온성을 보호하면서 세 놈과 싸우는 건 무리였다. 호란은 바로 비탈을 따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놈들을 따돌리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네 다리 거석들은 보통 거석과 비교도 안 되게 움직임이 빨랐다. 비탈이나 가파른 곳도 성큼성큼 잘 달렸다.
온의가 소리쳤다.
“호란아, 그 방향 아니다! 온 길은 저쪽이야!”
“지금은 방향 못 바꿔요!”
호란은 그냥 내달렸다. 따라잡힐 걱정까진 안 했지만 아주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다리 하나를 잃은 한 놈은 뒤처졌지만 다른 두 놈은 꽤 가까이 따라붙고 있었다.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극열의 심, 창날로서 꿰뚫어라!”
호란의 머리 위로 세 줄기의 불꽃이 뻗어갔다.
등 뒤에서 폭음과 열기가 터졌다.
돌아보니 쫓아오던 거석 하나가 껍데기 안쪽에서 폭발을 일으키며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호란은 놀라 소리 난 곳을 보았다.
높은 둔덕 위쪽에 한 무리의 관군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의 하늘인 대열에다 땅인 법군도 여럿이었다.
맨 앞에 선 남자는 아청색의 긴 철릭을 입고 장식 달린 흑립을 쓰고 있었다.
손에 커다란 마력석 잔해를 든 것을 보면 방금 불꽃 마법을 쓴 것이 이 사람 같았다.
그가 법군 무리에게 명령했다.
“석갑 틈새를 노려라! 발문!”
후열에서 마력석을 든 법군 여덟 명이 차례로 주문을 발했다.
불과 벼락이 가닥가닥 뻗으며 남은 거석을 노렸다.
곧 다른 한 놈에다 뒤처져서 따라오던 다리 셋 남은 놈까지 주문을 연타당하고 쓰러졌다.
폭발로 불꽃이 튀어서 불이라도 안 나나 걱정했는데, 땅님들이 어떻게 주문을 조절하는지 거석만 깨끗하게 쓰러졌다.
“와….”
호란은 안도하면서 온성을 땅에 내려놓았다. 관군들이 둔덕을 내려왔다.
하늘색 짧은 철릭을 입은 땅인 여자 한 사람이 급히 이쪽으로 달려와 온성에게 머리를 숙였다.
“어르신, 안 다치셨습니까? 위험하게 또 이런 델 오시고….”
“나는 괜찮네. 아이구, 신세 단단히 졌어. 소일거리로 밤이나 좀 주우러 왔다가 이게 무슨 봉변인지.”
온성이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여자는 도리어 울상이 되었다.
“밤이라뇨, 어르신.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지금 금표비 안쪽까지 들어오셨어요!”
“어이쿠. 그랬느냐?”
온성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딴청을 했다. 여자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 저희 좀 봐 주세요. 네? 도총관 어른은 또, 얼마나 난처하시겠습니까.”
“명지. 쓸데없는 소리 말게.”
다가오며 말한 것은 명령을 내리던 아청색 옷의 지휘관이었다.
남자의 광다회에는 공단으로 된 부절 주머니가 걸려 있었다.
호란은 남운관서 배운 걸 기억해냈다. 문양 넣은 부절 주머니를 가졌다는 건 이 어른이 땅님 법군 중에서도 특히 높은 사람이란 뜻이었다.
남자는 옅은 빛 피부에 진갈색 수염을 길렀고 3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단정하고 점잖아 보이는 외모였으나 지금은 그 얼굴에 숨기지 못한 짜증이 비쳐 있었다.
그가 자기 명령패를 꺼내 여자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외구역을 돌아다니는 놈들이 더 없는지 샅샅이 수색하라. 필요하면 전갈하여 별위군 30인 대열을 더 동원하라.”
“예.”
여자가 명령패를 받고 달려갔다.
지휘관 남자가 온성을 보고 말했다.
“가시죠. 금표비 바깥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많이 바빠 보이는구먼.”
온성이 뚱하게 대답했다. 남자의 얼굴에 짜증이 깊어졌다.
그래도 그는 머리까지 숙이며 부탁했다.
“그냥 같이 가시죠. 저 더 곤란하게 하지 마시고요. 예? 아버지.”
호란은 놀라서 두 사람을 보았다. 온의 나리의 딸 이야기는 몇 번 들었지만 아들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온성이 여전히 마뜩잖은 투로 말했다.
“내가 내 발로 돌아가는데 왜 네가 곤란해진다니? 나는 여기 얘랑 같이 가면 된다.”
“아버지, 제발…. 잠깐 저하고 잘 지내는 척이라도 해주시면 안 됩니까? 그래야 제가 얼버무리든 봐드리든 하기가 낫지 않겠어요.”
“일없다. 너하고 잘 지내봐야 잔소리밖에 더 듣느냐? 봐주기 어려우면 뭐, 사형이라도 시키든가.”
“아버지이….”
온성은 본체만체하고 오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철릭의 남자는 거의 앓는 소리를 내며 온성을 따라 걸었다.
호란도 양쪽의 눈치를 보며 슬슬 뒤를 따라갔다.
남자가 호란을 흘긋 보더니 말했다.
“무얼 하느냐? 네 손이 비었다.”
“…네? 아 네!”
말뜻을 깨달은 호란은 황급히 온성의 손에서 밤 자루를 받아들었다.
관군 무리와 거리가 벌어지자 남자가 낮은 소리로 온의에게 말했다.
“저 여자아이는 새로 들이신 종입니까? 입단속을 잘 부탁드립니다. 말씀 안 드려도 잘 아시겠지만, 갑병 관련된 것은 무엇 하나 새어나가면 안 됩니다.”
온성이 불만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 갑병인지 부지깽인지를 아직도 쉬쉬하고 있느냐? 놈들이 이젠 금표비 언저리까지 기어나오는데! 그런 꼴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그건… 이런 일은 정말로 이번이 처음입니다. 저도 경비대에게 보고받고 바로 온 참입니다. 신속하게 조사에 들어갈 것이니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이제 와서 퍽도 신속하겠다.”
호란은 눈만 깜박였다. 들어보니 이 높은 법군 나리도, 온의 나리도 그 이상하게 생긴 네 발 거석에 대해 전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별나게 생긴 거석이 있다는 건 십중팔구 돌 인간도 있다는 거였다. 설마 다천관에도 돌 인간이 나타난 걸까?
묻고 싶었지만 높은 땅님 앞에서 맘대로 말해도 되는지 자신이 없었다.
호란이 틈을 보는데 남자가 온성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투였다.
“그런데 아버지. 대체 이런 데는 왜 오세요? 밤 같은 건 왜 주우러 다니시는 거고요? 그 연세에, 이런 시국에. 그런 건 장에서 사시든가, 하다못해 아랫것을 시키셔도 되지 않습니까.”
“이 봐라, 이 봐. 너랑 의좋은 척 안 한다는데도 벌써 잔소리구나.”
“제가 말씀 안 드리게 생겼습니까. 밑에 애들이 보고는 안 올려도 저도 다 듣는 게 있습니다. 금표비 넘으신 거 처음 아니시잖아요. 전에는 또, 신분패도 미비한 난민을 잔뜩 성에 데려오시고….”
온성은 아들의 불평을 들은 척도 않고 휘적휘적 걷기만 했다.
남자가 한숨을 쉬더니 어조를 바꾸었다.
“뭐, 괜찮습니다. 그 정도는 제가 다 무마해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진 여론도 좋았고요.
하지만 계속 이렇게 지내실 순 없어요. 아시잖아요. 지금 아버지처럼 공 크고 인망 높은 분이 흔치 않다고요. 그렇게 주목받는 분이 관직은 전부 거절하시고. 혼란한 시국에 돌출행동 하시고. 그러니까 자꾸 오해하는 사람들이 나오거든요….”
“아이고 뻔한 소리. 그만하거라.”
“제 말은요. 이것도 저것도 다 싫으시면 최소한 집에 들어와서 지내세요. 그러면 남들 보기에 훨씬….”
“됐다고 했다!”
온성이 말을 끊었다. 그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결국 또 그 소리냐? 내가 그 집에를 왜 들어가느냐? 나는 연 끊긴 사람인데.”
호란은 어깨를 움츠리고 발걸음을 늦춰 두 사람과 거리를 벌렸다.
상대가 높은 땅님이 아니더라도 이럴 때는 돌 인간 얘길 물어봐서는 안 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