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39
139화
* * *
“휴….”
남자는 당황스러워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그가 사정 조가 되었다.
“아버지. 아직도 화나셨어요? 그때는요….”
“내가 언제 화를 냈느냐? 화난 것은 너지.”
온성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다시는 집에 발 들이지 말라고 한 것도 너고, 이젠 아버지가 아니라고 한 것도 너 아니냐? 왜 그러냐? 너 하라는 대로 다 해주고 있는데.”
“어휴. 그때는 저도 젊어서 한 소리고요…. 잘못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얼마나 더 사과드려야 화를 푸시겠어요?”
“네가 왜 사과를 하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너 사과할 일도 하나도 없고 나 화난 것도 하나도 없다. 나는 지금처럼 사는 게 편하고 좋아. 그냥 내버려 두거라.”
설득도 간청도 통하지 않자 아들의 목소리에 다시 짜증이 스몄다.
“그럼 그 움막 같은 집에서 계속 아랫것들하고 지내실 겁니까? 허드렛일까지 직접 하신다고 소문 다 났습니다. 방씨 가주가 되셔가지고 망신스럽지도 않으세요!”
“방헌수! 방씨 가주는 너야, 전대 가주는 네 어머니고!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온성이 발걸음을 멈추고 대뜸 호통했다.
“이제 와서 내가 그 집 들어가서 무슨 복잡스러운 꼴을 보라고 이러는 거냐? 너는 결국 남들 눈이 신경 쓰이는 거지, 나랑 같이 살고 싶은 것도 아니잖느냐!”
“아니 아버지, 제가 언제….”
“그럼 아니란 거냐?”
“…….”
헌수는 주먹을 쥔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가 억울한 것 같은, 하지만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이 되더니 말했다.
“누님 위패를 가묘에 들여드리면 됩니까?”
온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헌수가 다그치듯 말을 이었다.
“결국은 누님 때문이죠? 누님이 마음에 남으셔서 이러시는 거죠. 누님 위패를 모셔드리면 아버지도 집에 돌아오시겠습니까?”
온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네 누이는 좋은 데서 잘 쉬고 있다. 너랑 내 문제에 걔를 끌어들이지 말거라.”
헌수의 얼굴에 불끈 화가 올랐다. 그가 언성을 높였다.
“어떻게 누님을 빼고 이야기합니까? 처음부터 모든 게 다 누님 탓이었는데요!”
온성은 순간 멍한 얼굴이 되었다.
일흔 가까운 나이에도 늘상 넘쳐흐르던 활기가 종적을 감췄다. 두 눈이 안개 낀 듯 흐려졌다.
노인은 갑자기 마른 고목처럼 늙어 보였다.
온성이 말했다.
“그래….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제 생각이 아니라 그게 사실 아닙니까.”
헌수가 다시 따졌지만 아까보다 기세가 줄어 있었다. 아버지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 걸 스스로도 아는 듯했다.
온성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됐다. 그 요회처 고문인지 뭔지, 관직 하나 맡으면 되는 거지? 알겠다. 총령부서 네 입장 어렵게 안 할 테니 걱정 말아라.”
“아버지, 그 말씀 드리는 게 아니잖아요!”
“아니기는. 시작은 분명 그 이야기 아니었느냐? 오늘은 이만해다오. 늙은이 피곤하고 망신스럽다.”
온성은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호란은 허둥지둥 뒤를 따랐다.
호란은 온성을 따라가면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헌수는 산기슭에 우뚝 선 채 멀어지는 아버지를 보고만 있었다.
금표비를 지나고 산길이 넓어진 다음에야 온성이 입을 열었다.
“신경 쓰게 했구나. 나도 오래 살았다 보니 여러 가지가 있다.”
“네에….”
호란이 눈치 보는 기색을 알고 온성이 가볍게 말했다.
“넌 아무 걱정 안 해도 된다. 금표 구역 들어갔던 것도, 뭐 별일 없을 거야. 헌이가 내 앞에서 불평은 저렇게 해도 이제껏 나나 내 주위 사람한테 나쁘게 한 적은 없거든. 애가 옹졸하고 남의 눈치를 봐서 그렇지 착한 애야. 아주 착해.”
“…….”
아들을 욕하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호란은 대답을 못 했다.
온성이 씁쓸하게 말했다.
“사실 헌이한텐 내가 미안한 것만 많지. 저 애가 날 원망하는 것도 당연하단다. 저 애 입장에선 내가 저를 여기 놔두고 훌훌 떠나버린 거니까. 크는 동안 많이 쓸쓸했을 거다.”
“아… 상단 열 때 아드님은 안 데려가신 거예요?”
“아이고, 어떻게 데려가느냐, 그 고생길을! 처음엔 장사도 망하기만 했고. 더구나 쟤는 딸애랑 다르게 공부하면 격 얻고 벼슬할 수 있지 않으냐. 어려서부터 재능이 남달랐어. 데려가면 앞길만 막는 꼴이었지.”
온성의 눈가에 웃음 주름이 깊어졌다.
“봐라. 제 엄마랑 여기 남았으니까 지금 총령부 도총관까지 오르지 않았니? 쟤가 저래 봬도 상격이란다. 나랑 똑같이 화 과목의 의 격이야. 아주 어릴 적 말곤 내가 공부 가르쳐주지도 못했는데. 참 장하지.”
직전에 아들과 싸우고서도 온성의 목소리엔 자랑하는 느낌이 있었다.
호란은 기분이 복잡해졌다.
이 비슷한 자랑을 호란은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식과 반려를 중간에 내팽개치고서도 제 아들이 세다고 으스대던 몫꾼을 한 사람 알았다.
온성이 물었다.
“왜 표정이 그러니?”
호란은 원래 다른 무리나 가족 일에 참견하는 게 안 좋다고 배웠다. 하지만 못내 마음이 쓰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아드님이 속상하시진 않았을까요?”
“그야 많이 속상했겠지.”
“그럼 온의 나리가 사과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과했단다! 안 했을 거 같으냐? 떠날 때 하고, 중간에 계속 편지 쓰고 사람 보내서 하고, 선이 떠난 담엔 얼굴 보고 하고, 기회 닿을 때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했어. 그런데 말만 듣고 풀리면 그게 원망이겠니? 저놈이 안 풀리는 걸 내가 어쩔 수가 없지.”
온성이 툴툴대는 소리를 냈다.
“내가 편지니 선물이니 보내는 건 뜯지도 않고 반송하고, 선이… 우리 딸애 부고 전하러 갔을 때도 이미 끊어진 연이니 집에 들어오지 말라 소리부터 했단다. 세상에, 그게 제 누이랑 아비한테 할 소리야? 선이는 아예 떠난 마당에!
아느냐? 천천곡 너머로 물건 보내려면 운송비가 상품 원가를 훌쩍 넘는단다. 근데 저놈이 그걸 꾸역꾸역 반송한 놈이야! 세상에 원, 살면서 옹졸한 놈 많이 봤지만 제 돈까지 써 가며 옹졸하게 구는 놈은 저놈이 첨이다.”
호란이 물었다.
“그래도 지금은 같이 살자고 하시잖아요. 화해하려고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 내가 볼 땐 아니야. 내가 관에 마력석 기부하고 주변 이목 모여서 제 입장 곤란하니까 저러는 거야.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저놈이 또 귀는 엄청 얇거든.”
“그래도 같이 살면 마음이 풀릴지도 모르잖아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원망이 더 깊어질 수도 있단다. 사람 일이 다 뜻같이 되는 게 아니야.”
온성이 씁쓸하게 말했다.
“이런 건 나이 들수록 더 어렵단다. 잘못하면 나보다 헌이가 더 힘들어질 수도 있고. 원래 원망은 받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이 더 힘들거든…. 아무리 부모자식 간이라도, 그럴 거면 같이 안 사는 게 낫지.
저 애도 나 같은 건 상관 안 하고 사는 게 훨씬 마음이 좋을 거야. 지금은 쓸데없이 남 눈치 봐서 저리 안달이지,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다.”
“…….”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호란이 생각에 빠진 사이 온성이 화제를 바꿨다.
“헌이 말 너도 들었지? 그 회녹색 거석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말거라. 절대로. 소문 퍼지면 여러 가지로 안 좋아진단다.”
“하지만 우리 나리님한테는 말해야 되는데요.”
온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렇겠지. 네 본분으로도 그렇고, 그분이야 적절히 판단하실 테니…. 그래. 그러자꾸나. 나도 함께 말씀을 드리마.”
“단한테도 말해야 돼요.”
“걔한테까지?”
온성은 잠깐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야, 며칠 보니 허술게 말 흘리고 다닐 아이는 아니더마는. 굳이?”
“말해야 돼요.”
호란이 고집하자 온성은 선뜻 물러섰다.
“그러거라. 그래도 입단속은 잘 시켜야 한다. 바깥 사람은 물론 유나 철보한테도 흘러나가면 안 된다.”
“네.”
집에 돌아온 온성은 철보에게 일거리를 주어 집 밖으로 내보냈다. 유는 오늘도 광에 틀어박혀 연구 삼매경이었다.
주위가 비자 호란은 서둘러 시현과 단에게 제가 본 걸 이야기했다.
처음 보는 거석이 나타났다는 말에 시현은 곧바로 심각해졌다.
“돌 인간은? 돌 인간은 없었느냐?”
“네. 못 봤어요. 놈들이 누구 지휘를 받는 거 같지도 않았고요.”
호란은 옆에 앉은 온성 쪽을 보며 물었다.
“돌 인간은 없었…지요? 예전에도요?”
온성이 호란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다음 시현에게 말했다.
“그러하이. 내 알기로도 다천관 주위에 돌 인간이 나타났다는 말은 풍문으로조차 없었네. 속읍 몇 군데에서는 목격담이 있으나 진위가 불분명하고, 그나마도 다 관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네.”
실제 다천관은 이제껏 거쳐온 관성들 중 가장 거석의 피해가 적은 곳이었다.
산과 골을 낀 지형 덕택인지, 변고 당일에도 성 전체가 포위당하는 상황에는 이르지 않았다.
듣기로 북쪽의 대운관은 성곽까지 반파당하며 겨우 적을 막아냈고, 벽명관은 아예 함락당했다는데, 그와는 무척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호란이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 둥그렇고 이상한 거석은 전에도 나타난 적이 있었던 거고요. 그렇지요?”
온성은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시현이 미간을 좁히고 질문을 연발했다.
“사실이오? 그것이 처음 발견된 것이 언제인가? 피해는 어느 정도였는가?”
“사실이네만….”
온성이 곤란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퇴역은 했다 해도 법군일세. 군인으로서 알게 된 바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은 율에 맞지 않네. 군율보다 상위의 명이 있다면 모를까.”
단은 슬쩍 시현의 눈치를 보았다.
온성의 발언은 겉으로만 보면 말 못 하겠다는 거였지만, 속뜻은 시현이 슬슬 정체를 밝히고 문령으로 명하면 말해줄 수 있다는 얘기였다.
뭐 쟤도 당연히 알아들었겠지.
평소엔 어리바리하다가도 땅인 사이의 정치와 위계 문제만 되면 없던 눈치가 쭉쭉 솟아나는 위인이다.
돌 인간 문제가 튀어나왔는데 아직도 그 ‘완씨 시문 아닌 사람 놀이’를 계속하려 할 리도 없고.
그런데 단의 생각과 달리 시현은 뒤로 물러났다.
“이해하겠소. 걱정해서 물은 것이니 무람없는 질문을 양해하시게.”
“별말씀을 다. 외려 내가 면목 없지.”
온의의 눈빛이 시현을 읽으려는 듯 깊어졌다. 시현이 진지하게 말했다.
“참견에 불과하네만, 내 생각엔 다천관 총령부에서 이 일을 좀 더 시급하고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것 같네.”
“맞지. 자네 말이 다 맞네. 나도 총령부에 채근할 마음을 먹은 참이네.”
온의는 한숨을 쉬더니 한탄 조로 투덜거렸다.
“헌데 총령부고 총치부고 빠릿하게 움직일 놈들이 있을까를 모르겠어. 아무리 피해가 없기로서니 거석인데, 다들 게게 풀려가지고. 변고 때 다른 관성처럼 혼이 났으면 그때라도 정신을 차렸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
시현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온의는 놀란 표정을 못 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말 나온 김에 일단 몇 군데 말이라도 넣어보고 오겠네. 쉬고 계시게.”
그는 밤 주우러 갔던 무명옷 차림 그대로 털레털레 방을 나섰다.
놀라 굳었던 시현은 온성이 나간 뒤에야 작게 중얼거렸다.
“피해가 없었다고? 전혀?”
호란도 놀랐다.
“정말일까요? 그거, 엄청 빠르고 부수기 힘들었는데…. 아, 그래도 다천관 땅님들이 마법으로 대응을 잘하시긴 하더라고요. 약점도 이미 다 아시는 거 같았고….”
“알 수 없는 일투성이구나.”
시현이 턱에 손을 대고 골똘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 금표 구역이란 곳에 가서 직접 조사를 해보아야겠다. 하지만 지금은 전투가 있은 직후니 수색대나 경비대가 많이 있겠지. 되도록 마주치는 걸 피하려면 언제가 좋을 것 같으냐… 단?”
“나리님.”
조용히 있던 단이 입을 열었다.
“이 마당에 와서도 신분을 숨기시는 건, 문이 병을 앓는다는 걸 외부에 알리기 싫어서군요? 놀이로 그러신 게 아니었어요. 그렇지요?”
“노, 놀이라니!”
시현의 얼굴이 빨개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