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4
014화
* * *
“뭐?”
다들 깜짝 놀랐지만 호란도 못지않게 놀랐다.
둘째발 한돌은 쉰이 가까운 남자로, 말수가 적어 호란과는 대화조차 몇 번 안 해봤다.
딱히 다른 동료보다 더 의리를 지킬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한돌은 자기 말을 증명하듯 호란 곁에 와서 섰다.
“하나라도 몫꾼이 늘면 그만큼 여유가 생기겠지. 틈을 봐서 호란네 동생을 데리러 갈 수도 있을 거다.”
“왜….”
타호와 채련이 놀라서 입을 벙긋거렸다.
소앵만은 뭔가 아는지 씁쓸한 얼굴이었다.
소앵이 한돌에게 말했다.
“미안해.”
“무슨 소리야. 제 몫은 제가 챙겨야지.”
둘은 주먹을 들어 인사하고 등을 돌렸다.
세 사람이 겅중겅중 뛰어 산 아래로 사라지고, 호란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한돌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섰다.
대문간에 추선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두 사람을 가로막는 태세였다.
추선이 심문조로 말했다.
“한돌, 왜 마음을 바꿨는지 물어야겠다.”
“호란이 설득했소.”
“얘가 달변인 줄은 몰랐는데.”
“시문 나리께 빚진 것이 뒤늦게 생각났소.”
추선이 코웃음을 쳤다.
“그 폭도 놈들은 시문께 은덕을 안 입어서 그 난리겠더냐. 배은망덕한 것들.”
추선은 바닥에 침을 퉤 뱉더니 등을 돌렸다.
“아웅을 믿으니 너희도 믿겠다. 들어와라.”
돌아와 보니 땅인들은 각각 방에 들어갔고, 내측 몫꾼들이 번 설 자를 정하고 있었다.
한돌과 호란은 사랑채를 지키게 되었다.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석유등을 사이에 두고 주대청 앞에 섰다.
한동안 석상처럼 서 있던 한돌이 말했다.
“내가 왜 남았는지 알고 싶으냐?”
“응.”
한돌이 조금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내 어머니는 평생 몫을 한 적이 없는 반쪽짜리였다. 타고나길 둔하고 서툴러 제대로 하는 일이 없었지.
우리 모자를 책임지던 숙부가 병으로 죽고, 어머니와 난 무리의 천덕꾸러기가 됐다. 밥은 굶지 않았지만 아무도 우리를 무리의 일원으로 존중하지 않았다.
나는 몫을 갖자마자 어머니를 데리고 무리를 떠났다. 어디서도 적응을 못 하고 방랑족이 될 뻔하다 다다른 곳이 남운관이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남운관에 와서 처음으로 어머니는 어깨를 펴고 살았다. 여전히 제대로 하는 건 없었지만 내가 번 돈만 있으면 아무도 어머닐 무시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왼대열 삼직 아들 뒀다고 떵떵거리는 것도 배웠더군.
어머닌 그렇게 남운관에서 십구 년을 살고 올해 초에 세상을 떴다. 어머니 돌아가던 날….”
한돌이 말을 끊더니 크게 숨을 쉬었다.
석유등 불빛에 그의 눈가가 살짝 반짝였다.
“그날 거석이 떼로 왔다. 숨이 넘어갈 듯 넘어갈 듯하는 어머니 손을 놓고 소집에 응하려는데 아웅 대장이 사람을 보냈더라. 남운관엔 시문께서 계시니 너 하나는 빠져도 된다고. 그냥 임종 지키라고.
난 싸움에 빠졌다고 비난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 날 군영에 가니 모두가 날 위로했다. 어머니 장례에 다른 대열 몫꾼들까지 다 왔다….”
한돌의 목소리가 울먹임에 끊겼다.
호란의 가슴도 먹먹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하란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한돌이 주먹으로 눈물을 닦고는 또 한 번 큰 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시 생각하니 나는 남운관과 시문 나리의 덕을 봤더라. 남운관은 하늘인 무리 같진 않아도 내 어머니에겐 제일가는 무리였다.
나는 이제 애들도 독립하고 돌볼 가족도 없는데, 혼자 살자고 무리에 의리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나를 하늘인이라고 하겠냐.”
호란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돌이 물었다.
“네 생각엔 어떨 거 같으냐? 나리들 법술이 과연 되살아날까?”
“시문 님께서 어떻게든 하실 거야!”
“그 돌 다루는 괴인은 어떻게 쫓아가고?”
“그것도 시문 님께 방법이 있을 거야!”
한돌이 머리를 긁적였다.
“모르겠다만… 예 있으면 시문 나리께 뭐라도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빨리 네 동생을 데려오고 싶구나.”
“고마워….”
호란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다.
호란이 훌쩍거리거나 말거나 놔둔 채, 한돌은 밤새 원래 하던 말수 없는 사람 노릇을 했다.
6. 가위 고르기
걱정하던 폭도의 습격은 없었지만 그 밤이 조용하게 흘러가진 않았다.
새벽녘, 식량을 훔쳐 도망갈 요량으로 창고에 숨어들던 내군 두 놈이 추선에게 들켜서 박살이 났다.
번 서는 척 망을 보다 수가 틀리자 도망간 한 놈도 곧 똑같은 꼴이 나서 끌려왔다.
다들 어제 제일 먼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충성을 맹세했던 이들이어서 호란은 어처구니를 잃었다.
중문 밖에 나와 자초지종을 들은 경재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명령했다.
“평시라면 군법으로 사사하겠으나 지금은 일손 하나가 아깝구나. 발을 하나씩 자르고 일을 시켜라.”
죄인들은 모두 낯색이 변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용서해주십시오, 경인 나으리!”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차라리 손을, 손을 잘라주십시오!”
“걱정 말아라. 법력이 되돌아오고 너희가 개전의 정을 보이면 내가 손수 잘린 발을 붙여주마. 잘리기 전보다 더 힘이 붙을 것이다.”
경재가 추선에게 지시했다.
“고통이 적도록 맨손으로 하지 말고 칼을 써라.”
“자비로우십니다, 마님.”
추선이 번개같이 허리에서 칼을 뽑아 쾅쾅 세 번을 내리쳤다.
중문 앞은 신음과 통곡 소리로 가득 찼다.
경재는 소매를 걷더니 종에게 약상자를 가져오도록 해 직접 잘린 상처를 살폈다.
처치를 끝내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벌을 받았으니 너희의 죄를 더 묻지 않겠다. 반성하며 성심을 다해 일하여라. 잘라놓은 발이 썩기 전에 법력이 돌아오도록 돕는 것이 너희에게도 좋을 것이다.”
경재는 약초 물로 손을 두 번 씻고 중문 안으로 돌아갔다.
추선은 황선에게 죄인들의 뒤처리를 지시하고 호란과 한돌에게 왔다.
“이따가 식량을 구하러 남운관에 내려갈 것이다. 그 참에 가능하면 너희 가족을 데려올까 하는데.”
호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저, 정말요?”
“그럼 이 와중에 허튼소릴 하겠느냐. 호란 너는 동생 외엔 가족이 없었지. 한돌은 어떠냐? 책임진 사람이 있나?”
“없소.”
“그럼 호란네 동생만 데려오면 되겠군. 머물던 곳이 어디냐?”
호란은 얼른 주소를 말했다. 자꾸 목소리가 떨렸다.
“언제 가나요? 지금 가나요? 저도 같이 갈래요!”
“윗전께서 향후를 논의하신 다음에나 움직일 것이다. 너희는 무얼 좀 먹고 눈이라도 붙여두어라.”
“안 졸려요!”
호란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억지가 아니었다. 체력이 좋은 하늘인에게 두세 밤 정도 새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추선은 고개를 저었다.
“윗전의 명이 떨어져야 한다. 대열에 뽑히고 싶으면 쉬어두어라.”
“네….”
한돌이 호란의 어깨를 말없이 두드렸다.
둘은 행랑을 향했다.
그 뒷모습을 잠시 보던 추선은 몸을 돌렸다.
닫힌 중문을 조금 열고 안으로 드니 주대청에 시현과 경재가 있는 것이 보였다.
시현은 의자에 앉아 얼굴을 두 손에 묻고 있었다.
경재는 곁에 서서 아들을 책하는 중이었다.
“그것이 과하면 어찌하면 좋았겠느냐? 하늘족을 묶거나 가둬둘 방도라도 있느냐? 아니면 폭도를 이끌고 돌아올 것이 뻔한데 내보내야 하겠느냐? 설마, 죽이는 것이 더 자비롭다는 것이냐?”
시현이 대답을 못 하자 매서웠던 경재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그가 약간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시야. 나는 비록 방법이 없어 이리하였지만 네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외려 네가 옳을 것이다. 법력의 소실에 대해서도 결국 네가 걱정한 바가 옳지 않았느냐.”
경재는 눈매에 안타까움을 가득 담고 시현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방금 죄인의 잘린 발목을 싸맸던 두 손으로 아들의 뺨을 다정하게 감쌌다.
“어렵고 힘든 때이니 너는 본래 믿던 바를 더욱 굳게 믿고 지켜나가야 한다. 그래야 꺾이지 않을 수 있어. 어미를 모질다고 욕해도 좋고 어미와 다퉈도 좋다. 부디 네가 믿는 대로 말하고 행하거라.”
“어머니….”
그러나 경재는 곧 허리를 펴고 표정을 바꾸었다.
그의 얼굴에 서릿발 같은 냉랭함이 돌아왔다.
그가 아들에게 말했다.
“다만 나 역시 더욱 내가 믿는 대로 할 것이다. 네가 막으면 다툴 것이다. 나 역시 이 같은 때에 꺾이지 않아야 하느니.”
경재가 거만한 태도로 우측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 뒤에 추선이 뒷짐을 지고 쇠기둥처럼 시립했다.
그 모양을 멍하니 보던 시현은 다시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 시종이 대청 아래 와서 고했다.
“순의 어른과 화예 어른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오라 해라.”
경재가 답했다. 시현은 고개를 들고 자세를 바로 했다.
곧 두 명의 땅인이 협문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단이 따랐다.
“문과 인을 뵙습니다.”
땅인들이 읍을 했다. 단은 뒤에서 엎드려 절했다.
화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문께서 이르신 대로, 지금도 미량이나마 남은 법력이 북쪽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제 기향계 여럿을 두고 밤새 지켜보니 땅 위에 놓은 기향계가 북쪽을 향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기향계는 법력의 흐름을 감지하는 도구였다.
본래는 아직 기운을 못 읽는 아이들이 공부할 때, 혹은 학자들이 연구할 때나 쓰는 도구였으나 지금은 거기에라도 의지해야 했다.
시현이 물었다.
“지금도 땅 아래서 미약한 기운이 북쪽을 향해 움직이는데…. 느껴지지 않는가?”
화예와 순의가 난처한 듯 시선을 마주쳤다.
“아마 그것은 문께서 지니신 절군한 감각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으로….”
경재도 고개를 저었다.
“나도 지금은 모르겠소. 다만 처음 법력이 사라졌을 때, 하늘 위와 땅 아래서 헤아리기 어려운 기운이 남운관 정북향으로 몰려가는 것을 느꼈소. 그 기세가 사람의 지배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었소.”
“그것은 저희도 느꼈습니다. 아마 기감 있는 땅인이라면 모두 느꼈을 것입니다.”
시현이 말했다.
“괴인이 술책을 부려 법력을 북쪽으로 몰아갔으니. 틀림없이 그곳에서 꾀하는 바가 있을 터. 나는 기운의 흐름을 따라 북쪽으로 가려고 생각하오. 기운이 종착한 장소에서 괴인의 종적도, 법력을 되돌릴 방법도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소.”
경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으로선 그것이 유일한 단서요. 문을 의지하여 정북쪽을 향하는 것이 옳지 않겠소. 허면 일행을 어떻게 꾸리면 좋을까?”
경재의 물음에 순의가 나서서 답했다.
“얼마나 먼 길이 될지 모르니 물과 식량을 최대한 꾸려간다 해도 가면서 계속 보급을 해야 할 것입니다. 머릿수가 많으면 좋지 않습니다. 그래도 황야를 돌아다녀야 하니 유능한 길잡이 하나는 꼭 필요합니다.”
순의는 뒤에 있는 단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제가 저 단이란 백성과 문답을 해보았는데 천문과 지리에 견식을 두루 갖췄고 대답에 막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남운관에 오기 전에는 방랑 상단 노비로 지내면서 세상을 돌아다녔다 합니다. 능히 천 리 길에 길잡이로 쓸 만합니다.”
“그것은 잘되었소.”
경재는 단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다시 순의에게 물었다.
“호위는 얼마나 필요하겠소?”
“말씀드렸듯이 수가 너무 많으면 보급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거석을 만날지 모르니 땅인 수보다는 호위의 수가 많아야 할 것입니다.”
“땅인이 늘수록 호위도 늘겠구나. 어떻게 한다.”
경재가 고민하는데 시현이 말했다.
“땅인은 나 혼자 가는 게 좋겠소.”
“무슨!”
“아니 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