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42
142화
* * *
주문은 짧았다. 두꺼운 껍데기 밑, 거석의 내부에서 치직치직 소리가 났다.
거석 몇 개에서는 작게 불꽃과 전광도 튀었다.
그게 다였다. 여덟 개의 거석들은 시현이 가리킨 순서대로 차례차례 주저앉았다.
구체가 쿵 쿵 바닥에 구르자 껍데기 틈새로 연기와 탄 냄새가 솟았다.
그럴싸한 폭음 한 번 없었지만 네 발 거석들이 완전히 무력화된 것은 분명했다.
“…….”
호란은 다소곳이 시현을 땅에 내려놓았다.
좀 허무하기까지 한 마무리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호란이 굳어만 있자 시현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왜 그리 놀랐느냐? 방금 것은 무어 특별한 주문이 아니다. 이제껏 쓰던 법술과 똑같은 것이다.
먼저 거석의 기운이 흐르는 형을 읽어내고, 갑주 틈새로 마력석의 기운을 흘려넣고, 거석 내부의 기운을 공명시켜 기결을 파하는 것이다. 호란 네가 시간을 많이 끌어준 덕택에 기운의 자락을 하나하나 심을 여유가 넉넉했단다.”
시현은 넓은 소맷자락에 손을 넣어 아까 넣어둔 마력석 중 두 개를 끄집어내더니 타버린 하나를 땅에 버렸다.
“처음 상대하는 종류이고 수도 적지 않아 다소 긴장했는데, 그래도 넷까지는 필요가 없었구나.”
“어, 음, 네….”
호란은 맞장구를 치기도 이상해서 입 속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어제 다천관 법군 나리들은 여덟 명이서 주문을 펑펑 쏴서 네 발 거석 두 마리를 부쉈다.
방금 시문 님은 마력석 두 개로 같은 놈 여덟 개를 부쉈다.
소매에서 꺼낸 마력석 하나를 아직 손에 든 것을 보면 한 개만 쓴 건지도 모른다.
응. 아픈 거 나 다으셨고 후유증도 하나도 없으시구나.
그리고 다른 땅님들을 시문 님하고 비교하는 건 죄송한 일이구나.
시문 님이 아니라 그분들한테 죄송하다. 뭐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여하간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시현은 매무새를 고친 다음 맨 마지막에 쓰러진 네 발 거석을 향해 걸어갔다. 호란도 정신을 차리고 뒤따라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거석의 껍질 틈새로 아직 기운이 상당히 솟고 있었다.
다리 한 짝이 당장 움직일 것처럼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고 호란은 바로 앞을 막아섰다.
“시문 님! 이놈 아직 다 안 죽었어요!”
“그래. 일부러 남겨둔 것이다. 조금 살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지금도 내가 제압하여 기운을 눌러두고 있으니 염려 말거라.”
시현이 손안에 반쯤 탄 마력석 하나를 보여주며 말했다.
그는 쓰러진 거석의 주위를 몇 발짝 돌며 호기심 어린 표정을 했다.
“신기한 일이다. 거석 주위에… 일종의 지배력이 작용하고 있구나. 마치 주문으로 기운을 잡아놓듯이, 기운이 일정 범위 밖으로 흐르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그 바깥에서 거석의 기운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무슨 벽 같은 게 있는 건가요?”
“조금 다르다. 범위 밖에서 안으로 기운이 흐르는 데는 아무 장애가 없다. 주문을 쏘아넣는 데에도 방해가 없다. 다만 안에서 밖으로 기운을 빼내기는 쉽지 않다.
방금 전 내가 주문을 쓸 때도 그랬다. 범위 안쪽에서 기운의 가닥을 심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거리가 벌어지니 연결을 계속 유지하기가 상당히 어렵더구나.”
호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에 관한 한, 시현이 무엇을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시문 님 마법을 방해했다는 거예요? 이 거석들이요?”
“그 점이 신기하다는 것이다. 제 몸 밖의 기운을 다루는 데에는 고도의 지능과 의지가 필요하다. 돌 인간이면 모를까, 이런 거석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을까?”
시현이 골똘한 얼굴이 되었다. 호란이 머리를 긁적였다.
“음, 잘 모르겠지만… 이 두꺼운 껍질이 뭔가 하는 게 아닐까요? 그게 제일 특이한 점이잖아요.”
“그렇겠지.”
“그럼 한번 뜯어보죠! 껍데기에 뭐가 있든가, 아니면 그 안에 뭐가 있겠죠!”
호란은 씩씩하게 앞으로 나섰다. 시현은 눈을 조금 크게 했으나 말리지는 않았다.
거석의 다리는 아직도 떨리고 있었으나 그 이상 움직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석에게 손을 뻗은 순간, 호란의 등줄기에 오싹한 느낌이 달렸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곁에 섰던 시현의 허리를 끌어안고 사력을 다해 반대편으로 뛰었다.
등 뒤에 구른 둥근 거석들의 내부에서 강렬하고 파괴적인 기운이 솟고 있었다.
시현도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호란의 어깨 위로 손을 뻗으며 외쳤다.
“명한다. 강벽으로 두르라!”
직후 여덟 개의 거석이 일제히 폭발했다.
굉음이 터지고, 시현이 둘러친 방어막 위로 폭풍처럼 화염이 밀어닥쳤다. 석갑 파편이 날아와 투명한 장벽에 쾅쾅 부딪혔다.
공터 반대편 끝까지 물러난 호란은 자욱한 폭연 너머를 노려보며 시현을 땅에 내려놓았다.
시현도 굳은 얼굴로 새 마력석을 꺼냈다.
열기와 흙먼지 뒤로 쿵쿵 하는 네 발 거석 몇 구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시야가 트이자 공터는 난장판이었다. 조각나 흩어진 거석의 껍데기만 천천히 사그라지며 재로 변하고 있었다.
그 건너편, 쑥대밭이 된 숲으로부터 네 발 거석 세 놈과 사람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가 숲 어귀에서 발을 멈추자 거석 셋도 따르듯이 움직임을 멈췄다.
“돌 인간이에요!”
굳이 호란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옅게 회색 기 도는 피부에 생소한 복장. 전형적인 돌 인간의 모습이었다.
상대는 키가 크지 않았다. 숱 많은 적동색 머리칼을 뒤로 꽉 묶었고, 색유리로 된 커다란 풍안경이 얼굴 절반을 덮고 있었다.
뒷굽 달린 장화와 무릎 길이 치마는 검은 색이었다. 큰 주머니가 달린 겉옷이 눈에 띄었다.
상대가 산지사방으로 솟구친 앞머리를 긁적이며 부루퉁한 소리를 냈다.
“양심 너어무 없네.”
그는 잠이라도 덜 깬 듯한 표정이었다. 발음도 약간 웅얼대어 소리가 명확하지 않았다.
풍안경의 돌 인간이 다시 말했다.
“그렇잖아. 허락도 안 받고 남의 제작물을 막 뜯어보고, 그러면 돼, 안 돼? 연구 윤리 너어무 없는 거 아냐? 마법사도 그 뭐, 학자나 연구자 비슷한 거잖아. 학자적 양심, 도의, 지식 소유권, 이런 거 없어?”
“…….”
시현의 표정이 약간 흔들렸다. 그가 말했다.
“지금 우리는 너희와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통상의 구학 윤리나 개인의 양심에 우선하는 일이 있다.”
돌 인간이 피식 웃었다.
“무얼 전쟁까지…. 너희는 스스로를 너무 거창한 존재로 여긴단 말이야. 너희 같은 거하고 전쟁은 무슨?”
그가 처음으로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이건 그냥 살처분이지.”
호란은 울컥 분노가 솟았다. 반대로 시현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다.
시현이 짜증스러운 투로 말했다.
“한쪽만 하거라. 우리를 네 뜻대로 처분할 대상으로 여긴다면 대체 왜 도의니 윤리를 입에 담느냐? 사람이 제 뜻으로 제 삶을 결정할 수 있어야 윤리도 있는 것이 아니냐?”
“…….”
상대가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투덜댔다.
“진짜 녹렴 말은 틀리는 게 없다니깐. 난 절대 문과랑 말싸움하면 안 돼. …아니, 마법사는 이과인가?”
돌 인간은 겉옷의 큰 주머니에 손을 넣어 희고 납작한 패 같은 것을 꺼냈다. 그가 느슨하게 툭 말했다.
“말싸움을 안 할 거면, 살처분이지.”
허술한 태도 사이로 스며 나온 살기가 공터의 분위기를 바꿨다.
호란은 앞으로 한 발 나섰다. 돌 인간의 복장은 움직이기 나빠 보였지만, 외모나 몸에 도는 기세만 보면 이 녀석도 모들처럼 전투에 능할 가능성이 높았다.
직후 시현이 주문도 없이 손을 펼쳤다.
상공에 커다란 불덩이가 떠오르더니 네 무리로 갈라졌다.
다음 찰나에는 맹렬한 불꽃이 돌 인간과 거석을 덮칠 터였다.
풍안경의 돌 인간은 따분한 표정으로 손에 든 패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것만으로 시현이 만들어낸 불꽃이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아!”
호란은 놀라서 소리를 치고 말았다. 뒤쪽의 시현도 경악한 듯 숨을 들이켰다.
돌 인간이 빈정거렸다.
“매번 이렇게들 놀란다니까. 그까짓 마법 깨뜨린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인간의 지식이나 기술 따윈 원래 오류투성이잖아? 무슨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굴고 그래.”
시현은 여전히 동요한 채였지만 망연자실해 있지는 않았다. 그가 다음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잠든 맥, 축적된 순리여. 눈 뜨고 네 앞의 새 길을 보라.”
돌 인간은 슬쩍 웃고는 여유롭게 팔짱을 꼈다.
흰 패를 더 안 쓰고도 주문을 막아낼 수 있는 것 같았다.
호란은 만약의 상황을 생각해서 곁눈으로 도망칠 방향을 잡았다.
시현이 말을 맺었다.
“명에 따르라!”
주문이 끝났지만 공터 상공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돌 인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대신 가벼운 진동이 호란의 발바닥에 닿았다. 무슨 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돌 인간과 거석들의 발밑, 공터 건너편의 지면이 둥글게 내려앉았다. 빠진 바닥과 함께 세 거석과 돌 인간도 아래로 훅 추락했다.
“웍!”
돌 인간은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 구덩이를 벗어났다.
하지만 세 거석은 흙구덩이 밑바닥까지 빠지고 말았다.
구덩이는 그리 깊지 않았지만, 지면이 깨지면서 물러진 흙이 사방에서 쏟아져 거석들은 반쯤 파묻힌 꼴이 되었다.
돌 인간도 황급히 몸을 빼내다 중심을 잃고 구덩이 곁에 나동그라졌다.
그가 넘어진 채로 고함쳤다.
“이게! 잔머리나 굴리고!”
시현은 차분한 동작으로 굵은 마력석 여럿을 꺼내 들었다.
“너에 대해 몇 가지 알았다. 첫째 내가 어떤 주문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읽는 능력이 없고, 다음으로는 주문 사용을 방해할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구나.”
“까불지 마! 영역 더 넓게 할 수도 있거든! 어차피 다 막을 건데 그깟 마법 읽어서 뭐 해?”
돌 인간이 괜한 정보를 발설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화가 잔뜩 난 모양이었다.
시현이 말을 이었다.
“또한 그 영역이란 것은 오직 주문으로 조작된 기운의 흐름만을 방해한다. 중력이나 공기압 같은 물리 법칙은 영역 안에서도 그대로이겠지. 거석이나 인체 내부의 기운에도 영향이 없어 보인다.”
돌 인간은 더 반박하지 않고 입술만 작게 삐죽였다.
반면 호란은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시현의 말이 어려워져서가 아니라, 그 사이 흙구덩이 속 거석들이 계속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놈들은 사방에 다리를 박고 흙을 밀어내며 발버둥쳐 이제는 거의 구덩이 밖까지 몸을 빼내고 있었다.
호란이 안달하는 걸 눈치채고 시현이 살짝 웃었다.
“안 것은 몇 가지가 더 있는데… 제일 중요한 건, 음. 그냥 보여주마.”
시현이 눈을 감았다.
마력석 더미를 받쳐 든 두 손이 천천히 앞으로 올라갔다.
호란은 숨을 크게 삼켰다.
바람도 없는데 소매가 흔들리고, 굵은 마력석들이 형을 잃으며 옅은 금빛을 흘렸다.
“명한다. 강벽으로 둘러치라.”
발해진 주문은 거석의 폭발을 막을 때 썼던 것과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 장벽이 둘러싼 것은 두 사람이 아니었다.
구덩이에서 겨우 빠져나온 거석 세 개가 와지끈 소리를 내며 서로 충돌했다.
바닥을 긁으려던 다리가 허공을 휘저었다.
세 개의 거석은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갇힌 채 낮게 공중에 들려 있었다.
돌 인간이 손에 쥔 패와 공중에 뜬 거석을 번갈아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어, 어떻게!”
“열파하라!”
외침과 함께 세 구의 거체가 박살났다.
산을 통째로 울리는 폭음과 함께 짜개어진 파편이 쏟아져 내렸다.
주먹 크기도 안 될 만큼 철저하게 산산조각난 돌 조각과 금속 조각이 공터에 굴렀다.
단단하던 겉껍질도 몸체와 구분이 안 갈 만큼 조각이 났다.
시현이 진중하게 말했다.
“보아라. 묘리가 깊은 기술이긴 하나 역시 힘으로 깨면 깨어지는구나. 한계가 있는 기술이란 뜻이다. 이건 보기보다 중요한 발견이다.”
“네에.”
호란은 이럴 때 자기가 대답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가 항상 고민이었다.
어차피 지금 시현의 말은 꼭 호란 들으라고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공터 건너편에서, 풍안경의 돌 인간이 찌르는 듯한 눈초리로 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현이 빙긋 웃으며 상대와 눈을 맞췄다.
“왜 그리 놀랐느냐? 하늘이 무너진 것도 아니거늘.”
돌 인간이 다시 입을 삐죽였다. 그가 화난 건지 누그러진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꼭 그렇게 말꼬리를 잡아서 꼽을 줘야 해? 치사하게시리.”
“치사하게 느껴진다니 잘되었구나. 이왕 심술을 부리는 것, 그 정도는 되어야지.”
호란은 무심코 적에게서 시선을 떼어 시현의 얼굴을 보았다.
시현은 여전히 미소 지은 채였으나 눈에도 목소리에도 뚜렷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 정도 심술은 받아주거라. 내가 잣던 주문을 파훼당한 건 스승님께 사사한 후로 처음이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