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43
143화
* * *
호란은 놀라지는 않았다.
그건 이제까지 시현이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감정이었지만, 시현 같은 사람에게 없을 리가 없는 감정이기도 했다.
그는 숨길 마음도 없이 호승심을 사르고 있었다.
시현이 뚫어져라 상대를 보며 말했다.
“돌 인간, 이름을 대라.”
“감히….”
상대는 짧게 불만을 드러냈으나 곧 태도를 바꾸어 대답했다.
“나는 감람이다.”
그의 음성엔 이제 처음의 무성의한 투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감람이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너 누군지 알 거 같아. 아마 네가 시문이겠지.”
“그렇다.”
“응. 금강이 그랬거든. 최근 백 년간 만난 인간 중에서… 시문이 제일 꼽주기 천재더라고.”
“그거 아니지! 마법 천재지!”
호란이 버럭했다. 의외로 감람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것도 그렇겠지. 내가 운이 없네. 가급적 조용하게 볼일부터 보고 싶었는데, 초입부터 이 난리가 나고.”
“…….”
난리라는 말이 나온 직후 시현의 시선이 짧게 주위를 흩었다.
그 행동을 보고 호란도 시현이 무엇을 떠올렸는지 눈치챘다.
감람과의 충돌은 격했다. 산이 다 울리는 폭음이 터지고 공중에 불꽃도 피었다.
그런데 달려오는 순찰병이 없다. 하늘에 오른 신호탄도 없다.
감람이 벌써 순찰병을 다 죽였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한두 무리도 아닌데, 그랬으면 시문 님이 전투의 기색을 느꼈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했다. 좋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 씨. 진짜 운 없어. 꼭 이럴 때 시문이랑 얽히냐. 원래도 싸우기 귀찮았는데 만나 보니까 더 싸우기 싫네.”
감람은 짧게 투덜거리더니 두 손으로 패를 잡고 시현을 보았다.
“하지만 제일 운 없는 건 너지. 내가 다른 동료들보다 강한 건 아니지만, 너한테는 천적이니까.”
흰 패 위에서 감람의 손이 움직였다.
호란은 긴장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시현의 안색은 휙 바뀌었다.
시현이 주먹을 꽉 쥐고 감람을 쏘아보자 상대가 미소 지었다.
“내가 말했지? 영역의 범위는 늘릴 수 있다고. 그리고 강도도 높일 수 있거든.”
감람이 패를 들어 보였다.
“이제 이 산 전체가 강제정렬영역에 들어갔어. 이 안에선 아까처럼 마법을 못 쓸걸.”
시현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방금 그 영역을 뚫어 보였다.”
“그리고 난 방금 영역의 강도가 올라갔다고 말해줬고.”
감람이 씩 웃었다.
“한 번 해볼래? 있는 마력석 다 써봐. 네 마법이 나한테 닿는지 안 닿는지. 결과 보고 다시 얘기하자.”
시현의 의견은 모르지만 호란은 결과를 기다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호란은 순식간에 공터를 건넜다. 그의 주먹이 풍안경 위로 감람의 안면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악!”
감람이 신음을 냈다.
그는 정타를 먹고도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쳤을 뿐이었다.
호란은 옆으로 돌면서 감람의 옆구리를 거세게 걷어찼다.
하지만 이번에도 감람은 쓰러지지 않았다. 굽 있는 장화를 신은 발목이 휘청 꺾였는데도 다른 발에 힘을 주어 중심을 잡고 있었다.
“아이 씨!”
감람이 짜증에 차서 호란에게 팔을 휘둘렀다. 어설픈 자세인데도 속도는 엄청났다.
호란은 구르듯이 물러났다. 제대로 주먹도 안 쥔 손이 코앞을 스치는데 공기가 찢기는 선뜩한 소리가 났다.
감람은 잔뜩 금 간 풍안경을 벗으려고 했지만 호란이 곧바로 다시 덤볐다.
올려 찬 발끝이 향한 것은 감람이 쥔 흰 패였다.
손목을 강하게 가격당한 감람은 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붙들어야 했다.
“악. 이게 진짜!”
잔뜩 짜증이 난 감람도 호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호란은 어렵지 않게 공격을 피하고 다시 주먹을 날렸다.
감람의 팔다리엔 다른 돌 인간들 못지않은 완력이 담긴 것 같았다.
육체는 강력하고, 힘도 속도도 있다. 동체시력도 좋아 보였다.
하지만 움직임만은 영 어설펐다. 싸우거나 때리는 법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호란이 계속 패를 쥔 손을 노리자 감람의 동작은 더 엉망이 되었다.
패를 쥔 손만 몸 뒤로 빼고 엉거주춤하게 한 팔을 휘두르는 게 어린애 장난질만도 못했다.
감람이 짜증스럽게 소리질렀다.
“이거 부숴 봤자 소용없거든! 이건 영역 생성기가 아니라 조종 장치야! 뺏든 부수든 영역은 멀쩡해!”
호란은 감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지만 관심도 없었다.
그는 감람의 뒤쪽으로 돌아가려는 척하다가 방향을 바꿨다.
호란에게 뒤를 안 주려고 허겁지겁 몸을 돌리던 감람의 허리 왼쪽이 텅 비었다.
호란은 노리던 자리에 정확하게 일격을 꽂았다.
공터에 울린 쾅 소리는 감람의 몸에서 난 것이 아니었다.
감람의 허리께, 호란이 노린 바로 그 자리에 작은 금빛 방패가 나타나 호란의 주먹을 가로막고 있었다. 녹렴이 만들었던 방어막과 비슷했다.
감람은 혼비백산해서 뒤로 물러났다. 혼신의 공격이 무산된 호란도 한 발 빠져서 숨을 가다듬었다.
“바, 방호복 없었으면 큰일날 뻔했네….”
감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호란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기결 위치를 알았지? 방호복의 교란 기능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데.”
기분이 난처해진 호란이 물었다.
“음, 저기, 왜 그렇게 다 말해주는 거야? 아니, 말 안 해줘도 어떻게 알 것 같기는 했는데….”
감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빽 소리쳤다.
“도발하지 마!”
“도발 아니고. 진짜로 이상해서 물어본 건데….”
공터 저편에서 둘을 보고 있던 시현이 딱하다는 투로 말했다.
“무엇 하러 너를 도발하느냐? 도발하지 않아도 충분히 산만한 것을. 너는 우리가 이제껏 만난 적 중에 가장 집중력이 없다.”
“너랑은 더 말 안 해!”
감람은 시현에게 소리치고서 이번에는 호란 쪽을 보았다.
“너랑도, 이제 안 싸워!”
감람이 몇 발 물러서서 흰 패를 치켜들었다.
건너편 숲에서 포성 같은 소리가 울리고, 커다란 구체 둘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쿵 쿵 소리를 내며 공터에 처박힌 것은 다리를 접은 네 발 거석이었다. 위치가 시현에게서 멀지 않았다.
호란은 포성을 듣자마자 시현 쪽으로 뛰었다.
“호란! 감람이 먼저다!”
시현이 외쳤지만 호란은 듣지 않고 시현을 끌어당겨 제 뒤로 보냈다.
“마법 못 쓰시잖아요! 저한테는 시문 님을 지키는 게 먼저예요!”
눈앞의 두 놈만 문제가 아니었다. 멀리서부터 다른 거석들이 나무를 꺾고 땅을 울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도망칠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감람이 거석을 불러모을 것은 예상한 바였다.
관건은 거석 무리가 도착하기 전에 뭐라도 상황을 바꿀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호란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남은 패가 한 장 있었다.
감람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도망칠 생각도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이 산에는….”
호란은 불필요하게 시선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숨을 죽였다. 시현이 시선 관리를 잘 하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짧지만 긴 찰나가 지나고,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다.
감람의 손에서 튕겨나간 사각패가 허공에 높이 떴다.
“와, 이게 맞네.”
둔덕에 무릎을 꿇은 단이 장총을 올리며 감탄했다. 다만 호란도 감람도 그 말을 들어줄 겨를은 없었다.
감람은 총성이 난 곳을 쳐다볼지 패가 날아가는 곳을 쳐다볼지 결정하지 못하고 찰나를 허비했다.
한 발 먼저 달려간 호란이 허공에 뜬 패를 낚아챘다.
“호란! 패를 이리로!”
“악! 이게!”
시현과 감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순식간에 달려온 감람이 할퀼 듯 호란에게 손을 뻗었다.
호란은 공중에서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하면서 동시에 패를 던졌다.
패는 겨냥대로 시현의 반보 앞에 날아가 땅에 살짝 박혔다. 시현은 망설이지 않고 패를 주웠다.
엉거주춤 땅에 내린 감람이 악을 썼다.
“너희가 그거 가져도 소용없다고! 얘들아! 짓밟아버려!”
“시문 님! 도망치세요!”
호란은 시현을 향해 뛰면서 외쳤다. 두 거석의 거리가 시현과 가까워 제 때 닿으리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시현은 도망칠 기색이 없었다. 그는 손에 든 흰 패를 들여다보며 손가락으로 만지고 있었다.
“시문 님!”
다급하게 외치던 호란은 상황이 이상한 걸 깨닫고 발을 멈췄다. 두 거석은 감람의 명령을 받았는데도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점점 가까워지던 다른 거석의 발걸음 소리도 멎어 있었다.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시현이 작게 말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손가락이 패 위에서 무엇을 그리듯이 움직였다.
멈춰 있던 두 거석이 철컹 움직였다. 하지만 두 놈은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놈들은 얌전히 뒤로 물러나더니 공터를 가로질러 숲 속을 향했다.
숲 너머 다른 거석들의 발소리도 다시 멀어져 갔다.
쿵쿵대는 울림은 모두 산 깊은 곳의 한 방향을 향하는 것 같았다.
몇 번 더 패 표면을 만진 시현이 긴장이 풀린 것처럼 한숨을 뿜었다.
“됐다. 거석은 전부 돌려보냈고, 그 정렬영역이라는 것도 완전히 해제했다. 용케 다 기억했구나. 이번만은 나도 나를 칭찬하고 싶다.”
“어…. 네….”
호란은 영문을 모른 채 대답했다. 둔덕 위의 단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물론 가장 놀란 건 단과 호란이 아니었다. 공터에 멀거니 선 감람은 넋이 다 나가 보였다.
이제 방해하는 사람도 없는데 금 간 풍안경을 벗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그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시현을 가리켰다.
“너… 너…. 언약자였어? 아니, 언약자의 후손이었어?”
시현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그가 낮게 말했다.
“아닐 것이다. 그 언약자란 것이 누구를 말하는지 확신은 없다마는.”
“그런데 어떻게 열쇠 쓰는 법을 알아!”
감람이 언성을 높이더니 풍안경을 벗어 홱 땅에 팽개쳤다. 경악이 지나가자 격분이 몰려온 것 같았다.
“인간이 이렇지! 비밀을 다 퍼뜨렸군! 약속을 지키는 법이 없어! 갈아버릴 것들!”
그는 이를 갈며 땅을 구르더니 시현에게 삿대질을 했다.
“약속을 깬 이상 너희는 그걸 사용할 권리가 없어! 대가를 치를 줄 알아!”
말이 끝난 순간 감람의 몸이 빛을 내며 폭발했다. 누가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었다.
“시문 님!”
눈을 찌르는 빛 때문에 시야가 가물해진 채 호란이 소리쳤다. 다행히 바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다. 빛과 소리만 컸을 뿐이다.”
호란은 눈을 비비면서도 안도했다. 곧 둔덕에서 단이 뛰어 내려왔다.
“호란! 나리님! 다친 데 없으세요? 와 씨,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단이 질린 얼굴로 감람이 폭발한 자리를 보았다.
회색 돌무더기가 내려앉은 주변에 옷가지 같은 것이 재가 되어 사그라지고 있었다. 금속 타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호란이 머뭇대며 물었다.
“죽은… 건 아니겠죠?”
“아니다. 본신이 땅 밑으로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도망간 거예요?”
“그래. 하지만 방법이 극단적인 걸 보면 기력의 소모가 컸을 것이다. 당장 되돌아올 것 같지는 않다.”
시현이 말하면서 손에 들었던 흰 패를 대련 안에 넣었다. 호란도 퍼뜩 생각이 돌아와서 질문을 쏟았다.
“맞다! 시문 님, 그 패 뭐예요? 쓰는 법 어떻게 아신 거예요? 거석들은 다 어디로 갔어요?”
“아….”
시현은 뭔가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가 지친 듯 한숨을 토하고는 말했다.
“얽힌 일이 많고 복잡해서. 그건 지금 당장 할 이야기가 아니구나. 거석 무리도 당장은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일단 돌아가자.”
단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네? 다천관으로 돌아갑니까? 금표 구역 탐색은 어쩌시고요?”
“돌 인간도 만났고, 당장 알아야 할 것은 알았다. 일이 생각보다 복잡해졌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단은 탐탁찮은 얼굴이 되었다.
“일이 복잡해졌으니 조금이라도 더 조사를 해놔야 하는 게 아니고요? 이번 같은 기회는 다시는 안 올 텐데요. 이제껏 관군이 안 몰려오는 게 더 수상해요. 당장 군이 어떻게 움직일지 모릅니다.”
“그럼 더 빨리 내려가야지. 당장은 다천관군과 마주하고 싶지 않다.”
시현은 옷을 털더니 단을 돌아보았다.
“길을 잡아다오. 단. 어디로 가야 남의 눈에 띄지 않겠느냐?”
단은 살짝 인상을 썼지만 더 말하지 않고 앞길을 걷기 시작했다.
호란은 얼른 둔덕에 올라가서 단의 짐을 가져오고, 시현에게서도 대련을 건네받았다.
호란의 손에 대련이 건너갈 때 시현은 살짝 눈을 피했다.
호란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올 때 묵직했던 대련이 놀랄 만큼 가벼웠다.
“시문 님, 저기….”
시현이 빨리 말했다.
“다 쓴 건 아니란다. 대련 안에 아직 성한 것도 꽤 들었다. 아, 소매 안에도 있고.”
그 말만 하고서 시현은 얼른 단의 뒤를 따라갔다.
호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문 님… 그 영역인가를 깰 때, 정말 원 없이 힘으로 지르셨구나.
두 번째 영역 못 깬 게, 영역이 더 강해져서가 아니라 마력석 모자라서였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럼 지금 돌아가자고 하시는 것도 마력석 없어서인가? 설마.
아무렴 그 정도로 앞일을 생각 안 하셨을 리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문 님이. 이렇게 중요한 상황에….
설마.
호란은 더 생각을 안 하고 천천히 걸었다.
이젠 시현을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