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46
146화
* * *
시현이 답했다.
“어찌 알겠느냐. 소문이 있던 것도 몰랐는데.”
“그때 강학회 동기라 봐야 스물 몇 명밖에 안 되지 않습니까. 막상 좁혀 보면 꽤 뻔할 텐데요.”
“맞아요, 찾아봐요, 시문 님!”
호란이 적극적으로 호응했지만 시현은 그리 관심이 없어 보였다.
“놔두어라. 별일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명백한 악의가 보이는데요. 신경 안 쓰이세요?”
“안 쓰인다. 악의란 의외로 흔한 것이고, 뚜렷하게 해 되는 행동으로 이어지지만 않으면 하나하나 단속할 것은 없다.”
시현이 단에게 시선을 스치며 슬쩍 웃었다.
“너도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남이 보면 빈정 상하는 사람이라고. 그때 누군가가 빈정이 상했었나 보지.”
단은 말문이 막혔다.
호란이 눈썹을 요철이 생길 정도로 일그리며 단을 보았다.
“단, 어른 주제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호란의 시선에 환멸이 뚜렷했다. 단은 속이 좀 아팠다.
저 자식이 잔잔하고 하찮은 과거를 딛고 일어서서 드디어 일러바치기를 습득했구나. 성장이라면 성장이지. 축하한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온성이 돌아왔다.
시현이 말했다.
“오셨는가. 헌의는 잘 돌아갔는가.”
“예.”
온성은 늘상 싱글거리던 평소와는 달리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방문을 닫고 시현 앞에 다가왔다.
눈치를 본 단이 호란을 끌고 시현 곁에서 떨어졌다.
온성이 자세를 바로 하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불초 방씨가 위 없는 이를 뵙습니다. 감히 만인지상을 허술한 누옥에 모신 무례를 용서하소서. 무람한 마음을 어찌 감당할지 모르겠습니다.”
시현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네. 내내 신세를 졌는데 새삼스럽게. 그대도 부디 거리끼지 말고 이전처럼 편하게 대해주었으면 하오.”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온성이 허리를 피고 빙긋이 웃었다. 시현이 민망한 듯이 말했다.
“이제 돌아보면, 그대는 전부터 내가 누군지를 눈치채지 않았는가. 어떻게 알아보았는가?”
“지내다 보니, 어렴풋하게….”
온성이 얼버무렸다. 단만 혼자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만나자마자 알아보았다는 말을 안 하는 게 저 할아버지의 상냥함이었다.
온성은 시현 앞에 무릎을 꿇더니 정중하게 말했다.
“베푸신 너그러우심에 어리광 부리기 전에,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하게.”
온성은 말하기 전에 잠시 숨을 삼켰다. 음성이 결연했다.
“감히 망언을 입에 올립니다. 지씨옥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 정녕 사실입니까?”
시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새삼스러운 화제에 호란과 단도 온성을 쳐다보았다.
지씨옥이라면 하유관의 금탑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마력석이다. 하유관의 모두가 그 위력을 목격했으니 다천관까지 소문이 닿은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시현이 대답했다.
“사실이다.”
“그렇습니까. 결국….”
온성의 목소리가 얕게 떨렸다. 그가 다시 물었다.
“하유관 총치가 스스로의 뜻으로 한 일입니까?”
“그렇다. 하유관에 돌 인간의 대군이 침범하여 공방하는 데 사용하였다.”
지씨옥이 사용되었다는 말을 들은 순간 온성은 짧게 눈을 감았다.
그가 탄식하듯이 말했다.
“허면 그 돌은 이제 세상에 없는 것이로군요….”
“그러하다.”
“알겠습니다. 경우 없는 호기심을 용서하소서.”
온성은 그것으로 이야기를 맺으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현이 질문했다.
“말투를 보니 그대는 그 물건이 휘무의 손에 있음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듯한데. 어찌 된 일인가?”
온성이 머리를 숙였다.
“몰염치한 노인네가 소문을 좋아하다 보니 들어선 안 될 말까지 들었습니다. 부디 용서하소서.”
시현의 표정이 엄격해졌다. 그가 다그쳤다.
“소문이라니 말이 되는가? 정말로 비밀이 샜다면 일이 어찌 돌아갔을지 생각해 보라. 제아무리 휘무가 방비한들 금탑이 단 1년이라도 무사했겠는가?
지씨옥의 행방은 여덟 관성이 200년간 철저히 감춰 온 기밀 중의 기밀이었다. 30년 전 지씨옥이 봉인처를 나온 것 또한 감히 입 밖에 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씨옥에 관해 삿된 말을 퍼뜨리는 것은 대역에 당하는 중죄인데, 어찌 그리 쉽게 소문을 들었다 말하는가? 그 말을 책임질 수 있는가?”
“…….”
갑자기 날카로워진 시현의 태도에 호란은 자못 놀랐다. 단 역시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늘 천연덕스러운 온성도 당황한 듯 바로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
지씨옥 문제가 극비인 거야 당연하다. 허투루 말이 샜다면 관성 간에 전쟁이 나고도 남았을 물건이다.
하지만 지씨옥은 이미 써서 없어진 지가 한참인데, 이제 와서 그렇게 문제 될 일이 있을까?
시현은 여전히 엄한 기색을 거두지 않았다. 온성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노구의 변명이 길어질 듯합니다. 먼저 주위를 물려도 되겠습니까?”
“그리하라.”
온의는 방문을 열고 철보를 불렀다. 말이 있기 전까지는 유도 철보도 들어오지 말고, 아무도 집 주위를 기웃거리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호란은 자기도 나가야 하나 눈치를 보았지만 시현이 아무 말도 않기에 그냥 눌러앉아 있기로 했다.
온성이 돌아오자 시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그대가 그간 보여준 선의와 은정에 감사하고 있다. 그대에게 무슨 허물이 있은들 악의로 한 일이 아니라면 책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더욱 내 질문에 진실하게 답해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온성이 답하자 시현은 품에서 제 손보다 조금 더 긴 석판 하나를 꺼내 바닥에 놓았다. 감람이 사용하던 흰 패였다.
“묻겠다. 이 물건을 이전에 본 일이 있는가?”
패의 표면을 처음 제대로 본 호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은 거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길고 납작한 패의 양 끝에, 금속 선으로 그려진 동심원이 두 개씩 자리했다. 동심원 둘 사이를 구릿빛과 은빛 금속 선 몇 가닥이 잇고 있었다.
몇 번씩 직각으로 교차하는 선들이 우아한 문양을 지으며 빛났다.
누가 봐도 유가 전날 보여준 정체불명의 석판을 떠오르게 하는 모양새였다. 크기와 소재가 다르고, 유의 석판에 있던 복잡한 부속이 없을 뿐이었다.
온성 역시 경악한 얼굴이었다.
“문이시여, 이건, 이건, 설마….”
시현이 손을 들어 온성의 말을 막았다.
“내가 물었으니 그에 답하라. 나는 그대가 추측한 바를 묻지 않았다. 다른 것 아닌 바로 이 물건을 이전에 본 일이 있느냐 물었다.”
온성이 숨을 삼켰다.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남에게 들어서 안 바가 있는가? 그림이나 모형, 기록으로라도 본 일이 없는가?”
“없습니다. 단 한 번도.”
“그러면 장유가 지니고 연구하는 특이한 기물에 관해 묻겠다. 장유는 일전에, 그 기물에 대해서는 그대도 장유도 아무 연유를 모른다 말했다. 다시 묻겠다. 그 말은 참인가?”
“참입니다.”
“그대는 그 물건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참으로 몰랐는가? 추측조차 못 하였는가?”
질문과 답변이 거듭되는 동안 온성의 목덜미가 진땀에 젖었다. 그가 더듬더듬 답했다.
“못 하였습니다. 지금은 감히 아둔한 머리로 떠올리는 바가 있으나, 지난밤까지는 상상도 못 하였습니다.”
“무엇인지 전혀 짐작이 없는 채로 장유의 연구를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송구합니다만 그렇습니다.”
“알겠다. 믿겠다.”
시현이 몸을 약간 빼며 긴 숨을 내쉬었다.
팽팽하던 긴장이 한결 수그러들었다. 호란도 참았던 숨을 뱉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나아질 틈도 없이 시현이 흰 패를 가리켰다.
“이것은 지씨옥 봉인고의 열쇠다.”
온성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단도 정색이 되었다.
호란이 물었다.
“봉인고요? 지씨옥은 금탑에 숨겨뒀던 거 아니에요?”
“금탑이 세워진 것은 고작 31년 전이다. 그 이전에는 지씨옥이 어디에 있었겠느냐? 그리 엄청난 물건을 오래도록 숨겨두기가 쉬웠겠느냐?”
“아….”
시현이 패를 거두어 품에 넣고 설명했다.
“200년 전, 여덟 관성을 대표하는 여덟 명의 법술사가 손을 잡고 왕을 폐했다. 그리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왕가의 상징물을 영원히 묻어 버리기로 결정했다. 이후로 지씨옥은 역사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누가 어떻게 처분했는지 알려진 바가 없었다.
내가 내막의 일부나마 안 것은 남운관의 총치부 대리를 맡은 이후다. 남운관 총치부의 기밀고에, 지씨옥이 아주 특별한 비술로 봉인되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여덟 대표는 비밀리에 지씨옥을 봉인하고 여덟 개의 봉인고 열쇠를 나누어 가졌다. 그 봉인고는 사람의 이지를 넘은 비술로 만들어진 것이며 봉인고를 열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쇠 여덟 개가 다 모여야 한다. 또한 봉인고를 침범하려는 적을 막아낼 수 있도록, 각각의 열쇠에는 봉인지에 설치된 방어 시설과 법력진을 다스리는 비술이 각인되어 있다고 했다.
나는 기밀고에서 그 조작법을 읽고 남운관의 열쇠 또한 보았지만, 당시엔 그 비술이란 것의 실체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문 님이 그 하얀 패 쓰는 법을 알고 계셨군요….”
호란은 말하면서도 얼떨떨했다. 사실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문이 남아 있었다.
단이 어째선지 화를 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 좋은데요, 그럼 그놈의 열쇠를 왜 돌 인간이 갖고 있습니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긴 뭐가 알 수 없어요. 그 열쇠가 실제 나리님 뜻대로 동작하지 않았습니까. 홍은산 금표 구역에 감춰진 게 지씨옥의 봉인고고, 네 발 거석은 그 수비병이란 얘기잖아요.”
“알 수 없다. 남운관 기밀고에 있던 것은 열쇠와 그 사용법뿐이다. 나는 그간 봉인고의 위치조차 몰랐다.
본디 그 열쇠는 남운관 중시조 차씨 집안 가주가 계승하던 것이다. 총치부는 30년 전 열쇠와 사용법만을 전달받았다. 차씨 집안이 무엇을 더 알고 있는지는 모르나, 아버지나 나는 봉인고에 얽힌 앞뒤 사연은 전혀 몰랐다.”
“그러니까 이제까진 몰랐어도요, 지금 상황을 보면 뻔하게….”
단은 말하다 말고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가 물었다.
“지씨옥 봉인고를 돌 인간이 만들어준 거군요? 그리고 감람이 말한 언약자라는 게, 팔대관성의 여덟 중시조군요?”
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온성이 초조한 소리로 물었다.
“정말입니까? 이 열쇠를 진정 돌 인간에게서 얻으셨습니까? 금표 구역의 갑병… 그 괴이한 거석이, 모두 돌 인간이 놓아둔 것이었습니까?”
“내가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다천관에서는 오래도록 그 거석의 존재를 묵비했는데, 그러면서 돌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는가?”
“송구합니다만 정말로 몰랐습니다.”
온성이 머리를 숙이며 털어놓았다.
“홍은산의 금표 구역은 다천관 중시조 홍채호 인께서 안장된 홍릉이 있는 곳입니다. 예로부터 사방에서 거석이 날뛰어도 홍은산 방향에서는 거석이 온 일이 없어 중시조가 가호한다 말하곤 했습니다.
갑병에 관해 제가 처음 안 것은 30여 년 전입니다. 금표 구역을 지키던 병사가 네 발 거석이 보통 거석을 부수는 광경을 목격하고 보고해왔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함구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대대로 홍릉을 수호해온 석갑병으로, 선조의 비술이니 기밀을 지키고 소문을 엄금하라는 명이었습니다. 이득만 있고 해가 없으니 다들 큰 의문 없이 명에 따랐습니다….”
“돌 인간과 관련된 것을 정녕 몰랐는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노구는 변고 전까지 돌 인간의 존재조차 몰랐습니다. 소문으로도 글월로도 접한 바가 없습니다.”
대답을 듣고 시현이 한탄하듯 말했다.
“그대는 휘무가 봉인고를 열기 전부터 다천관 법군에 봉직하지 않았는가. 나보다 수십 년을 더 살았고, 세상 곳곳을 다니며 온갖 이야기를 듣지 않았는가. 그런 그대마저 아무것도 모른다 하면, 대체 이 일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온성은 더 깊숙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시현이 혼잣말처럼 말헸다.
“다천관은, 우리 중시조들은, 지씨옥을 처분하기 위해 돌 인간과 협력했는가? 선조들은 오래전에 돌 인간의 존재를 알고도 모든 것을 숨겨왔는가?”
목소리에 쓰라림이 진했다. 호란은 시현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태어나기도 전의 과거가 우리를 배신한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