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5
015화
* * *
다들 반대했으나 시현은 조목조목 이유를 댔다.
“법술을 쓸 수 없는 땅인이 여럿 가봤자 먹는 입만 늘릴 뿐이오. 다만 나는 지기를 느끼고 방향을 잡을 수 있으니 안 갈 수 없소. 나 하나에 길잡이, 하늘인 호위들로 일행을 꾸리는 게 최선이오.”
“시야!”
아들의 뜻이 굳음을 느낀 경재의 표정이 무너졌다.
사람들 앞임을 깨달은 그가 서둘러 태도를 가다듬었으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
“어찌… 그 험한 길에 문을 홀로 보내겠소….”
시현이 의자에서 내려와 경재 곁으로 갔다.
그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아들로서 말했다.
“길잡이가 있고 호위가 있으니 혼자가 아닙니다. 항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반민도 하늘족도 모두 우리 백성입니다. 남운관을 위한 일이니 모두가 성심으로 함께할 것입니다.”
“…….”
경재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가 물었다.
“네가 진정으로 그리 믿느냐.”
“그리 믿습니다. 흔들림 없이 믿습니다.”
“알았다…. 그리하여라….”
경재가 얼굴을 가리며 승복했다.
순의와 화예도 눈시울을 붉혔다.
시현이 도로 의자에 앉자 경재가 말했다.
“호위로 추선을 데려가거라.”
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됩니다. 곧 이곳에 피난민이 늘 텐데 하늘인을 지휘할 사람으로 추선만 한 이가 없습니다. 어머니와 남은 이들의 안위를 생각하면 추선을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경재는 반박하고 싶었으나 시현의 말에 틀린 데가 없었다.
순의와 화예를 보니 추선이 남는다는 말에 노골적으로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경재가 근심하며 말했다.
“달리 믿을 만한 호위가 누가 있단 말이냐.”
곁에 시립했던 추선이 허리를 굽혔다.
“어리석은 것이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시현이 말했다.
“이미 묻지 않고 말하는 것을 허하였다. 말하라.”
“호위로는 호란과 한돌을 데려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것이 좋지 않을까 하였다.”
“호란과 한돌이라니, 그게 누구냐?”
경재가 묻자 추선이 답하였다.
“어젯밤 사랑채 앞을 지켰던 두 사람입니다. 몸이 날래고 거석과 잘 싸우며, 무엇보다 위를 대함에 정성이 깊습니다.”
경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땋은 머리 아이는 혹시 내 행차를 가로막았던 아이가 아니더냐? 동생을 치료해 달라던….”
“맞습니다.”
추선이 답하자 경재의 안색이 흐려졌다.
“내가 치료를 거절했다고 원망을 품으면 어찌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이 잘되었습니다. 제가 남운관에 가서 식량을 구할 적에 그 아이의 동생을 데려오려 합니다.
마님께서 곁에 두고 보살피시다가, 법력이 돌아오면 동생을 치료해 주겠다 약조하시면 됩니다. 그 아이가 기뻐하며 몸과 마음을 다할 것입니다.”
“…….”
경재가 망설이다가 물었다.
“아프다는 아이가 이 난을 무사히 피하였겠느냐.”
“그 아이 거처가 하늘족 군인의 식솔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하늘족은 가족을 각별히 여기니 동네를 잘 지켰을 것입니다.”
“운이 닿았길 바라야겠구나.”
경재가 의자의 팔받침을 가볍게 쳐서 화제를 맺었다.
논의는 행장을 어떻게 차릴지, 남운관에서 무엇을 우선 가져올지로 넘어갔다.
종이 와서 호란과 한돌을 깨운 것은 서너 각이 지나서였다.
남운관에 내려간다는 말에 호란은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나갔다.
추선이 이미 나갈 채비를 다 차리고 대문간에 서 있었다.
평소 입던 긴 옷 대신 소매가 좁은 저고리에 짧은 가죽 배자를 입고 정강이에 행전을 맨 차림이었다.
허리에 찬 장식된 칼만 평소와 같았다.
뒤에는 내측 몫꾼 둘이 서 있었다.
추선이 말했다.
“뜻 같아선 너희를 남겨 윗전 곁을 지키게 하고 싶지만 너희 마음은 그렇지 않겠지.”
호란이 눈을 부릅뜨자 추선이 피식 웃었다.
“너도 갈 테니 정색 마라. 대신에 서둘러 다녀오자. 내가 열 살 넘은 이후로 내 큰오랍한테 무엇을 반나절 이상 맡겨둔 일이 없다.”
“헌데 그 대단한 내군 벼슬은 왜 그리 바리바리 맡겨두셨소.”
한돌이 빈정댔다. 추선이 크게 웃었다.
“하! 그거야 내 것이 아니니까 주었지! 내 것이면 주었겠느냐?”
“뻔뻔한 작자들.”
한돌이 대놓고 욕했지만 추선은 웃을 뿐이었다.
“다섯 명 임시 대열이다. 머리는 나다. 가자.”
다섯 사람은 쏜살같이 산을 내려갔다.
남운관에선 연기가 솟고 있었다.
웅장하던 성벽은 태반이 무너져 어디가 성문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성을 떠나는 피난민 행렬이 드문드문 보였다.
당장 돌아다니는 거석은 안 보였지만 각자 물길을 찾아내 물막이돌이 되었다는 뜻이라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걱정하던 장군석은 움직임을 멈춘 채 시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러나 몸 가운데 무늬가 빛을 내뿜고 있는 것을 보면 돌로 되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왜 멈췄는지는 모르지만 잘못 건드렸다간 도로 움직일 터였다.
“위치를 보니 놈이 우물 광장에 진을 친 것 같은데요.”
추선의 수하가 말했다.
우물 광장은 시에서 가장 큰 광장이었다.
큰 해시계를 가운데 두고 우물 세 곳에서 땅인의 마법으로 일 년 내내 물이 솟았다.
가구마다 물을 떠갈 수 있는 횟수가 정해져 있긴 했지만 도시민의 중요한 생명줄이었다.
“나리님들 법술이 사라졌으니 물도 말랐을 터이고, 아직 물이 있어 진을 쳤다면 진즉에 물막이돌이 되었을 터. 저것이 무엇을 하느라 저기 있을까?”
추선이 심상찮아 하며 물었으나 답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추선도 더 신경 쓰지 않고 호란 쪽을 향했다.
“둘로 갈라지자. 호란, 한돌! 후딱 가서 호란네 동생을 데리고 완씨저로 와라. 꾸물거렸다간 혼쭐을 낼 것이다!”
“네!”
호란은 황급히 움직였다.
추선이 동생 데려오는 일을 미루지 않고 먼저 틈을 내어준 것이 못내 고마웠다.
하늘인 거리는 한눈에 봐도 다른 곳보다 피해가 적었다.
대열이 무너진 후 퇴각해온 하늘인들이 결사적으로 지킨 모양이었다.
살던 건물이 제자리에 온전히 선 것을 보고 호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건물 문간에 도착했을 때 안심은 충격으로 바뀌었다. 건물이 텅 비어 있었다.
“하, 하란아!”
당황한 호란이 소리치며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남매가 자던 방을 비롯하여 어느 곳에도 사람이 없었다.
호란은 건물 밖으로 나가 아무나 다짜고짜 붙잡았다.
“여기 살던 사람들, 전부 어디 갔어?”
“응? 뉘시오? 그야 피난 갔지!”
대답한 사람은 면식이 있는 이였다.
하늘인이지만 반쪽짜리로, 반민들을 시켜 동네 여러 건물을 관리하던 영감이었다.
한돌이 노인에게 물었다.
“언제 떠났나? 여기 살던 사람이 전부 갔나?”
“이 동네 몫꾼들이랑 식솔이 다 같이 갔소. 어젯밤 장군석이 한창 날뛸 적에 떠났소.”
“하란이는! 몸 아픈 애가 있는데. 어떻게 됐어?”
“이름은 모르고, 기침병 있는 애를 데려가네 마네 승강이를 하던데 그 애 말인가?”
노인이 호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누이가 몫이 큰 꾼이라던데. 혹 댁이시오? 왜 이제사 오셨소? 남문서 몫꾼이 많이 죽었다길래 댁도 죽은 줄 알았지. 전사자가 남긴 식솔을 안 챙기면 명예가 있네 없네 하다가 결국 데리고 갔소.”
호란은 발을 동동 굴렀다.
호란이 정말 죽었다면야 그렇게 고마운 일이 없었을 것이다.
팍팍한 남운관에도 하늘인의 도리가 살아 있었다고 눈을 감고서도 기뻐하고 칭송했을 것이다.
하지만 호란은 살아서 동생을 데리러 왔다.
다른 무리가 동생을 챙겨갔다니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었다.
“다들 어디로 갔어?”
“일단 혜원읍성을 향한다던데. 목적지를 확실히 정하지는 않은 것 같았소.”
“지금, 지금 쫓아가면….”
호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방향만 잘못 잡지 않는다면 못 쫓아갈 것은 없다.
하지만 단 하루라도 대열을 빠져나가는 걸 추선이 허락할까?
돌아갈 때는 식량과 짐을 많이 가져가야 한다.
도적 떼도 있고 거석도 있는데 몫꾼이 하나라도 빠지게 놔둘 리가 없었다.
지켜보던 한돌이 입을 열었다.
“이러면 어떠냐. 너는 시문 나리를 모시고 싶은 거지? 추선에게 돌아가서 계속 나리를 뫼셔라. 네 동생은 내가 찾아다가 데려다주마.”
호란은 놀랐다. 한돌이 처음 남겠다고 했을 때보다 더 놀랐다.
“네가… 왜?”
“왜라기보다. 네가 나보다 더 나리를 모시고 싶어 하잖느냐. 나는 애초부터 그 무리에 있기 싫었고. 네 동생 찾으러 다니는 동안은 하루라도 가추선이 가황선이 면상을 안 보겠지.”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다.
이대로 하란이를 찾으러 가면 한돌은 몫을 버리고 무단으로 대열을 이탈한 것이 된다.
나중에 돌아와서도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가뜩이나 폭도 때문에 추선의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의심을 받고 내쳐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돌 너도 시문 님께 은혜를 갚겠다고 했잖아.”
한돌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네가 나으리를 도와드리면 그게 그거지. 그렇게 돌아가는 게 하늘인 무리 아니냐?”
호란은 고개를 숙였다.
더는 고맙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말로는 안 될 것 같았다.
“동생 이름이 하란이랬지? 너랑 닮았냐?”
“닮았어…. 남들은 다 안 닮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똑같아….”
“닮았다는 거야, 안 닮았다는 거야?”
한돌이 구시렁거리더니 호란에게 말했다.
“어차피 욕먹을 거, 넌 얼른 완씨 댁에 가기라도 해라. 추선이 난 왜 안 오냐고 물으면 맘 바뀌어서 떠났다고 그래. 그래야 너라도 책을 안 받는다.”
한돌은 호란이 더 말을 붙일 틈을 안 주고 등을 돌렸다.
거리를 가로지르고 남의 집 담을 휙 넘더니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호란도 완씨 댁을 향할밖에 도리가 없었다.
완씨 저택은 폭도의 습격에서 무사했다.
시문과 총치총령의 위세 덕택인지, 아직 몫 하는 내군들이 방비해선지 알 수 없으나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추선은 이미 가져갈 짐을 다 추려두고 있었다.
혼자 나타난 호란을 보고 추선이 물었다.
“한돌은? 네 동생은?”
호란이 더듬거렸다.
“한돌은 생각이 바뀌어서… 떠나겠다고….”
추선이 한쪽 눈썹을 높게 치켜올렸다. 그가 짜증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한돌이 네 동생을 데리러 갔느냐? 어디로?”
“어? 네?”
호란이 버벅대는데 추선이 재차 다그쳤다.
“하지도 못하는 거짓말 짜낼 생각 말아라. 그게 아니면 네가 동생 얘길 먼저 안 꺼낼 이유가 없지 않아? 그래서 네 동생이 어떻게 되었는데?”
호란은 할 수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피난민을 따라갔대요. 피난민이 어디로 갔는지 확실히 몰라서….”
“그래서 한돌이 네 동생을 찾으러 피난 행렬을 따라갔느냐? 너는 일단 돌아오고?”
추선은 보지도 않고 다 본 듯이 말했다.
호란과는 다르게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
호란은 대답을 못 하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기껏 한돌이 마음을 써줬는데 이제 호란도 한돌도 책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추선은 뜻밖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 이번은 특별히 한돌을 벌하지 않으마. 애초에 네 동생을 찾고자 왔으니 한돌이 꼭 몫을 버렸다고 할 수는 없지. 우리는 일단 돌아가자. 한돌도 네 동생을 찾으면 별택으로 돌아오겠지?”
호란은 얼떨떨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스러운 한편으로 어리둥절했다.
추선이 자기에게 이렇게 너그럽게 굴다니.
존댓말 안 했다고 시에서 쫓아내려고 했던 그 추선이 아닌 것 같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