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62
162화
* * *
자영은 군을 독려해서 성으로 쇄도해갔다.
법군의 주력을 두 갈래로 나누어 성의 다른 방향으로 보내고, 눈앞의 거석 무리는 자신이 맡았다.
성벽에 달라붙은 거석 떼를 반 이상 처치한 후에야 각루 위의 법군이 수비군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성 안팎에서 협공을 받자 남은 거석 무리는 오래지 않아 무너졌다.
하지만 다천관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성 밖의 인가와 논밭은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하고 그대로 짓밟혔다.
북문은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대파되었고 하늘인 부대의 희생도 컸다.
자영이 성문 안으로 들어가자 부총령과 총치부 태보, 양부 고관들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총치총령님,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떠나 계신 동안 갑자기 관성 전체에 기운이 막히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거기다가,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거석들이….”
“우는소리밖에 할 것이 없는가!”
자영이 버럭 고함쳤다.
“그대들은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인가! 관성을 수비할 막중한 책임을 맡고서, 자기 자리조차 못 지키고 우왕좌왕하는가!”
하지만 부총령은 죄스러워하기는커녕 제가 억울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마력석이 있어도 법술을 못 쓰는 판국에, 자리만 지켜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변고 때에도 일이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총치부 태보가 옆에서 말을 보탰다.
“자인이시여, 대체 홍은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혹시, 홍릉에 잘못 손대어서 동티가 난 것은 아닙니까?”
“그걸 말이라고…!”
분노를 터뜨리려던 자영이 말을 멈췄다. 그의 안색이 바뀌었다.
자영이 뒤를 돈 순간, 홍은산 방향에서 하늘을 찢는 것 같은 우르르 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결치는 듯한 진동이 대지를 타고 전해졌다.
다른 땅인들도 모두 얼굴이 창백해졌다.
쩌렁쩌렁한 메아리가 그친 뒤에도 대지의 맥동은 멈추지 않았다.
토 과목을 전공한 이가 아니라도 땅의 이변을 모를 수는 없었다.
태보가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불안에 찬 소리로 물었다.
“말씀해주십시오, 자인이시여! 대체 저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 * *
단과 호위가 석실을 벗어난 뒤, 호란은 잔뜩 긴장한 채 시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시현은 완전히 땅 쪽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바닥에 깔린 마력회로 여기저기를 빛이 흘렀다.
그때마다 땅속의 기운이 맥동하며 존재감을 늘렸다. 시현은 불안정해진 땅속의 기운을 갈무리하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하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점점 커지고 거칠어지고 있었다.
“시문 님, 대답 안 하셔도 되니까 듣기만 하세요.”
시현 곁에 선 호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운모는 사실, 이미 와 있는 거죠?”
시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호란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시문 님하고 운모는, 이미 싸우고 있는 거죠?”
시현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운모와 나는 지금 이 산에 묶인 기운을 두고 지배권 다툼을 하고 있다. 쉽지는 않구나.”
호란은 더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지하 석실에 넘쳐흐르는 마력 때문에 운모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감람이 죽고 법력진이 완전히 부서진 후, 호란은 바닥에 넘실대는 기운이 어떤 의도와 감정을 품고 움직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의외로 그것은 모들이나 모새에게서 느꼈던 살기나 적의 같은 것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생기, 인기척에 가까웠다.
마치 이 산 전체가 운모의 일부인 것처럼.
소름 돋는 생각이었지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산중턱에서 처음 운모와 맞붙었을 때, 운모는 기운이 어떤 개념인지, 자영이나 시현이 어떻게 마법을 쓰는지 꽤 잘 아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기운을 실제로 느끼는 능력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또 마법처럼 자유자재로 대지를 다뤘다.
어떤 경우에 그런 일이 가능한지 호란은 아주 잘 알았다.
하늘인 중에는 기세를 느끼는 사람도 있고 못 느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기세를 전혀 못 느끼는 하늘인도 제 몸의 기운은 누구보다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 자기 몸이니까.
운모 역시, 대지가 제 몸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대지에 감도는 기운을 느끼지 않고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홍은산이 운모의 몸이고 이 지하의 기운이 운모의 힘이라면….
그러면 팰 수 있다.
운모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팰 수 있을 것이다.
호란은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자기가 돌발 행동을 하는 게 시현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똑같은 돌발 상황이라면 운모보다는 시현이 유리할 것이다.
시현은 호란의 기운도, 호란의 생각도 읽을 수 있으니까.
어딜 팰지도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단과 시현이 동력원이라고 부른 곳, 석실의 중심이었다.
땅이 아니라 적이라고 생각하고 보니 제법 기결 같은 흐름까지 보였다.
마음을 정한 호란은 시현의 팔을 살짝 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시현은 약간 놀라면서도 호란이 당기는 대로 물러섰다.
시현이 충분히 거리를 두자 호란은 바로 움직였다.
땅을 박찬 호란은 석실을 가득 채우고 거칠게 흐르는 마력을 타고 빙글 몸을 돌렸다.
자신의 힘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기운에 몸을 맡기자 처음 거석의 기결을 깨던 순간이 머리를 스쳤다.
그때 호란은 지금보다 훨씬 약했다. 하지만 상대의 힘을 이용하여 나보다 더 크고 강한 상대를 이긴 경험은 호란이 세상을 보는 눈 자체를 바꿨다.
“야아아!”
호란은 흐름을 탄 기세 그대로 바닥에 주먹을 꽂았다.
석실 한가운데를 차지한 원판이 굉음을 내며 둘로 갈라졌다.
깼어. 호란은 직감했다. 분명 무언가의 흐름을 끊었다.
시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맺힌 혼이여, 깨어져라, 넘치라, 풀려나라…!”
시현이 한 번 외칠 때마다 석실 바닥의 마력 회로 전체가 타는 듯 주홍빛을 깜빡이며 탄내를 피웠다.
복잡하게 얽힌 마력회로 사이로, 돌바닥이 쩍쩍 금을 내며 갈라졌다.
오랫동안 마력회로에 얽혀 있던 기운이 옛 형태를 버리고 새 자리를 잡기 위해 요동치는 것이 호란에게도 느껴졌다.
“형상 없는 만유여, 난 대로 흐르라!”
시현의 마지막 외침과 함께 벼락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깨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호란은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고 귀를 막았다.
눈을 감은 채로도 메아리와 땅울림이 석실 전체를 뒤흔들고, 땅 밑에서 시작된 진동이 머리 위로 빠져나가는 걸 다 느낄 수 있었다.
겨우 눈을 떠보니 시현도 귀를 막고 있었다. 하지만 열기 어린 눈은 여전히 기운의 흐름에 집중한 채였다.
호란은 먹먹한 귀를 누르며 시현에게 다가갔다.
“시문 님, 괜찮으세요…?”
시현은 호란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혼자 중얼거렸다.
“됐다. 해냈다…! 이 땅의 기운을 감람의 마력회로로부터 떼어냈다. 이제 기운을 이 일대의 지맥에 심어 지반을 보해야….”
시현의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이번에는 위에서 진동이 시작됐다.
봉인고를 향해 뚫린 석굴에서 돌과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시문 님, 출구가 무너질 것 같아요! 나가요!”
“아직, 조금 더…!”
시현은 여전히 열중한 눈을 하고 아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호란은 냅다 달려들어 시현을 어깨에 들쳐멨다.
“나가서 하세요!”
땅울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젠 다천관에 산사태가 나든 지진이 나든 나가기부터 해야 했다.
호란은 시현을 짊어진 채 죽을힘을 다해 땅을 박찼다.
석굴에 금이 가고 있어 내려올 때처럼 벽을 붙잡고 기어 올라갈 수가 없었다.
호란은 석굴 벽을 번갈아 차며 반쯤 악다구니로 위를 향했다.
시현이 자기를 꽉 잡아주면 고마우련만 지금은 서로 무얼 바랄 상황이 아니었다.
시현은 눈을 꽉 감고 주먹을 쥔 채 입속으로 무엇을 빠르게 중얼대고 있었다. 이마는 한참 전부터 진땀에 젖어 있었다.
진동으로 눈앞이 흔들리고, 다음번 찰 곳을 잃었다 싶은 순간 시야가 확 트였다. 허우적대듯 뻗은 손이 석굴 입구에 턱 걸렸다.
호란은 한 팔로 시현을 붙잡고 다른 팔과 다리를 버둥대서 어떻게 몸을 끌어올렸다.
반듯하게 다듬은 돌로 만들어진 바닥은 처음에 내려갔던 봉인고였다. 눈물 나게 반가웠다.
봉인고가 탄탄하게 만들어져 있었던 덕택에 온 산이 흔들리는데도 좁은 석굴 입구가 파묻히지 않은 거였다.
고개를 드니 시현이 아까 넓게 뚫어놓은 봉인고 천장이 보였다.
시현이 지반을 안정시킨 덕인지, 끝나지 않던 땅울림도 점점 진정되고 있었다. 호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현을 일으켜 세웠다.
“시문 님, 봉인고까지! 봉인고까지 올라왔어요!”
“그래….”
시현은 숨을 허덕이며 비틀거렸다.
제 발로 서기는커녕 눈 뜰 힘도 없어 보였다.
호란이 죽을힘을 다해 석굴을 올라오는 동안 시현도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했던 모양이었다.
“괜찮으세요? 얼른 나가서….”
호란이 시현을 부축해 출구 쪽으로 이끄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확 드리웠다.
상황이나 방향을 판단할 틈도 없었다. 호란은 시현을 끌어안고 그냥 땅을 굴렀다.
쾅 하고 호란의 옆을 내려친 것은 한아름은 되는 바윗덩어리였다.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그걸 기어 나오네.”
호란은 그 목소리를 알았다. 사실 그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참이었다.
하지만 거친 말투와 갈라진 음성은 아까의 운모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 처음 나타났을 때의 나긋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봉인고 입구에 버티고 선 운모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줄다리기만 끝까지 상대해 줘도 알아서 파묻혀 죽을 줄 알았는데. 끝까지 손을 쓰게 만든단 말야.”
“운모…!”
시현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호란도 눈을 부릅뜨고 운모를 노려보았다.
운모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가 웃는 것처럼 입을 비틀더니 종알거렸다.
“의외야. 여러모로 예측에서 벗어났어. 완씨 시문은 인명을 최우선해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나? 다천관이나 관군들을 위기에 몰아넣으면 적당히 물러나거나, 최소한 신중해질 줄 알았거든…. 이렇게 무슨 전차처럼 밀어붙여올 줄이야.”
호란은 운모에게 시선을 붙박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운모의 몸을 타고 흐르는 기운은 분명히 흐트러져 있었다.
넓게 벌어진 옷깃 사이, 두 가지 색으로 얽힌 나선무늬는 겉보기엔 아무 흠집이 없었지만 호란은 왠지 그 기결에서 빛이 새는 모양이 보이는 것 같았다.
호란의 한 방은 틀림없이 운모에게 타격을 주었다. 자신이 지배하던 막대한 기운을 시현에게 통째로 빼앗긴 것도 적지 않은 타격이었을 것이다.
파고들 빈틈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쪽도 만신창이였다.
시현은 마력석 걸낭을 잃었고, 그 전에 주문을 쓸 수 있을지도 걱정되는 상태였다.
호란은 싸울 수 있었지만 지금 운모를 공격하려면 시현과 떨어져야 했다.
시문 님을 두고 봉인고를 뛰쳐나가서, 운모를 상대하는 동안… 운모가 시문 님을 놓아둘까? 그럴 리가 없었다.
호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호란의 기분을 읽은 것처럼 운모가 생긋 웃었다.
그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극열의 심이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