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63
163화
* * *
“극열의 심이여! 발산하라!”
주문을 쏘아낸 것은 헌수였다.
운모의 관자놀이 바로 곁에서 화염 마법이 격하게 폭발했다.
폭발에 떠밀린 운모가 크게 휘청였다.
“큭…!”
틈을 주지 않고 또 다른 화염 마법이 날아왔다.
운모는 팔로 불꽃을 가로막으면서 겨우 자세를 잡았다.
그의 시선은 주문이 날아오는 쪽이 아니라 호란과 시현을 향하고 있었다.
운모의 넓은 치맛자락이 휘날리고, 등 뒤에서 흙무더기가 치솟아 시커멓게 하늘을 가렸다.
대비하고 있던 호란은 바로 움직였다.
“시문 님, 숨 참으세요!”
호란은 시현을 끌어당겨 운모가 떨어뜨렸던 큰 바위 뒤로 밀어넣고 제 몸으로 위를 덮었다.
공교로운 장소였지만 봉인고 안에서 몸을 피할 곳은 거기뿐이었다.
격렬한 기운이 담긴 흙 사태가 호란의 등을 때렸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압력과 어둠에 삼켜졌다.
“…!”
호란은 이를 악물고 힘을 다해 버텼다. 서형이나 최길처럼 커다랗지 않은 게 분했다. 쏟아지는 흙을 다 막아내기엔 자기 몸이 너무 작았다.
호란은 그 상태로 시간이 갔는지 안 갔는지 잘 몰랐다.
다음에 안 것은 위를 내리누르던 무게가 가벼워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꽉 감은 눈꺼풀 사이로 바깥 빛이 스몄다.
호란의 몸 위를 덮고 있던 흙과 돌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스르륵 움직여 공간을 틔웠다. 누군가 마법으로 흙더미를 치워주고 있었다.
호란은 눈을 뜨고 시현의 위에서 물러났다. 아래 있던 시현도 작게 기침하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세요?”
호란의 물음에 시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건 내가 물어야지. 다치지 않았느냐?”
“끄떡없어요! …아마.”
곧 다천관 몫꾼들이 뛰어 들어와 두 사람을 흙구덩이에서 끌어냈다.
밖으로 나와 보니 봉인고 주위의 요새 잔해도, 봉인고를 둘러쌌던 흙구덩이도 이미 형태가 없었다. 운모가 주위 지형을 통째로 허물어 봉인고를 파묻으려 했던 모양이었다.
“자네 괜찮은가!”
헌수가 무른 흙을 밟으며 허둥지둥 시현에게 달려왔다.
뒤쪽에 다른 법술사 여럿과 스무 명 가까운 몫꾼들, 그리고 단의 모습이 보였다.
“운모는?”
시현의 물음에 헌수가 분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마지막에 크게 사태를 일으킨 후 모습을 감췄네. 미안하네. 자네가 법력진도 없애주었는데 손도 못 쓰고 놓쳤군.”
“아니야. 덕택에 살았네. 자네는 자인과 함께 산을 내려간 줄 알았는데.”
“본대에 다른 법술사들을 데리러 갔었네. 총치총령께서 하산하신 이상, 나보다는 토법사가 더 필요할 것 같아서….”
헌수는 말하다 말고 면목 없는 얼굴이 되었다.
“미안하네.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처음엔 법력진 때문에, 그다음에는 요동치는 지맥 때문에 법군들이 꽁무니를 빼서…. 이나마도 자네가 보낸 아이가 재촉하며 앞길을 잡은 덕분에 아슬아슬 때를 맞춘 거야.”
헌수는 말하면서 단 쪽을 곁눈질했다. 그가 성의를 담아 다시 말했다.
“위험하고 어려운 일은 전부 떠맡기고, 우리가 자네를 볼 낯이 없네.”
“어쨌든 와주지 않았는가.”
시현은 말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싸움이 끝난 산정은 쑥대밭이었지만 고요했다. 봉인고는 물론 요새 잔해까지 흙 밑에 파묻혀, 처음 올라올 때와는 완전히 다른 지형이 되어 있었다.
헌수가 물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결국 봉인고 지하에는 뭐가 있었던 건가?”
“이 장소에는….”
시현은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려다 잠깐 입을 닫았다. 그는 머리에 묻은 흙을 털려고 손을 들었다가, 도포 소매에서 더 많은 흙이 떨어지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그는 화제를 바꿨다.
“자인 총치총령에게 지맥을 살피라고 하게.”
“지맥을? 홍은산의 지맥 말인가?”
“…….”
시현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알아서, 잘….”
“응?”
“알아서들 하게. 나는 가서 좀 자겠네.”
“아, 당연하지! 어서 가세! 가서 쉬게! 얘기야 나중에 해도 되지!”
헌수가 허둥지둥 대답했다.
* * *
시현은 녹초가 되어서도 다천관의 영빈관으로는 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온성의 집에 가서 몸만 겨우 씻고 그대로 뻗어버렸다.
그래도 이부자리에 들어가기 전 자영이 보낸 시중꾼과 의법사를 다 쫓아버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지금은 온성네 집의 큰 방 한구석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방 저쪽에서 사람이 오가고 저녁상을 차리느라 시끄러운데도 아무 방해가 안 되는 것 같았다.
밥상 앞에 앉은 단이 수저를 들려다 말고 투덜거렸다.
“영빈관 들어가시면 시중꾼들이 숨 쉬는 것까지 다 돌봐줄 텐데, 왜 꾸역꾸역 여기로 찾아와서….”
맞은편에 앉은 온성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 양반이 똑똑하게 처신한 거다. 거기 가서 비단금침 덮은들 제대로 쉴 수나 있겠니? 지금 총치부고 총령부고 완전히 난리가 났어. 총치총령이 무리하게 홍릉에 쳐들어가서 괜히 피해가 컸다고 원성이 자자하단다. 아까 보니까 우리 아들놈도 얼굴이 다 썩었더구나.”
“아 네. 다 좋습니다만 나리님이 처신 잘하신다고 제가 좋을 건 없네요. 나리님 속 편하자고 시중꾼까지 다 마다하시면, 흙구덩이에 빠진 옷은 누가 빨고, 적셔 놓은 베갯속은 누가 갈고, 씻는 물은 누가 끓이죠?”
“그러게 목욕물은 내가 끓이겠다 하지 않았니? 네가 굳이 부뚜막 앞을 지키고서는.”
온성이 핀잔하자 단은 기가 막힌 듯 입을 딱 벌렸다.
“아니 그걸 어떻게 어르신 하시라 놔둡니까, 심지어 아까는 헌의 나리가 앞에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계셨잖아요.”
“뭐 어떠냐? 그런 게 다 쓸데없는 신경이란 거다. 그리고 우리끼리 있으니까 하는 말인데, 저 양반쯤 되면 옷은 그냥 버리고 새로 장만해도 되지 않겠니?”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나리님 입고 쓰는 물건들 대충 얼마짜린지, 어르신은 척 보면 아시잖아요….”
“얼마면 어떠냐, 내 돈도 아니고 네 돈도 아닌데. 왜 네가 그렇게 속을 태우느냐?”
“아오.”
단은 고개를 젓더니 식사를 시작했다.
정신없이 잠들었던 시현은 새카만 밤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단의 잔소리를 한 바가지 들으면서 늦은 저녁상을 받고, 차까지 받아 마시고 나자 얼굴이 도로 반들반들해졌다.
시현이 찻상을 물리려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밖으로 나갔던 온성이 민망한 얼굴로 들어왔다.
“우리 싹수없는 아들놈이 이 시간에 찾아왔는데. 잠시라도 만나주시겠는가?”
“헌의가? 이 시간에? 물론이네.”
시현이 놀라 말했다.
원래 헌수는 시현이 잠에서 깨면 만나고 싶다고 몇 번이나 전갈꾼을 보내왔었다. 깨고 나니 너무 시간이 늦어져 내일 보는 게 낫겠거니 생각했었던 것이다.
헌수가 머쓱한 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머뭇머뭇 인사말을 하는 그에게 온성이 호통을 쳤다.
“이 싹수없는 놈, 문께서 기침하신 것은 어찌 알고 득달같이 찾아왔느냐! 사람을 써서 부엌에 상 드나드는 거라도 감시한 모양이구나!”
헌수는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실 지금 자인 총치총령의 상황이 과히 좋지 않아서…. 해가 뜨면 당장 총치전에 사람이 모일 텐데, 미리 상황을 정리해두지 않으면….”
“그런 소리부터 늘어놓는 게 싹수없다는 게야!”
헌수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는 눈꼬리를 내리며 시현을 보았다.
“몸은 좀 괜찮은가? 의법사도 다 돌려보내고, 자네나 호위 아이가 다친 데는 없었는가?”
“괜찮네. 앉게.”
시현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온성을 보고 말했다.
“온의 그대에게는 여러 가지로 폐만 늘리는군. 당장은 물론 이후로도 적지 않게 부담이 될 텐데. 내가 이리 머물다 간 데 불필요하게 정치적인 의미를 찾아내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온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음, 그 문제는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으이. 자네와 함께 홍릉에 올랐던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고 있어서.”
“소문?”
시현이 되물었다. 어째선지 헌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온성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이리 말하더군. 완씨 시문은 사람이 분방하고 법도 지키기를 싫어해서, 방씨 온의와 죽이 잘 맞는 모양이라고.”
시현은 눈을 깜박였다.
“그건…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인물평이군.”
“중상모략 아니에요?”
호란이 정색하고 끼어들었다. 시문 님이 법도 지키기를 싫어한다니, 도대체 뭘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오늘 시문 님은 열심히 싸우기만 했는데요! 누구한테 나쁘게 한 적도 없고, 땅님도 하늘인도 다 똑같이 지켜줬다고요!”
호란이 따지고 들자 온성이 씩 웃었다.
“글쎄다. 바로 그것 때문에 말을 듣는 게 아닐까?”
“네?”
“원래 충분히 권력이 있는 사람은 남에게 아무리 거만하고 난폭하게 굴어도 무례가 아니란다. 면전에서 욕설을 하고 아랫사람의 뺨을 친들, 못됐다고 욕을 먹을지언정 무례하다는 소리는 안 들어요.
근데 딱 한 가지, 위아래의 구분을 흐트러뜨릴 때, 그때는 세상 없는 권력자라도 법도 모른다는 소리를 듣거든. 어떠니? 혹시 어르신께서 너희나 다른 하늘인들한테 너무 잘해준 건 아니냐?”
“아….”
짚이는 데가 있어서 호란은 입을 뻐끔댔다. 헌수는 시현도 호란도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하유관에서 시현이 단을 치료하라고 했다가 직살나게 욕을 먹었던 일도 떠올랐다.
호란이 뾰로통한 얼굴을 하자 시현이 달랬다.
“괜찮다 호란아. 내 생각에 분방하단 말은 좋은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은 좋은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그건 안단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조금,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시문 님이 좋으시다면 다행이지만요…. 사람들 진짜 이상한 것 같아요. 오늘 얼마나 큰일이 많았는데. 그깟 법도가 뭐라고.”
호란이 궁시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현이 말했다.
“예의와 규칙, 법도는 본디 서로를 편하게 대하기 위한 것이다. 정해진 법도에 따라 행동하면 실수로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할 일도 없고, 성의를 증명하려고 무리할 필요도 없으니.
그러니 사람들이 나를 두고 법도를 벗어났다 말하는 것은… 내 말과 행동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뜻이겠지.”
시현이 헌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헌수가 변명하듯 더듬거렸다.
“음, 다들 나쁜 뜻은 없을걸세…. 자네가 거느린 아이들이 언행이 남다르니까…. 조금 놀란 것뿐이겠지.”
시현이 가볍게 웃었다.
“조금도 상관하지 않네. 사람들 속이 좀 불편하면 어떤가. 금표 구역이 깨져 홍릉이 무너지고 봉인고의 밑바닥이 온 세상에 드러난 마당인데. 내가 무엇을 한들 그것보다 더 자네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을까?”
“…….”
헌수는 입을 벌렸다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다시 닫았다.
“돌 인간을 쫓아내고 당면한 위기를 넘겼는데도 자네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네. 봉인고를 부수고자 한 자영도, 덮고자 했던 반대파들도, 지금 가장 신경 쓰는 것은 한 가지겠지. 무엇을 밝히고 무엇을 덮을 것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