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64
164화
* * *
시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보고 헌수가 변명하듯 말했다.
“우리라고 무작정 과오를 숨기자는 것이 아닐세. 특히 자인 총치총령은, 그이는 봉인고 일을 밝히기 위해 변고 이전부터 총치부 노친네들과 다퉈왔던 분이야. 당연히 밝힐 것은 밝히자는 입장일세….”
“그렇겠지. 다만 자네와 자인은 내 입을 빌어서 그 일을 밝히고 싶을 텐데. 아닌가?”
“그것은….”
헌수가 다시 말을 잃었다. 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단 며칠이었지만 다천관 양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이미 훤했다.
갓 총치총령이 된 자영은 다천관에서 입지가 충분하지 않았다. 노후한 고관들은 자영이 봉인고를 문제 삼는 것을 자기들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홍은산 정벌을 준비하는 동안, 반대에 부딪힐 때마다 자영은 시현을 방패로 삼았다. 그건 자영에게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다천관을 지키려 했고 옳은 일을 하고자 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하는 것이 정치였다.
기대라고 있는 것이 큰 산이다. 시현은 이런 일에 익숙했다. 남운관에 있을 때라면 오히려 기꺼워하며 손을 빌려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시현이 말했다.
“아까 낮에 자네가 물었지. 결국 봉인고 지하에 무엇이 있었느냐고. 자네는 그걸 정말로 알고 싶은가?”
“당연히 알아야지, 내게 책임이 있는데….”
헌수는 대답했지만 어째 자신 없는 투였다. 시현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른 말을 꺼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내가 남운관에서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돌 인간을 찾기 위해서였네. 돌 인간이 세상의 모든 기운을 전부 북쪽으로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도 남은 기운이 북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막고자 먼 길을 온 것이네.”
“그것은 알고 있네. 변고 날 우리도 느꼈네. 남쪽에서 폭풍 같은 기운이 몰려와, 땅 위와 땅 아래의 모든 법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흘러가 버리더군. 어찌나 놀랐는지. 당하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네.”
“그야말로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었지…. 그러니 짐작하겠는가? 돌 인간은 그 일을 하루아침에 저지른 것이 아닐세. 그들이 오랫동안 시일을 들여 준비를 해왔던 정황이 있네.”
“준비라고 하면….”
안 좋은 예감이 들었는지 헌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변고 이전, 남운관에서는 모들이란 돌 인간이 남쪽의 한 분지에 일대의 기운을 불러 모으고 있었네. 한번 땅 밑에 막대한 기운을 모은 후, 그것을 시작으로 온 세상의 기운을 북으로 밀어 보냈지.
나는 변고가 일어난 날 그 장소에 있었네. 그 분지의 기운이 지렛대였는지, 마중물이었는지… 어떤 원리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들이 분지에 모은 기운이 변고를 일으키는 데 역할을 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네.”
시현이 얼굴을 깊게 찌푸렸다. 그날의 일은 시현이 이제껏 가장 통탄스러운 실패로 여겨왔던 일이었다.
시현이 시선을 떨어뜨리며 뇌까렸다.
“나는 그날 그 자리에서 모들을 막지 못한 것을 오랫동안 자책했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했네. 과연 그런 장소가 하나였을까? 온 세상의 기운을 한 곳으로 몰기 위한 안배가 있다면, 그것은 마땅히 온 세상 여기저기에 존재하지 않을까?”
헌수가 숨을 들이켰다.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 말은… 홍릉이, 홍은산의 봉인고가…. 설마, 설마 변고를 일으킨 원인이 봉인고 아래의 무언가란 말인가?”
“글쎄, 확인한 것은 아니네. 아까 나는 지반이 무너지지 않도록 막는 것만도 급했으니까. 하지만 감람이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나를 그 장소에서 떨어뜨리려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헌수가 땀이 찬 손바닥을 도포 자락에 문질렀다. 그가 말했다.
“듣고 보니… 그럴 법하네. 아까 지맥을 보하던 중에 총치총령이 말했네. 자네 덕에 당장 산이 무너지고 땅이 깨지는 것은 막았지만, 사방에 퍼진 기운은 지맥에 굳게 묶이지 않고 조금씩 북으로 흘러나가고 있다고. 특히 홍은산 아래의 흐름은 유독 세가 강하고 방향이 뚜렷하다고.”
“그런가.”
“이럴 수가….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돌 인간들이 홍은산 아래에 기운을 북으로 보내기 위한 안배를 하고, 기운을 가리는 법력진을 몇 겹씩 짜서 그것을 덮어놓았다면…. 그런데도 우린 아무것도 모른 채 백 년이 넘게….”
헌수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시현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도로 피곤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먼저 기운을 되찾은 것은 헌수 쪽이었다. 그가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눈을 빛냈다.
“그래도, 이제라도 알았으니 그나마 다행 아닌가! 자네 추측대로 홍은산에 그런 장치가 있다면, 부술 수도 있을 테지. 안 그런가?”
“음. 그럴지도.”
“지금이라도 봉인고 지하를 중심으로 홍은산 일대를 샅샅이 조사하고, 뭔가 수상한 물건이 있다면 파괴해서… 그러면 기운이 계속 북쪽으로 흘러나가는 걸 멈출 수 있을 걸세!”
“음.”
“변고 후로 거석을 막아내는 것도 큰일이었지만, 농지와 임야의 물과 기운이 계속 빠져나가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네. 이제부터라도 기운의 유출을 막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면 돌 인간을 처치할 동안 백성들이 버티기도 한결 수월할 걸세!”
“그렇지.”
헌수가 점점 희망에 차는데도 시현은 계속 태도가 시큰둥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호란은 의아해져서 시현을 쳐다보았다. 평소의 시현이라면, 이런 문제에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시현이 툭 말했다.
“그 일 말인데. 전부 자네들이, 다천관 사람들이 좀 알아서 하게.”
“응?”
헌수가 놀란 얼굴이 되었다. 시현이 말했다.
“홍은산은 다천관의 영역이 아닌가. 그 지하에 무엇이 파묻혀 있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 어떻게 해체해야 하는지, 자네들이 알아보고 자네들이 해결하게.”
“아, 그, 그래야지. 물론 그래야지. 다천관 일인데 당연히. 헌데, 그럼 자네는… 이제부터 앞길을 서두를 생각인가?”
헌수가 머뭇머뭇 물었다.
옆에 앉아있던 온성이 낭패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딱 짚었다. 호란은 이유는 몰랐지만 헌수가 말을 잘못했다는 것만 알았다.
시현이 살짝 웃었다.
“그럼 내가 여기 머물러 있으면, 자네들은 또 전부 내게 가져올 생각이었나?”
“아, 그, 그런 게 아니라….”
“분명히 나는, 문으로서 변고를 막지 못한 데 책임을 느끼고 있네. 그만큼 돌 인간을 격파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싶네. 필요한 일이라면 당연히 돕겠지만 내심을 말하면 가능한 한 다른 일에 여력을 분산시키고 싶지 않아.
더구나 무엇을 밝히자든가 숨기자든가, 땅인의 위신이 바닥에 떨어진다든가 백성들이 동요한다든가, 관성의 파벌이 어떻다든가, 그런 얘긴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고 상관하고 싶지도 않네.”
시현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뒤로 갈수록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호란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현과 헌수를 지켜보았다. 지금 그는 시현이 일부러 짜증난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짜증을 부리는 진기한 광경을 보고 있었다.
시현이 척 봐도 가짜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다천관에서 며칠 더 쉬고 싶지만 그쪽의 정치 문제에는 아무런 상관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자네와 심씨 자인이 많이 곤란할까?”
“아….”
“곤란해도 할 수 없네. 심씨 자인에게 전해주게. 내가 몸에 병이 있어서 요양하려고 하며, 돌 인간이 나타난 게 아니라면 부르지도 말고 찾아오지도 말라 말했다고.”
“알겠네….”
기세에 눌린 헌수가 풀이 죽어 고개를 수그렸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이번에 우리가 자네에게 너무 의지하기는 했지. 미안….”
“그런데 말이야.”
헌수의 입에서 사과의 말이 나오려는데, 옆에서 돌아가는 모양을 보고 있던 온성이 불쑥 끼어들었다.
“다른 건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겠다만, 헌이 네가 찾아오고 싶으면 아무 때나 와도 된다. 어쨌든 여기는 네 애비 집이니까.”
“아.”
시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가 어쩔 줄을 모르고 온성과 헌수를 번갈아 봤다.
“미, 미안하네…. 내가 방금, 말을 하다 보니…. 앞뒤를 잊고….”
시현이 더듬더듬 사과했다. 온성이 눈을 흘겼다.
“방금은 자네가 너무하이. 아무리 속이 상했어도 그렇지, 부모 앞에서 남의 아들놈을 그리 면박을 주는가.”
“그, 정말로… 미안하네. 온의에게도, 헌의에게도….”
헌수가 서둘러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야! 내가 너무 뻔뻔했네. 자네가 오늘 얼마나 고생했는데….”
사양의 말을 하는 중에도 헌수의 수염이 슬쩍슬쩍 실룩였다. 아버지가 제 편을 들어준 게 기쁜 모양이었다.
온성이 말했다.
“허긴 마음을 이해 못 할 건 아니지. 시문께서 예까지 오는 동안 별별 일을 다 겪으셨을 텐데. 타관 정치판이라면 지긋지긋하겠지.”
시현은 더 미안한 얼굴이 되었다.
“수월하게 왔다는 말은 못 하지만 그게 헌수의 탓은 아니지…. 내가 잘못했네.”
시현이 눈가를 문질렀다.
“정치나 파벌 같은 일보다도… 나는 자꾸 사람들에게 무엇을 숨겨야 하는 것이 싫네. 그게 옳은 일인지도 모르겠고….”
“아아….”
헌수가 난처한 빛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제에서 다천관은 시현에게 할 말이 없었다.
이제껏 다천관 중시조의 능묘라 말하며 신성시하던 장소에 거석의 소굴이 있었고, 고위 관료들이 합심하여 이를 숨겨왔다.
사실이 알려지면 파벌을 막론하고 다천관의 관인들 전체가 백성의 신뢰를 잃는다. 봉인고 조사를 강력하게 주장한 자영도 크게 보면 같은 처지다. 총치총령으로서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자영은 시현에게 덮을 수 있는 것은 덮어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시현은 자영과 헌수의 입장을 이해했다. 그래서 더 속이 상했다.
“선조들이 봉인고와 돌 인간 문제를 비밀로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정말로 후대를 나몰라라 해서 그랬겠는가. 당시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겠지. 지금 우리도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네.”
“부인할 수가 없군.”
헌수가 작게 말했다. 시현이 한탄했다.
“최소한, 무엇이 최선의 선택인지 알 수만 있다면….”
“하하하. 무슨 소리를 하시는가? 이런 일에 최선 같은 게 어디 있어?”
느닷없이 온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시현이 쳐다보자 온성이 빙그레 웃었다.
“옳은 일이든 아니든, 자네가 하는 일이 남의 안위를 흔든다면 싸움은 나기 마련이야. 싸움이 격해지면 누군가는 신세를 망치게 되어 있고. 자네가 일을 잘 하고자 한 선택이 남에게는 망하고 상하는 길일세. 뭔들 최선이 되겠는가?”
시현은 반박하려고 했다.
“그야, 약간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겠지만….”
“아이구, 그걸 약간이라고 말하는 게 자네의 문젤세.”
온성은 계속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미소엔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는 젊고, 강하고, 망신의 두려움을 아직 모르지. 그래서 뭐든지 명명백백하게 밝히자고 말할 수 있는 게야. 세상이 어떻게 뒤바뀌어도, 자네에게는 자기 위치를 지킬 힘이 있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네. 보신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지.”
시현은 온성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표정이 불편해 보였다. 그가 말했다.
“내가 고민하는 최선의 선택이란, 아무것도 모르고 변란에 휘말리는 백성을 위한 최선일세. 자기 보신에 급급해 백성이 화를 입어도 모른척하는 관인들이 아니라. 나는 그런 이들은 상관하고 싶지 않네.”
“하하. 싫어도 상관을 해야 하네. 어찌 됐든 그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니까. 이건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야. 시작은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의 문제였더라도… 한번 싸움이 일어나면 그것은 다 사라지네. 결국 누가 신세를 망치고 누가 살아남느냐의 문제만 남지.”
온성이 강조했다.
“아무렴, 사실이라네. 직접 망신을 한 사람이 하는 말이니 틀림없지.”
시현은 새삼 온성을 보았다. 헌수의 표정이 흔들렸다.
“아버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