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68
168화
* * *
“서격원 시절 소문이라면, 할아버지와 관련된 소문 말인가? 내가 진짜 문이 아니라는….”
“그래. 처음 소문과 삼본시 관련된 소문까지 전부, 그 뒤에는 틀림없이 교인이 있었을 걸세.”
“진짜요? 그 가짜 문이, 옛날에 시문 님 따돌린 사람이라고요?”
호란이 눈에 불을 켜고 헌수에게 바짝 다가붙었다. 서격원 따돌림 사건에 대한 호란의 분노는 그날 이후 조금도 식지 않았다.
헌수는 이제 당황하지도 않고 호란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단다. 내 생각일 뿐이지만 거의 틀림없어.”
시현이 물었다.
“단정하기 어려운 일인데. 무슨 증거라도 있는가?”
“굳이 증거씩이나 필요할까. 그때 우리 모두가 자네를 질시했네만, 가짜로라도 문이 되고 싶어 한 사람만큼 자네를 질투한 이가 또 있겠나? 교인이 정말 문을 꿈꿨다면 자네에게 악의를 품는 것도 자연하지.”
“그럴 수도 있겠네만, 그런 심증만으로는….”
시현은 믿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반면 헌수는 말할수록 확신이 뚜렷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헌수가 물었다.
“교인을 기억하면, 그이가 과거 시험에 마력석을 써서 격에 올랐던 것도 기억하는가? 다른 격도 아니고 인 격에 올랐지. 부정이 아니냐고 사방에서 말이 많았어.”
“기억은… 하네만.”
호란도 기억하고 있었다. 윤지관에서 마력석으로 과거 시험 치르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시현은 자기 동기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말했었다.
호란이 눈을 부릅떴다.
“그땐 세상에 마력도 있었는데 시험 칠 때 마력석을 썼어요? 그럼 그 사람은 가짜 문인 것만이 아니라, 원래 격도 가짜인 것 아니에요?”
“그렇지는 않다. 기감은 다소 뒤처질지언정, 그이의 학문적 성취는 충분하고 남았어.”
시현은 어째선지 교인이란 사람을 감싸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헌수의 태도는 냉정했다.
“어쨌든 교인이 남들과 다른 조건에서 시험을 본 것은 사실이 아닌가. 권세를 이용해 부정하게 격에 달했다 소리를 들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어.
그런데 실제는 어땠나? 막상 서격원에서, 부정하게 격을 얻었다고 입방아에 오른 사람은 자네였지. 그리고 그 소문이 거짓으로 밝혀진 다음엔 다들 민망해서 비슷한 이야기조차 꺼리게 되었네. 위씨 교인의 자격에 대한 얘기는 자연히 묻혀 버렸어.”
“아…!”
호란은 그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알 것 같았다.
헌수가 분한 듯이 말했다.
“당시만 해도 자네에 대한 헛소문은 별 의미 없는 심술에 불과해 보였어. 자네가 진짜란 건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밝혀질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소문으로 확실하게 이익을 본 사람이 있더란 말이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자격도 없으면서 문을 자칭하고 있지.
난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생각 안 하네. 소문을 퍼뜨린 건 교인이야.”
“…….”
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렴풋해 보이던 악의에 주체가 선명해지고 나니 더 마음이 안 좋아진 것 같았다.
헌수가 힘주어 말했다.
“알겠는가? 자기 허물을 묻을 목적으로 한 행동이라도, 그이는 명백하게 자네에게 악의가 있어. 그리고 문을 참칭해도 아무도 말리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지금 대운관에서 휘두르고 있네.
대운관을 피해서 가게. 지금 자네가 거기 가면 절대로 좋은 일이 없을 거네.”
“새겨듣지.”
시현이 무겁게 말했다.
헌수와 시현은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다천관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져 앉아 있던 단이 소리 없이 일어나 방을 나갔다.
“단, 어디 가?”
호란은 단을 쫓아나가며 물었다. 툇마루를 내려가며 단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얘기 들었잖아. 후딱 행장 차려서 최대한 빨리 이 동네 떠야 돼. 헌의 나리는 저렇게 말해도, 다천관 다른 인사들은 다 나리님 옷자락 붙잡고 늘어질걸.”
“아, 시문 님 겨울옷 찾으러 가려고? 그럼 같이 가.”
“…그러든가.”
단은 빠른 걸음으로 뜨락을 나섰다.
다천관에 도착한 직후 단은 온성에게 이런저런 가게와 직공들을 소개받아 겨울 행장 마련을 시작했다.
아직 추워지려면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추워진 다음에 준비하면 늦다는 게 단의 이야기였다.
수레 벽을 새로 바르고, 솜옷과 털옷, 솜 넣은 겹버선과 침낭, 각종 방한구, 여러 용도의 깔개, 탕파, 실내용 풍로, 심지어 말을 위한 바람막이까지 준비할 것이 끝도 없었다.
그래도 다천관 체류가 길어지는 동안 대부분은 준비가 끝났다. 남은 것은 크고 작은 모피와 시현의 겨울 의복뿐이었다.
모피도 옷 함도 부피가 상당해서 단 혼자서 다 가지고 오기는 어려울 거였다.
하지만 막상 가게에 와 보니 들고 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단은 물건을 수령하는 단계에서부터 난항을 겪었다.
침선방 점원이 물건을 바로 안 내주고 이리저리 말을 돌리는 걸 보고 호란은 아직 옷이 완성이 안 됐나 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더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단이 문서를 펼치며 따졌다.
“지난번에 수결받은 영수증도 있고, 남은 대금도 가져왔는데, 왜 물건을 못 내준다는 겁니까?”
“아니 안 준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이게 보통 물건도 아니잖소. 일을 확실하게 해야지.”
침선방의 장부 담당은 뚱하게 말하면서 단의 색 바랜 두루마기와 호란의 홑겹옷에 흘끔흘끔 시선을 보냈다. 요는 단과 호란의 행색이 신경 쓰이는 거였다.
“아, 제가 수령인으로 마땅찮다?”
단의 목소리에 짜증이 훅 솟구쳤다. 장부 담당자는 딴청을 하며 자꾸 말끝을 줄였다.
“누가 그렇다나. 워낙 귀물이니 믿고 건넬 수 있어야 된단 거지. 짐 가져갈 몫꾼 나리들도 좀 여러 분이면 좋고.”
“아, 심지어 여기 이 나리가, 혼자서는 물건 건사하기에 몫이 부족해 보인다? 그 뜻이신가?”
단은 서슴없이 호란을 끌어들였다. 가짜 문 문제로 아직 기분이 상해 있던 호란이 불퉁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보여?”
“아이고, 그건 아니굽쇼….”
장부 담당은 굽신거리면서도 재빨리 침선방 몫꾼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곳처럼 고가품을 다루는 가게는 지키는 몫꾼들의 실력도 뛰어나 뒤에 와서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세가 되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몫꾼들은 딴 데를 보며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다들 일찌감치 호란의 기세를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맡은 몫은 도둑이나 강도를 잡아주는 거지, 사람 볼 줄 모르는 장부쟁이가 일으킨 시비를 수습하는 게 아니었다.
평소 같지 않은 몫꾼들의 태도에 장부 담당은 당황했다. 단이 팔짱을 끼고 담당에게 턱짓했다.
“어쩔까요. 나 그냥 돌아갑니까? 소개해준 분께 누 될까 봐서 가기 전에 한 번만 물어봐 주는 겁니다.”
“어어….”
단이 뻣뻣한 태도를 고수하면서도 제대로 항의하지 않고 물러나려 하자 장부 담당은 오히려 당혹해했다.
같은 대갓집 종자라도 주인 이름 팔며 유세하고 큰소리로 진상 부리는 치들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진짜 겁내야 하는 건 주인 가까이에 머물며 일을 직접 고해바칠 수 있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주인의 심기와 체면을 아껴서 절대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뉘 댁서 왔다 간지도 모르게 조용히 돌아간 뒤 유무형의 불이익을 보따리로 되돌려보냈다.
솔직히 말하면, 단이 후자 같은 유형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대갓집 시종으로 어려서부터 기름칠하고 살아온 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나갈 물건은 전부 고관대작에게나 갈 것들이 맞았다. 단이 겉보기와 다르게 쟁쟁한 사람의 종자라면 빈손으로 내쫓았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그가 갈피를 못 잡고 우물거리는데, 마침 안쪽 공방에서 옷 짓는 장인들이 나왔다. 시현의 치수를 재러 다녀오면서 단을 여러 번 보았던 우두머리 침선장이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달려왔다.
“야, 딱 맞게 오셨네! 물건 준비 다 해놨어. 자자, 확인부터 하시게!”
침선방 우두머리가 단을 알아보고 살갑게 맞아들이자 장부 담당은 울상이 되었다.
단은 그를 흘긋 보고 금폐가 든 주머니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상방 사람 티 작작 내쇼. 사람을 못 알아보면 돈이라도 알아봐야지.”
연차 오랜 침선장이 단의 옆구리를 찌르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고 심술은. 다 아실 만한 양반이! 지난번이랑 행색이 너무 다르니까 우리 쪽 사람이 못 알아보지!”
단은 픽 웃었다. 이렇게 대놓고 ‘네 옷 때문이다’라고 말해버리면 화도 안 났다.
온성이 소개한 가게답게 물건에는 한 치 흠도 없었다. 호란이 상자를 짊어지고, 가게를 나서면서 단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 씨…. 잘못했다. 이런 데는 제대로 된 옷으로 갈아입고 왔어야 했는데. 괜히 서두르다가.”
호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방금 단이 잘못한 거였어?”
“아니. 옷차림 가지고 남을 무슨 사기꾼 횡령범 취급하는 저 새끼가 재수 털리는 거지.”
“역시 그렇지?”
“근데 그 사람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고. 물건 잘못 건넸다가 탈이라도 나면 제 깜냥으론 감당 안 되니까. 어느 대갓집 종자가 나처럼 입고 다니겠냐. 나라도 좀 의심했겠다.”
“옷이 뭐가 중요해? 사람이 믿을 수 있는 게 중요하지.”
“믿을 수 있는지 어떤지는 어차피 모르잖아.”
“그래도….”
호란은 입을 삐죽였다. 가뜩이나 단은 사방에서 치이고 다닐 때가 많은데, 이젠 옷차림 가지고도 남의 눈치를 봐야 한다니 자기가 다 억울했다.
호란이 마음 상한 걸 눈치챈 단이 슬쩍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 이해하든 어쩌든 막상 내가 당하면 재수 털리지.”
“어. 그 사람이 위아래로 쳐다보는 거 진짜 재수 없었어.”
호란은 강하게 동조했다.
얼마 더 걷다가 단이 불현듯 말했다.
“나도 큰일이야. 너하고 나리님하고 다니니까 사람이 좀 이상해지는 거 같아.”
“이상해지다니?”
“어디 가서 괄시당하면 짜증이 나.”
“그건 이상한 게 아니잖아. 당연한 거잖아?”
호란의 물음에 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그런 거에 일일이 신경이 긁히면 안 돼.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내는 쪽이 훨씬 편해.”
“하지만 그런 일에 화가 안 날 수가 있어?”
“안 날 수 있다면 안 나는 게 좋지.”
“…단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납득은 안 갔지만 호란은 이 문제를 쉽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단도 굳이 더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호란은 살짝 화제를 비틀었다.
“요즘 단이랑 시문 님이 없던 짜증이 늘어난 것 같기는 해.”
“아. 나리님 요즘 좀 그러지. 예고 없이 뜬금없이 본성 튀어나오는 거.”
“아니, 본성이 아니라… 시문 님은 원래는 그러지 않으시잖아.”
단은 호란의 반박을 무시하고 말했다.
“나리님은 아팠을 때 체력 떨어진 게 덜 돌아와서 그래. 잘 먹고 잘 자면 괜찮아져.”
“그럼 단은? 단도 체력이 약해서 그러는 거야?”
“약하다고 말하지 말아 줄래? 절대 사실이 아닌데, 네가 말하면 반박을 못 해서 빡이 치거든?”
“아니면 단도 지쳐서 그래?”
호란의 말속에 든 걱정을 눈치채고 단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난 괜찮아.”
“무조건 괜찮다고 하지 말고. 이러면 어때? 달리기를 해. 그러면 속에 쌓인 거 다 풀려.”
“돌았냐? 내 체력은 충분해. 그리고 하루 노동에 딱 맞게 배분되어 있다고.”
단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집을 나설 때에 비해 기분이 한결 나아 보여서 호란은 안심했다.
단은 제 말대로 순식간에 떠날 준비를 마쳤다.
시현 역시 자영과 독대 한 번으로 모든 복잡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번에는 호위 지원을 사양했다. 다천관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면 관성 사이 알력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다음날 온성의 집을 나서려고 뜨락에 섰을 때 호란은 괜히 마음이 울컥했다. 그 며칠 사이 집이랑 사람한테 정이 들었다.
다천관에서도 좌충우돌은 많았지만 이 집은 항상 마음 편히 머물 수 있는 곳이었다. 여행을 떠난 이후 그런 장소를 가져본 것은 처음이었다.
(계속)